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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과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인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중국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장춘, 다롄, 뤼순 등지를 지난해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아흐레간 답사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안중근 의사 순국날인 2010년 3월 26일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영웅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에 즈음하여 <영웅 안중근>의 생애를 다시 조명하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져, 이미 출판된 원고를 다소 손보아 재편집하고, 한정된 책의 지면 사정상 미처 넣지 못한 숱한 자료사진을 다양하게 넣어 2010년 11월 20일까지 43회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 기자말 
 

 

 

고려인 강제이주 현장

 

12 : 20, 조씨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들어가면서 라즈돌노예 역에 차를 세웠다. 1937년 한인들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진 비극의 역사 현장이라고 했다. 1937년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연해주 일대 17만여 명에 이르는 고려인(한인)들은 스탈린의 지시로 하루아침에 집을 버리고 비상식량만 지침한 채 화물열차에 강제로 불모의 땅 중앙아시아로 실려 갔다.

 

 

당시 소련비밀경찰들은 기차를 타기 전, 일부 독립운동가나 지식인들은 '일본앞잡이'라는 누명으로 총살시키거나 웅덩이에 모두 쓸어 묻었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일본인과 구별이 잘 안 되고, 일제의 간첩혐의가 짙다는 이유로 사전에 어디에 간다는 통보도 없이, 화장실은 물론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수 없는 화차에 빼곡히 실려, 길게는 50여 일 동안 6천 킬로미터를 달려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졌다. 그곳이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의 지역이다.

 

나는 이 역 플랫폼에서 당시 열 살 난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그 소녀는 화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간 뒤 72년 만인 2009년 9월 28일 경북 구미 임은동 왕산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했는데 당신 태어난 후 처음으로 할아버지 고향에 돌아왔다.

 

평생을 미혼으로 외롭게 살아온 왕산손녀 허로자(84)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중앙아시아로 뻗은 시베리아 철로에 겹쳤다.

 

망국민은 노예나 다름이 없다. 이 원죄는 조선 왕족을 비롯한 지배계층인 사대부에 있다. 그들의 무능과 탐욕, 부정부패 비리가 나라를 망쳤다. 양반 후손이라는 게 부끄럽다.

 

 

 

연해주신한촌기념탑

 

15:00 마침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들어갔다. 나는 먼저 블라디보스토크 최초의 한인 집단거주지로 1910년 전후로 나라 잃은 한민족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신한촌(현, 하바롭스크거리)이 보고 싶었다. 조씨는 먼저 거기로 안내했다. 안중근이 마지막으로 이 거리에 나타난 지 꼭 100년 만에 찾아가니 어찌 옛날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겠는가.

 

일백년이면 강산이 열 번이나 변하는 세월이 아닌가. 다행히 그곳에서 '서울거리 2A'라는 주소가 붙은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고, 언덕 쪽으로 조금 오르자 '연해주신한촌기념탑'을 볼 수 있었다. 비문은 한글과 러시아글로 새겨져 있는데 신한촌의 역사를 잘 드러내고 있기에 그 전문을 옮긴다.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의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린 곳이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국내외 지사들은 신한촌에 결집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필사의 결의를 다졌다.

 

성명회와 권업회 결성, 한인학교 설립, 신문 발간, 13도의군 창설 등으로 민족 역량을 배양하고,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회)를 수립하여 대일 항쟁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한민족은 1937년 불행히도 중앙아시아에 흩어지고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에 해외한민족연구소는 3 ․ 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 ․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에게 역사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이 기념탑을 세운다.

1999년 8월 15일

한국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

 

 

신한촌에 대해 더 이상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는 비문이었다. 나는 조씨에게 안중근이 머물렀다는 계동학교 앞 이치권의 집을 물었으나 그는 그전에 다른 분들도 많이 그곳을 수소문했지만 그때를 증언해 줄 분이 한 분도 생존치 않아 알 수 없다고, 아마 이 일대 어디일 거라고 이제는 아파트촌으로 변한 곳을 가리켰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 선생 집터는 알려져 있다고 안내하는데 지금은 그 일대가 현대식 상가로 변해 있었다. 이곳저곳 둘러보니까 그새 오후 4시 30분이었다. 조씨는 하얼빈 행 차표부터 예매한 뒤 더 둘러보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역으로 갔다.

