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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포해수욕장
 만리포해수욕장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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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7일(월)

파도 소리에 잠을 깼다. 쏴아 쏴아 쉼 없이 밀려오는 소리가 귓가를 살며시 적시고 지나간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깬 게 얼마만인가. 어린 시절, 바닷가 내 외갓집에서는 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다. 여름방학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시작했다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끝냈다. 서울 집에 돌아오면 한밤중에는 흰 눈자위만 보일 정도로 온몸이 새카맣게 타 있었다.

기분 좋은 아침이다. 마치 바닷가 외갓집에서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듯 상쾌하다. 서울에서는 비가 오고 있다는 소식이다. 만리포해수욕장은 아직 해가 맑다. 오늘 하루 적어도 비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요즘처럼 일기가 불순할 때는 한 시간 뒤를 예측하기 어렵다. 짐을 싸면서 우비와 방수포를 살핀다. 우비 한 벌과 방수포 석 장, 그중에 하나만 없어도 낭패다.

천리포수목원을 찾아나선 길

숙소를 나와 천리포수목원을 찾아간다. 천리포수목원은 만리포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어제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내려오면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천리포수목원을 그냥 지나쳤다. 평상시 보기 힘든 수목원이다. 천리포까지 왔으면, 시간을 쥐어짜서라도 꼭 한 번 들러봐야 한다.

천리포수목원은 한국의 수목원 중에서 가장 많은 식물 종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외 수종이 1만2천여 종에 달한다. 바닷가에 보기 드물게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수목원에서 해안가 언덕에 올라서면 그 아래로 천리포해수욕장과 천리포항이 건너다보인다. 나무그늘 아래에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나무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구성이 좀 산만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수목의 자연스러운 생육을 크게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수목원에서는 나무 앞 푯말에 나무 이름만 적어 놓은 게 아니라, 그 나무에 얽힌 이야기나 전설을 함께 적어 놓았다.

'귀신나무 왕버들', '꽝꽝소리로 나라를 지킨 꽝꽝나무', '당신께 부(부)를 드려요, 삼지닥나무' 등 흥미를 끄는 이야기들이 제법 많다. 나무이름을 확인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천리포수목원 전경
 천리포수목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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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에서 내려다본 천리포해수욕장과 천리포 항구
 천리포수목원에서 내려다본 천리포해수욕장과 천리포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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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 내 오구나무. 그 앞에 나무 이름의 유래를 적은 푯말.
 천리포수목원 내 오구나무. 그 앞에 나무 이름의 유래를 적은 푯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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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에 수목원의 규모가 조금 작아 보인다. 수목원 부지는 전체 18만7천여 평, 그중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공간은 수목원이 보유한 전체 부지의 일부에 불과하다. 천리포해수욕장 앞에 있는 닭섬 역시 수목원 소유다.

천리포수목원을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가꾼 고 민병갈 원장의 "나는 300년 뒤를 보고 수목원 사업을 시작했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300년 뒤의 일까지 염두에 두고 수목원을 가꾸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300년 후에는 수목원이 또 어떻게 변해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300년 앞을 내다보고 산 사람의 포부와 인생이 부럽다.

이 수목원을 만든 민병갈씨는 미군으로 한국에 들어와 살다가 한국인으로 귀화한 인물이다. 미국 이름은 밀러다. 수목원에서는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수목원 일부를 '밀러가든'이라고 이름 붙여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멸치 말리는 장면. 천리포해수욕장 가는 길, 고소한 냄새가 입맛을 자극한다.
 멸치 말리는 장면. 천리포해수욕장 가는 길, 고소한 냄새가 입맛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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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해수욕장 앞 닭섬.
 천리포해수욕장 앞 닭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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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에서 생각 외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늘도 가야 할 길이 참 멀고 복잡하다. 이렇게 유유자적할 때가 아닌데, 너무 긴장이 풀어져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모항까지 가는 길에 바짝 고삐를 당긴다. 다행히 언덕이라고 할 만한 게 그렇게 많지 않다. 어제와 비교하면, 길들이 꽤 점잖은 편이다.

