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0월 21일(목)

회진항을 떠나기 전에 항구 뒤쪽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는 '회령진성'에 오른다. 어제 저녁 해가 진 뒤 항구로 들어서면서 오른쪽 언덕 위에 무언가 높이 올라서 있는 게 보였는데 미처 확인을 하지 못했다. 항구로 진입해 들어오는 길가 언덕 위에, 다 허물어지고 지금은 한쪽 벽면만 남아 있는 성이 하나 버티고 서 있다.

성이라는 흔적만 남아 있는 것과 달리 역사적으로 꽤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안내판에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무기를 모으고 군대를 정비하여 명량대첩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백의종군을 하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온 이순신 장군이 이곳 장흥에서 전열을 가다듬음으로써 정유재란에서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어제 다녀온 충무사도 그렇고, 남해안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유적지들을 찾아보게 된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이순신 장군 관련 전적지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한 번 기획해보고 싶다.

회령진성
 회령진성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회령진성을 내려오면 바로 노력도다. 노력도엔 해안을 빙 돌아가며 아스팔트 도로가 깔려 있다. 올해 초, 섬 안에 장흥노력도항이 건설되면서 항구까지 가는 도로를 개설했다. 아직 일부 구간 공사가 끝나지 않아 섬 일주는 불가능하지만, 현재 만들어진 도로만으로도 섬을 일주하는 기분은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장흥노력도항에서 하루 2차례 제주도까지 가는 배가 뜬다. 소요 시간은 1시간 40분. 항구에 서울까지 오가는 고속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제주도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이용해볼 만하다.

노력도항을 나오면 얼마 안 가 정남진해상낚시공원 이정표가 보인다. 해상낚시공원이라는 표현이 다소 이색적이다. 별다른 제약 없이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공원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은 얼마간의 이용료를 지불해야 하고, 관람만 할 경우에도 입장료 1천원을 지불하고 들어가야 한다.

독특한 작업을 하는 주민들과 만나다 

노력대교 위에서 내려다본 일주도로
 노력대교 위에서 내려다본 일주도로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해상낚시공원을 나와 정남진을 향해 가는 길에, 대리 부둣가에서 독특한 작업을 하고 있는 주민들과 마주쳤다. 노력도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그때는 단순히 어망을 손질하는 걸로 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무언가 조금 달라 보인다.

두 사람이 마주앉아 한 사람은 밧줄을 비틀어 틈새를 만들고, 다른 한 사람은 벌어진 틈새에 무언가를 꽂아 넣고 있다. 밧줄은 가래떡 굵기다. 그 밧줄을 손에 쥐고서 비틀면 넣고 비틀면 넣고 하는데, 호흡이 척척 맞는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일하는 모습이 무슨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미역 양식을 하기 위해 밧줄에 미역 종자를 붙이고 있단다. 신기한 일이다. 2cm가 될까 말까한 미역종자를 밧줄 틈새에 끼워 넣는데, 거기서 2m 가까이 되는 미역이 자란다. 이맘때 양식을 시작해, 내년 2, 3월에 수확을 하기 시작한단다. 그리고 4월이면 수확이 끝난다.

한겨울 차가운 바다 밑에서, 누군가의 뱃속을 뜨끈하게 덥혀줄 미역이 자란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다 뿌듯해진다. 장흥 미역은 일본에까지 수출을 한단다. 부디 미역이 잘 자라서,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장흥 바다처럼 청정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밧줄 틈새에 미역 종자를 심는 작업
 밧줄 틈새에 미역 종자를 심는 작업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육지든 바다든 이럴 때 새참이 빠질 수 없다. 카메라로 미역 종자 붙이는 장면을 찍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돌아다보니, 마을 주민 두 분이 경운기 곁에서 약주를 들고 있다. 사진은 그만 찍고 술이나 한잔하란다. 이럴 땐 꼭 내가 이곳에 초대를 받아 찾아온 손님 같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나 아닌 누구도 다 같은 대접을 받는다. 마을 주민과 길을 지나가는 나그네 사이에 격이 없다. 내남이 없다.

