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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의 위엄을 갖춘 동이(한효주 분).
 후궁의 위엄을 갖춘 동이(한효주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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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민에서 정1품 후궁까지' 그야말로 걸어서 하늘까지 올라간 최 숙빈(숙빈 최씨, 한효주 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MBC 드라마 <동이>에서, 주인공 동이는 지난 2일 제39부 때부터 종4품 후궁인 숙원(淑媛)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특별상궁(승은상궁)이 된 후에도 아랫사람들에게 말을 놓지 못하던 동이는 이때부터는 '옛 상전'들인 나이 많은 궁녀들에게도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있다.

유시민이 정리한 자서전 <운명이다> 233쪽에서, 노무현은 "(나는) 남보다 윗자리에 앉으면 무언가 불안하고 불편하다"며 "나는 말을 위엄 있게, 행동을 기품 있게 해야 하는 환경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노무현과 달리, 동이는 후궁이 된 뒤로는 '말을 위엄 있게, 행동을 기품 있게 해야 하는 환경에' 아주 자연스럽게 연착륙했다.

갓 태어난 첫아들(숙종 입장에서는 셋째아들)을 키우며 후궁의 삶에 잘 적응하는 동이의 모습을 보면서 '동이도 이제 새로운 마인드로 새로운 삶을 사려나 보다'하고 생각한 시청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려는 듯이, 후궁이 된 동이는 파격적인 '친서민' 행보를 개시했다. 그것은 이른 바 '기부천사'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 첫아들의 백일잔치를 취소하고 그 대신에 빈민들을 위한 죽소(粥所) '무료 죽집'을 열기로 한 것이다.

후궁 마마님이 무료로 죽을 나누어준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들 감동했다. '역시 천민 출신 후궁 마마님이라서 우리들의 심정을 이처럼 잘 헤아려 주는구나!'라는 것이 백성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의 열렬한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인지, 심지어 동이는 남몰래 궁녀 복장을 하고 직접 죽을 배급하는 일까지 맡고 나섰다.

백성들에게 죽 나눠준 동이... 실제는 달랐다

<동이>에 방영된 위의 장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럴싸하다. 만약 여종의 딸이기는 했어도 부유한 역관 가문에서 태어난 장 희빈이 TV 속에서 기부천사의 역할을 했다면,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말도 되지 않는 시나리오"라며 리모컨을 더듬더듬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 숙빈의 경우 악녀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사회 밑바닥인 천민 출신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힘들게 고생한 사람이라면, 후궁이 되어서도 서민의 편에 설 수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 숙빈이 실제로는 기부천사 역할을 하지 않았더라도, 사극에서 그를 그렇게 묘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개연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실제 최 숙빈은 기부천사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개연성마저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 숙빈이 나쁜 인물이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선행을 많이 안 했다고 하여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드라마 수준의 '친서민' 행보는 최 숙빈의 궐내 입지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었기에 최 숙빈으로서는 애초부터 그런 활동을 꿈꾸기가 힘들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최 숙빈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아들의 입지를 확보하는 일이 우선적인 급무였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까?

아들과 자신의 지위 위해 과묵함으로 일관한 최 숙빈

숙빈최씨 신도비.
 숙빈최씨 신도비.
ⓒ 한국학중앙연구원 발행 <숙빈최씨 자료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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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하고 명랑할 뿐만 아니라 불타는 정의심으로 무슨 일에든지 곧잘 끼어드는 드라마 속의 동이와 달리, 실제의 최 숙빈은 그와 정반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성격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숙빈은 천부적인 바탕이 침착하고 과묵하여 기쁨과 슬픔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라고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소재 소령원(최숙빈의 무덤)에 있는 '숙빈 최씨 신도비'(1725년 건립)는 말하고 있다.

타고난 천성이 침착하고 과묵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가 의식적으로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천민 출신의 후궁인지라 까딱하면 궐내에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수도 있었기에, 그는 궐 안에서 누구보다도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과 아들의 지위를 지키고자 선택한 '대인관계의 2대 노하우'가 있다.

그중 하나는, 궁궐 사람들에게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위의 신도비에 따르면, 최 숙빈은 궁중 웃어른들을 밤낮으로 봉양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후궁과 궁녀들에게도 겸손하고 온화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언제나 그들의 환심을 얻었다"라고 신도비는 말하고 있다. 실제의 최 숙빈은 '궐 밖'이 아니라 '궐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데에 주력했던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철저히 단속하는 것이었다. 신도비에 따르면, 최 숙빈은 장점이든 단점이든 간에 다른 사람에 관해 말하는 것을 철저히 꺼렸다고 한다. 물론 아무 증거도 없이 숙종에게 장 희빈의 범죄를 보고하여 장 희빈을 몰락시키기는 했지만, 평소에는 남에 관한 말을 일절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에 대한 신뢰를 높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의 시녀들에게도 남의 장단점에 관해 일절 함구하도록 철저히 당부했다고 한다. 주변 인물들로 인해 자신과 아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도록 그는 보통 이상의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남의 단점뿐만 아니라 장점까지도 입에 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은 물론 시녀들에게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철저히 단속하는 최 숙빈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이 여인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궁궐 생활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살얼음판을 디디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이다.

무료 죽집 개설, 실제 최숙빈은 꿈도 못 꿨다

궁궐 사람들에게 밤낮으로 지극정성을 다하는 동시에 지나치리만큼 자신과 주변을 철저히 단속하는 최 숙빈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그의 안테나가 향하는 곳이 궁궐 내부인지 외부인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그는 궁궐 밖의 서민들이 아니라 궁궐 안의 내명부(궁궐 여인들의 위계적 조직)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여인이 궐 밖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무료 죽집을 개설하는 기부천사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친서민 행보가 자신과 아들에게 끼칠 정치적 부담 때문에라도 최 숙빈은 그런 것을 아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고 아들의 미래를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에, 실제의 최 숙빈은 드라마 속의 동이와 같은 멋진 선행을 꿈꿀 여유가 없었다. 후궁이 되어서도 '남보다 윗자리에 앉으면 무언가 불안하고 불편한' 삶을 살며 '바보'의 행보를 계속하기보다는, '말을 위엄 있게, 행동을 기품 있게 해야 하는 환경에' 신속히 적응하는 것이 그에게는 보다 더 급선무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런 최 숙빈의 처신이 개혁군주 영·정조를 낳는 데로 연결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최 숙빈 자신은 드라마 속 동이처럼 그렇게 멋지게 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개혁'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개혁을 꿈꾸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 숙빈의 삶이 평가절하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어떻게 평가하고 역사가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최 숙빈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자기 인생을 개척해나갔을 것이다. 또 적어도 최 숙빈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삶은 분명히 성공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최 숙빈이 앞만 보지 않고 멀리 보았다면, 앞서 가려고만 하지 않고 함께 가려 했다면, 그래서 자기 자신만 정1품에 올리려 하지 않고 온 세상을 정1품에 올리려는 꿈을 꾸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삶은 분명히 동시대인들로부터 '바보' 같은 삶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겠지만, 어쩌면 그런 삶이야말로 죽어서도 영원히 '승자'가 되는 '수지맞는 삶'이 아닐까? 조선판 신데렐라 최 숙빈의 삶에서 그런 아쉬움을 감출 길이 없다.


태그:#동이, #최숙빈, #숙빈 최씨, #숙빈최씨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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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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