10월의 마지막날, 어쩐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을 들어야할 것 같은 날입니다.
가을도 보내야 할 때입니다. 추위가 오기 전에 갈무리해야 할 것들이 많은 듯싶은데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할 뿐 정리가 되지 않는군요.
이럴 땐, 산으로 가는 수밖에요. 산길을 차분히 걷다 보면 헝클어진 머릿속이 저 가지런한
길처럼 정돈이 될 거 같습니다. 우리 동네 백봉산을 오릅니다. 잣나무가 많아서 '잣봉산'이라 불린 산이 언제부턴가 '백봉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는 산입니다.
자주 불러서 입에 붙은 이름이라 백봉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잣봉'이라는 우리말에 가까운 이름이 더 살갑기는 합니다. 아마 일제시대 지명 정리 차원에서 그리 지어진 이름이지 싶은데요, 한때 제 이름을 찾아줘야 하지 않겠나 하는 목소리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들리지 않네요.
마을에서 멀지 않으니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들 찾습니다. 길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주 능선길 주변으로 숱한 길들이 어지럽게 이어져 있습니다. 어느날 가서 보면 못 보던 길이 보이고는 합니다. 산이 좋아 산에 가나 산이 괴로운 이 모순을 딱히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다만, 산에 다녀오되, 다녀온 흔적을 최소화하는 방법 그것말고는요. 마음이라도 산에 폐를 끼치는 일은 삼가야 겠다고 마음 먹는 방법 밖에는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산은 더 오래 지금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겠지요.
산을 괴롭게 하는 게 어디 등산객뿐이겠는지요. 시도때도 없이 벌어지는 산자락 주변의 공사현장이야 말로 가장 크고 가장 깊게 산을 상처내는 행위겠지요. 백봉산 들머리도 그렇습니다.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산자락이 많이 깎여 나갔습니다. 산자락 들머리에 잣나무가 참 보기좋게 무성했었거든요. 잣나무 군락이 뭉텅이로 잘려 나간 건 당연지사였고, 다행스럽게 살아남은 잣나무들도 스트레스를 받는 건지 시름시름 앓아가는 중입니다. '잣봉산'이라는 이름이 이젠 정말 무색해 지게 되었습니다.
이젠 빌라주택 단지 2동이 아파트 위로 지어지는 걸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잣나무 군락지의
앞날도 위태해 보입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난 여름 태풍(곤파스)이 이곳을 강타하고 지나갔나 봅니다. 아름드리 잣나무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네요. 저 혼자 쓰러지지 못하고 앞에 서 있는 나무에 걸쳐 있어 쓰러진 나무와 그 나무를 떠받치고 있는 나무 모두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파트를 등지고 서 있는 나무들이 특히 더 많이 쓰러진 이유는 공사 때문에 지반이 약해진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래저래, 사람들이 하는 일은 저 숲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하는군요.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해치고 있으니 이 길을 걷고 있는 나도 어쩐지 미안해져 숲을 걷는 발걸음이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인간의 손길이 건물을 짓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군요. 급격히 줄어든 잣나무 숲을 벗어나 참나무 숲에 들어서니 요란한 자동차 굉음이 귀를 어지럽힙니다. 새경춘고속도로에서 들려오는 소음입니다. 왼쪽으로 드러난 산자락 맞은편에 시원스럽게 뻗은 고속도로에 자동차들의 행렬이 끝이없네요.
백봉산의 매력은 아무래도 부드럽게 밟히는 흙으로 이어진 숲길입니다. 바위들을 좀체 구경할 수 없는 전형적인 흙산인 까닭입니다. 흙을 맘껏 밟을 수 있어서 좋은 저와 다르게 산이 좀 밋밋해서 싫다시는 분도 있겠지요. 정상 봉우리까지 5킬로 남짓 걸어가야 하니 결코 짧은 길이 아닌데 그 길이 줄곧 흙길이고 완만한 오르막길이라면 남녀노소 누구나 걷기에 좋은 길인 건 확실합니다.