술만 받아 마시고 떠나려니 죄송한 마음이다. 하지만 더 오래 머물러 있어봐야 방해만 될 뿐이다. 대리 부둣가를 떠나 다음에 거쳐 갈 이정표로 삼은 곳이 '정남진'이다. 정남진은 정동진의 남쪽 개념이다. 서울 광화문의 동쪽 정방향에 있는 지점이 정동진이라면, 남쪽 정방향에 있는 지점이 바로 정남진이다.

멋진 해안도로
 멋진 해안도로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바닷가, 영세불망비로 담을 쌓은 집.
 바닷가, 영세불망비로 담을 쌓은 집.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정남진은 삼산리에 있는 삼산방조제의 중앙 부분에 있다. 길가에 정남진임을 알리는 표식이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대신 방조제 왼편에 삼색의 대형 원판을 3면으로 이어붙인 구조물이 보인다. 정남진임을 알리는 조각이다.

표지판 안내문에 적힌 문구가 지나치게 철학적이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정남진인데, 이곳의 안내문에는 정확히 여기가 당신이 알고 싶어 하는 정남진이라는 표현이 없다. 장흥에는 정남진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거나 문구가 적혀 있는 곳이 여러 군데다. 그래서 처음 장흥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디가 정남진이라는 건지 헷갈리기 십상이다.

삼산방조제를 지나 한참을 가다 보면, '정남진(지도에는 '남포'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 마을이다)'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아 여기가 바로 그 정남진인가 하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다. 정남진 마을 사람들은 원래는 여기가 정남진인데 어느 날 갑자기 정남진이라는 명칭을 다른 마을에 빼앗겼다고 섭섭해 한다.

음, 이쯤 되면, 뭐가 뭔지 구분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걸 구분하는 게 나그네가 할 일은 아니다. 정남진은 공식적으로 삼산방조제 위에 있는 것이 맞다고 한다. 그러니 표지석에 정남진이라고 쓰인 마을에 가서 여기가 정말 정남진이 맞냐고 묻지 말자. 공연히 마을 사람들 속만 긁고 나올 뿐이다.

삼산방조제를 지나 조금 더 가다 보면 바닷가 높은 언덕 위에 '정남진 전망대'가 들어서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 일대도 조만간 큰 변화를 맞이할 것이 분명하다.

삼산방조제 위 정남진 기념물
 삼산방조제 위 정남진 기념물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정남진 마을 표지석. 그 옆에 있는 것은 영화 <축제> 촬영장소임을 알리는 기념물.
 정남진 마을 표지석. 그 옆에 있는 것은 영화 <축제> 촬영장소임을 알리는 기념물.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정남진 우산도 지구 내 '정남진 전망대'.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정남진 우산도 지구 내 '정남진 전망대'.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허리를 새우 모양으로 하고 앉은 할머니들

남포까지 가기 전에 죽청리 바닷가에서 굴을 따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허리를 새우 모양으로 구부리고 앉아 바위에 붙어 있는 굴을 떼내고 있다. 갯벌에서 바위와 하나가 되어 씨름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조금 힘에 부쳐 보인다.

도로 위에서 제방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갯벌이다. 이곳의 갯벌은 바위가 절반이라, 신발을 신은 채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할머니들마다 커다란 대야 하나씩을 꿰차고 다니는 걸로 봐서 단순히 반찬을 얻기 위해 굴을 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예상했던 대로 '팔기 위해서'란다.

대야가 검은 펄 투성이 굴로 가득 차 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대야를 가득 채웠다는데 그 양이 적지 않다. 그때까지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한 게 분명하다. '이 일도 나이가 드니 너무 고되다'면서 몸을 일으키는데 상체가 다 펴지지 않는다. 그만 일을 끝내려는지 대야에 담긴 굴을 그물망에 쏟아 담는다. 그 무게가 꽤 묵직하다.