 

 

안중근 행장(9)

 

1909년 10월 19일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오면 꼬레이스카야(신한촌)의 계동학교 앞 이치권 집에 자주 머물렀다. 이치권의 집은 식당을 겸한 작은 여관이었다. 이치권이 오랜만에 나타난 안중근을 보고 반겨 맞았다. 그는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믿기지 않는 말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온다는군. 그것도 말이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철도를 경유하여 하얼빈으로 간다는구먼."

"정말인가!"

 

안중근은 깜짝 놀랐다. 연추에 있을 때 까닭도 없이 심란하여 갑자기 블라디보스토크에 오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 소식을 듣기 위함이었는가. 안중근은 침략의 원흉 이토가 제 발로 제 무덤에 찾아든다는 게 좀체 믿기지 않았다.

 

"언제 온다고?"

"가까운 시일에…."

"누구에게 들었는가?"

"그냥 소문이 쫙 퍼졌어."

 

이치권은 그 대목에 이르자 얼버무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도착했을 때 그곳 분위기가 일본고관을 맞이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말이 못 미더우면 일본총영사관에 가서 물어보렴."

"뭐야!"

 

안중근은 발끈 화를 내고는 그 소문의 사실 여부를 확인코자 그 길로 곧장 <대동공보사>로 갔다. <대동공보>는 1908년 2월에 발간된 <해조신문>의 후신으로 최재형, 최봉준, 김병학 등의 지원으로 매주 2회 수, 일요일에 4면씩 1천부 정도를 발행하는 연해주지역 한인들의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안중근이 <대동공보사>로 갔으나 기자들은 모두 출타 중이고 여사무원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나에게 온 편지 없나?"

"아무 것도 없는데요."

"신문 좀 보겠어."

 

안중근은 그즈음 발행된 <대동공보>를 열심히 뒤졌지만 이토 히로부미에 관한 보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마침 편집주임 이강(李剛)이 돌아왔다.

 

"어이, 응칠씨 반갑네."

"오랜만일세."

 

두 사람은 친구 사이로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안중근은 가장 궁금한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시찰 건부터 물었다.

 

"오늘 블라디보스토크에 오니까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온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사실인가?"

 "그 자가 이제는 하얼빈까지 발을 넓히려는 모양인데, 아마 지금쯤 뤼순이나 다롄에 있을 거야."

"그런데 <대동공보>에는 아무런 기사도 나와 있지 않던데?"

"내일 쯤 실을 예정이야. 여태까지 소문만 무성해서 우리도 판단할 수 없었는데, 드디어 자세한 뉴스가 들어왔네."

 

이강은 러시아신문을 안중근에게 보였다.

"나는 러시아어에는 까막눈이야."

"조금 전에 도착한 철도신문인데 내가 이토 기사만 읽어볼게."

 

러시아제국 코코후초프 재무대신과 베이징 주재 코로스토웨츠 공사가 북만주를 시찰하기 위하여 하얼빈 철도청을 방문한다. 그 시기와 때를 맞추어 4개월 전까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고 한다. 도쿄 발 외전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는 10월 16일 모즈항을 출발하였다고 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네."

"중요한 도착 일시가 확실치 않네."

"내 생각으로는 하얼빈 도착은 25일 전후가 될 것 같아. 일본 모즈항에서 다롄까지는 이틀 정도 걸리고, 남만주에는 일본인 거류민이 많으니까 각지를 방문하며 북상한다면 아마 그 무렵일 될 거야."

"하얼빈 역은 경비가 삼엄하겠는 걸."

"그럴 테지. 미국 스티븐슨 암살사건을 고려하여 러시아정부는 한국인을 접근치 못하게 할 거야."

"그럴 테지."

 

그때 우덕순이 들어왔다. 그는 담배행상을 하면서 배당금을 받는 조건으로 <대동공보> 판촉을 하고 있었다. 기본 급료는 월 10루블이었다.

 

"두 사람이 무슨 밀담을 나누고 있나? 나는 여태 점심도 굶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마침 잘 왔네. 좀 이르지만 내가 저녁을 사지. 나와 같이 나가세,"

안중근은 마치 우덕순을 기다린 것처럼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이치권의 집으로 갔다.

- 사키류조의 <광야의 열사 안중근> 47~58쪽 요약 정리


태그:#블라디보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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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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