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학자들 말에 따르면 지구 지표면 온도는 1860년 이후 0.4도에서 0.8도 가량 올랐고 현재 여름 기온은 중세 온난기 평균값과 같다고 한다. 그동안 지구에는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적으로 찾아왔고, 간빙기 안에서도 소빙하기와 소간빙기가 반복되고 있다.

지금은 지구 지표면 평균온도가 오르는 시기라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지구 온난화'는 인간이 빚은 흉측한 창조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름대로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 '지구 온난화'를 인간 책임으로 돌리는 건 환경운동가들의 음모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여러 연구 결과들은 인간에게 '지구 온난화'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하진 않는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기후 변화를 살펴본 결과 1600년부터 지금까지 태양에 의한 온도 변화는 0.45도이고, 1900년부터 1990년까지 변화폭은 0.25도가 채 안 된다.(『기후, 운명의 지도를 바꾸다』) 나머지 상승분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라는 소리다.

지구가 데워지면서 달라진 계절 변화를 최근 우리는 겪고 있다. 문제는 온난화 영향이 단지 현재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지방 빙하가 녹으면, 그로 인해 차가워진 바닷물이 남쪽 지방의 따뜻한 기운을 유럽에 전해주는 멕시코만류 흐름을 막고, 유럽은 온난화 반작용으로 빙하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구 온난화' 주범으로 꼽히는 온실가스 농도가 현재 추세대로 짙어지면 2100년쯤 재앙이 닥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고 환경론자들은 경고한다.(『기후의 역습』) 차가워진 유럽 공기는 제트 기류를 타고 우리나라에 그대로 전해질 것이라는 것은 올해 초 한반도를 후려친 강추위가 잘 설명해준다.

'기후 변화'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면 누군가는 그 책임을 지고 뒷수습에 나서야 한다. 이미 우리는 '지구 온난화'가 산업화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명쾌한 해결책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애써 움켜쥔 기득권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인류 멸망, 더 나아가 지구 멸망을 다룬 <2012>, <딥 임팩트>, <아마겟돈>에서 멸망 원인이 외부에 있는 만큼 인간은 그 책임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이 영화들은 인간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보다는 인류멸망을 눈앞에 둔 인간의 대응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인간 책임이 분명한 기후 변화와 그에 따른 인류 멸망을 경고한 영화 <투모로우>(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2004)는 인간의 대응에 앞서 잘잘못을 따져야 하기에 위 영화들과는 조금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에머리히 감독의 또 다른 연출작인 <2012>(2009)에서는 피할 수 없는 대재앙 앞에 선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두루 비췄다면, <투모로우>에서는 소수파와 다수파로 갈리는 인간들 갈등에 먼저 초점을 맞추고, 각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지켜본다.

영화에서 대기권 바깥 우주를 묘사할 때는 흔히 화면 위쪽에 지구를, 우주선(또는 인공위성)을 아래쪽에 배치해 무중력 상태를 표현함과 동시에 화면에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런데 <투모로우>에서는 지구라는 땅 위에 떠있는 우주 정거장을 보여줌으로써 긴장감 대신 안정감을 준다. 이 안정감은 난리법석을 피우는 인간 대다수와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는 소수의 우주인이라는 묘한 대조를 표현한다.

이런 대조는 다수파와 소수파의 대립, 주류와 비주류의 갈등에서 소수파, 비주류가 승리했음을 넌지시 일러주는 듯하다.

기후학자 잭 홀(데니스 퀘이드)은 유엔이 주최한 환경 회의에서 지구 온난화의 반작용으로 빙하기 도래를 경고하지만 미국 대표로 나선 미국 부통령(케네스 웰쉬)은 잭 홀의 경고를 무시한다.

학자는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경고하면 그만이지만 대책을 마련하고 실행하는 정치인은 수많은 집단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집단들을 이끌어 가야 한다. 또 거기에는 수많은 비용이 든다. 부통령 벡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다.

인간들 간의 갈등은 폭풍우에 갇힌 뉴욕 시민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폭풍우가 거세지자 뉴욕을 탈출하녀는 다수파와 남으려는 소수파가 갈등을 일으킨다.

주류와 비주류의 대조는 전문직 종사원으로 보이는 백인 뉴요커와 흑인 노숙인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전문직 종사자는 뉴욕에 홍수가 일어났을 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지만, 노숙인은 밑바닥 인생에서 얻은 경험과 지혜를 통해 살아남는다.

현대사회에서 지식은 권력이자 부라고 앨빈 토플러는 말했다. 하지만 인류 멸망(정확히는 선진국의 멸망) 앞에서 얄팍한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다. 노자와 장자, 성철스님이 얄팍한 지식에 비판적인 것도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탐욕에 물든 지식은 그 동안 허세를 부리다가 경험에 바탕을 두고 욕심이 없는 지혜에 무릎을 꿇는다.

주류와 비주류 간의 대비는 멕시코로 밀려드는 미국인들 모습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방송기자의 "양국 입장이 바뀌는군요"라는 보도는 지구 온난화 이후 달라진 환경을 뚜렷이 보여준다.

"인류는 지구자원을 마음껏 써도 될 권리가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타국에서 연설하는 건 바뀐 현실을 상징합니다."

부통령은 인간의 오만함, 선진국의 탐욕을 반성한다. 하지만 그 반성이 진심어린 것인지는 의문이다. 인간 역사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혜를 악용해가며 인간끼리 살육을 되풀이해 온 기록(『태백산맥』3권)이라는 냉소적인 정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난 세기 대공황을 겪었으면서 지난 2008년 금융위기를 되풀이한 인간의 탐욕을 살펴보면, 부통령의 반성은 닳고 닳은 정치인들의 뻔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영화가 개봉될 당시, 볼거리와 줄거리를 놓고 <투모로우>에 대한 호평과 혹평이 나뉘었다. 권위를 앞세우는 거대한 집단에 맞서는 똑똑한 개인이나 소수집단이라는 대립은 여러 영화에서 종종 빌려 쓰는 구성이라 도식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투모로우>는 단순한 재난영화가 아니라, 시나브로 다가오는 대재앙을 경고하고 있으며, 영화가 경고한 대재앙이 영화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점이다.

영화 투모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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