꽃게를 나르던 외국인 노동자들

모항으로 넘어가는 높은 언덕을 내려가면, 산으로 둘러싸여 땅 밑으로 움푹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항구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 낯선 풍경이다. 부두에 접안해 있는 배들 역시 지금까지 봐온 배들과는 많이 다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항구와 포구를 지나쳐 왔지만, 모항에서 보는 배들처럼 낡지는 않았다. 멀리서 보기에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낡았다. 배 전체가 온통 녹이 슨 철선은 물론이고, 최근에 페인트칠을 다시 한 것 같은 배들조차 곳곳에 녹슨 철판이 들떠 부스러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모항
 모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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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게를 부리고 있는 배의 일부 선원들이 외국인들이다. 한국인과 외국인, 이렇게 둘이서 꽃게를 담은 플라스틱 상자를 나르는데 서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애를 먹는다. 힘든 노동을 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데서 오는 고충이 얼마나 심할까? 검게 탄 얼굴, 축 늘어진 머리카락, 그들의 얼굴에 고된 노동을 하고 돌아온 흔적이 역력하다. 낡은 배 위에서 거친 파도와 싸우며 잡아온 꽃게에 그들의 한과 희망이 서려 있다.

모항에서 나와 계속 바닷가 길을 더듬어 간다. 여전히 길찾기가 쉽지 않다. 갈림길이 나타날 때마다 갈등이다. 지도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지만, 뭐가 뭔지 모를 때가 많다.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다시 제대로 된 길을 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 애를 먹어야 한다. 이제는 길을 잃고 헤매는 것마저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모항을 나와 계속 남쪽을 향해 달렸다. 남쪽 끝에 파도리가 있다. 이 지역 역시 태안반도에서 날카롭고 길게 튀어나온 형상을 하고 있다. 반도에서 돌출한 지형이라서 처음에는 또 얼마나 많은 언덕을 오르내려야 하나 긴장했다. 그런데 그런 긴장이 무색하게,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그동안 언덕 위를 달리는 도로에 얼마나 많이 시달렸던지, 논과 논 사이로 벼이삭과 키를 맞춘 낮은 도로 위를 달리는 게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곳에 이름도 아름다운 파도리해수욕장이 있다.

법산리 앞, 어느 집 앞을 지나가는 바닷가길.
 법산리 앞, 어느 집 앞을 지나가는 바닷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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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소금막을 짓고 있는 염전 풍경.
 새로 소금막을 짓고 있는 염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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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리에서 신진도까지, 해안 길과 내륙 길을 수시로 넘나든다. 이 지역에서는 해안길 찾기가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지형이 다소 단순한 까닭이다. 길찾기가 어렵거나 조금 헛갈린다 싶으면 바로 내륙으로 올라선다. 길이 분명해야 마음도 편하고, 마음이 편해야 여행도 즐겁다.

신진도까지 편안한 마음으로 달린다. 단순히 해안길이라고 해서 무작정 방향을 틀지 않는다. 들어가 봐야 할 분명한 이유가 없을 땐 과감히 지나친다. 사실 내가 한국 땅에서 찾아야 할 보물이 꼭 해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태안반도 같이 사방에 뿔이 돋아나 있는 지형에서는 뿔 위로 올라선 것만으로도 해안을 달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데서 해안과 내륙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일 아닌가?

파도리해수욕장
 파도리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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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대교 위로 올라서면 대교 아래에 안흥항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신진도항은 섬의 반대편에 있다. 신진도항은 지금 꽃게잡이로 정신없이 바쁘다. 어선들이 잡아들이는 꽃게를 처리하느라,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쁜 한철을 보내고 있다.

동네 개똥보다 못한 대접 받는 꽃게

올해 꽃게잡이는 예년에 없는 풍년을 맞았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힌다. 그 바람에 꽃게들이 동네 개똥보다 못한 천한 대접을 받고 있다. 버려진 꽃게들이 어판장 구석구석 쓰레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리 밟히고 저리 차이고,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다리들이 양계장 닭털처럼 너저분하게 바닥을 덮고 있다.