그 좋은 길을 걸어서 정상까지 가도 좋겠지요. 최근에 가장 높은 봉우리에 원두막 모양의 전망대를 지어놓았습니다. 거기 앉아서 보면 서울의 동쪽과 이어진 구리 시내며 하남시가 한눈에 보이고 한강 물줄기가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모습도 다 볼수 있습니다. 물론 꽤 의리의리한 전망대가 없었을 때도 정상봉우리에 서면 보일 건 다보였으니 왜 저걸 굳이 만들었나 싶어지기도 합니다만.
정상까지 갈 시간이 없는 이들은 중간 기착지를 이용해도 되겠지요. 들머리에서 한 시간 가량 걸어가면 약수터가 나옵니다. 대개 산책삼아 오신 분들이 기착지로 삼는 장소입니다. 조금 더 걷겠다 싶으면 원두막이 있는 기착지까지 약수터에서 한 1킬로 정도를 더 걷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곳은 생활체육시설이 들어서 있어서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입니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별 특징이 없으나 그 특징 없음이 오히려 매력인 백봉산을 걷다보면 떠오르는 말입니다. 무던한 시골 아낙같은 산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가을을 맞은 이 산에도 화려하진 않지만 단풍이 들었습니다. 마침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로 빨간 등산복 차림의 아저씨 한분이 지나갑니다. 단풍을 닮고 싶었을 아저씨의 마음이 읽혀져 문득, 웃음이 납니다.
단풍나무를 찾아 두리번 거리다 이번엔 창살에 갇힌 단풍나무를 만납니다. 쇠창살이 쳐진 쪽이 사유지인가 봅니다. 진입을 금지하는 의미로 쇠창살이 둘러진 길이 꽤 길게 이어집니다. 창살 너머 단풍도 여전히 붉습니다만 왠지 슬퍼 보이는 붉은색이네요. 갇힌 건 동물이든 나무든 다 안되어 보이는 건 마찬가집니다.
이제 모퉁이 하나만 돌아가면 이 산에 오롯한 약수터에 닿습니다. 약수터로 안내하는 작은 오솔길로 들어섭니다. 가을 풍경이 아름답게 고여 있는 고즈넉한 길이 펼쳐집니다. 단풍 들거나 벌써 낙엽이 되었거나 여전히 푸르름을 간직한 나뭇잎까지 고루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한없이 여유롭게 보입니다. 마음이 무장해제 당하는 듯합니다. 들머리부터 줄곧 상처를 받고 아픔을 드러내는 숲의 모습을 보아 왔던 차였습니다.
인간의 손길이 덜 탄, 자연의 모습을 간직한 산이 주는 안온한 느낌을 간직한 숲은 평화, 그 자체입니다. 평화로운 숲을 보는 인간 또한 지극한 평화로움을 느낍니다. 숲이 주는 이로움 중 가장 으뜸이 그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숲이 주는 평화를 느긋하게 즐기라고 산길 사이 사이 의자들이 놓여 있습니다. 누군가 애써 갖다 놓은 플라스틱 의자가 두개씩 나란합니다.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쉬었다 간걸까요?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에 두개씩 나란한 의자가 미소를 짓게 합니다. 관할 당국에서 만들어 놓은 의자는 네모 반듯한 크고 튼튼한 벤치입니다. 한잠을 자고 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왠지 이 작은 산길하고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숲길과 진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의자는 쓰러진 나무둥치를 그대로 이용해서 만들어 놓은 의자입니다. 사실 의자라고 불릴 것도 없이 그저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쳐놓은 나무등걸 자체입니다. 재활용 차원에서도 적극 장려하고 싶은, 이 숲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소박한 의자는 한 번쯤 앉아보고 싶게 만듭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행길이 그닥 힘들것도 없지만 어쩐지 나무등걸 의자에 앉았다 가야 할 것 같은 기쁜 의무감이 생기곤 합니다.
거기 앉았다 가는 건 그냥 다리쉼만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평안을 얻고 가니까요.
이쯤이면 치유의 숲입니다.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되고 때론 재해에 속수무책으로 할퀴고 쓰러지면서도 숲을 지킨 나무들이 묵묵히 또 가을을 맞이하고 이 길을 걷는 이들에게 위안을 줍니다. 이 무언의 메시지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차분하게 지난 날을 돌아보게 됩니다. 가을이 깊어질대로 깊었습니다. 11월이네요. 가까운 숲길이라도 걷기에 좋은 계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