이제 그만 일을 끝내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그러면서 또 이제 돌아가서 또 다른 일을 해야 한단다. 구부러진 허리를 펼 새가 없다. 우리나라 갯벌에 와서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들을 참 많이도 만난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다니면서도 허리가 아프다고 징징대는 나는 어디 가서 누구한테 하소연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할머니들이 갯벌에서 철수하는 걸 보면서 다시 자리를 뜬다.

갯벌에서 굴을 캐는 할머니들.
 갯벌에서 굴을 캐는 할머니들.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장흥에 와서 득량만 바다에 젖줄을 대고 있는 문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가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다. 장흥은 이청준, 송기숙, 한승원 등의 저명한 작가들을 배출한 고장이다. 한국의 문학예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가 여럿이다.

그중에 바닷가 여행을 하면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작가가 한승원이다. 한승원과 제일 먼저 마주친 건 신덕리의 버스정류장 앞에서다. 신덕리가 한승원이라는 작가가 태어난 곳이며, 그가 쓴 여러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라는 안내문이 서 있다. 솔직히 말하면 좀 뜬금이 없어 보이는 안내판이다. 그 안내판이라는 것이 갯가에서 흔히 보는 경고 문구판이나 별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고상하게 시작했으면 좋았을 법하다. 하지만 한승원과 관련한 안내판을 한적한 버스 정류장 앞에 세워 놓은 것도 어떻게 보면 평생을 장흥 바다, 장흥 사람들과 함께한 한승원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승원과 만남은 그렇게 시작해서 장재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한승원산책길'이라고 적힌 이정표와 마주친 다음, 마지막에는 여다지해변의 한승원 시비로 이어진다.

이 정도 되면 '한승원'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여다지해변에 세워진 30여 개의 한승원 시비를 보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한승원만큼이나 장흥 앞바다를 사랑한 작가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장흥 앞바다를 사랑하는 장흥 사람들 역시 한승원이라는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다지해변
 여다지해변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오늘은 수문리해수욕장 근처에서 여장을 푼다. 그곳에서 오늘 하루 종일 나를 에스코트하다시피 한 마동욱 시민기자를 다시 만나 저녁을 함께 한다. 장흥읍까지 나가 그 이름도 유명한 장흥토요시장의 한 음식점에서 값싸고 맛있기로 소문이 나 있는 한우를 키조개 관자와 함께 불에 구워 먹는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면, 고기를 먹는 게 쉽지 않다. 마 기자가 내게 쇠고기를 먹인 건 그런 점을 배려한 것이다. 오래간만에 영양 보충 한 번 제대로 한다. 오늘 하루 장흥에서 참 분에 넘친 대접을 받는다. 마 기자 덕에 장흥 땅에서 고향에라도 돌아온 듯 유쾌하고 흥겨운 기분을 맛봤다. 자전거 타는 '고통'을 잊을 수 있었던 하루다.

장흥은 삭금마을에서 회진항까지 가는 해안길이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 길을 가지 못했다. 내가 지나간 길 중에는 삼산방조제 끝에서 시작해 남포 가기 전에 끝나는 정남진해안로가 꽤 아름다웠다. 득량만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바닷길이 죽 이어진다.

보고 또 보는 바다지만, 그 바다가 지역에 따라 때에 따라서 매번 다르게 다가온다. 항상 똑같은 바다가 아니다. 내일은 또 어떤 바다가 내 앞에 펼쳐질지 궁금하다. 오늘 달린 거리는 73km, 총 누적거리는 2537km다.

안개가 자욱한 득량만 바닷가 풍경
 안개가 자욱한 득량만 바닷가 풍경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해가 질 무렵의 해안도로
 해가 질 무렵의 해안도로
ⓒ 성낙선

관련사진보기



태그:#정남진, #한승원, #회령진성, #장흥, #노력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