아무도 그 쓰레기더미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놈들이 자꾸 내 눈에 밟힌다. 그 꽃게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운명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두 '귀찮게 왜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들이다. 그들에게서 "낸들 어떻게 알겠습니까"와 "버린다"는 두 가지 대답을 들었다.

꽃게 압살사건 현장. 모항 가는 길.
 꽃게 압살사건 현장. 모항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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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알 수 없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게들이 앞으로 어떻게 될 운명인지도 모른 채 무더기로 버려지고 있다니. 꽃게를 선별하는 곳에서는 사지가 온전하지 못한 꽃게들을 골라내 마대자루에 쓸어 담고 있다. 그 마대들을 도로 한쪽에 첩첩 쌓아올리고 있다. "버린다"는 꽃게들이다.

사지가 온전해 상품으로 팔려나가는 꽃게와 그렇지 못한 꽃게가 거의 반반이다. 반은 쓰고, 반은 버리는 셈이다. 모항에서 꽃게를 잡아와 힘들여 육지로 올리던 선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이 수고한 보람은 어디에 있는 건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발에 밟히고 차에 깔리고, 꽃게들이 때 아닌 수난시대를 맞고 있다. 신진도항에서 오늘 하루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꽃게들의 죽음에 관해 참 많은 의문에 휩싸인다. 300년 뒤를 보고 꽃게를 잡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금 항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고 꽃게를 잡을 수는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다. 어느새 하늘이 꾸물꾸물해지고 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모양이다. 오늘 달린 거리는 66km, 총 누적거리는 899km이다.

안흥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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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도항에서 바라본 일몰.
 신진도항에서 바라본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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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너에게 길을 묻는다
여행을 다니면서 지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보긴 처음이다. 내가 지금 가지고 다니는 지도는 농림수산식품부와 한국어촌어항협회가 함께 펴낸 <우리나라 해안여행>이라는 책자에 들어 있는 것이다.

자전거로 갈 수 있는 해안여행 길을 소개하고 있는데, 비포장도로는 물론 산을 넘어가는 길까지 꼼꼼하게 표시해 놓았다. 이 지도만 보면, 해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염려는 없겠다 싶어, 소중히 챙겨왔다.

그런데 지도가 겉보기와는 다르다. 지도만으로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 지도는 농로나 마을 안길, 그리고 산길로 들어서서는 무용지물이 될 때가 많다. 근처에 갈래 길이 여러 개인데 그중 지도가 가리키는 길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곳에선 순전히 감으로 길을 찾아야 한다. 당연히 실패할 확률이 높다. 나 같은 길치는 매순간 엄청난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자전거에 많은 짐을 실은 상태에서, 거의 매일 혼자서 산길을 헤매는 건 위험한 일이다.

비가 올 때나 비가 온 뒤의 비포장도로는 길로서 구실을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 지도로는 그런 때 어디를 어떻게 우회하는 게 좋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산악자전거가 아니면 가기 힘든 길도 많은데 그런 길에 대한 주의사항이 없는 것도 흠이다.

방향을 지시하는 표시가 너무 많아 수시로 지도를 들여다봐야 하는 것도 꽤 피곤하다. 길을 확인하기 위해 중간에 멈춰서야 하는 일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빈번하다.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지도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 너무 많은 신경을 쏟아 붓고 있다.

차라리 전국의 도로를 세밀하게 그려 놓은 정밀교통지도를 가지고 다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그 지도를 가지고 나만의 여행 지도를 새로 그리는 게 더 뜻 깊은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안선을 여행하는 좀 더 단순하고 명쾌한 길은 없을까? 지금 내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생각이다.

<우리나라 해안여행>은 단기 여행에 적합한 책이다. 여러 명이서 하루나 이틀에 거쳐 짧은 거리를 세밀하게 밟아보고 싶은 사람들,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데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꽤 유용한 책이 될 수 있다.


태그:#천리포수목원, #신진도항, #안흥항, #모항, #꽃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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