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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잇키> 표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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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양인'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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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잇키'라는 낯선 제목의 평전을 만났다. 주인공은 일본의 사상가 '기타 잇키.' 일본 국가주의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로, 근대 일본 우익 인사들이 언급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 <일본개조법안대강> 등의 저서를 통해 메이지 말기 이후 일본 사상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존경했던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1991년 <월간조선> 7월호, 이병주의 '대통령들의 초상'이라는 글에는 박정희와 그의 친구이던 부산일보 황용주 주필의 대화내용이 실려 있다.

(중략)
"일본의 군인이 천황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박정희)
"그것은 고루한 생각으로서 세계 평화에 해독이 된다."(황용주)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은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박정희)
"국수주의자들이 망친 일본을 자유주의자들이 일으켜 세운 거다."(황용주)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박정희)

이 대화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2·26 쿠데타를 일으킨 일본의 청년 장교들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는다. 1936년에 일어난 이 쿠데타의 목표는 부패한 재벌과 군 상층부를 제거하고 개혁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2·26은 후일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일으킨 5·16 쿠데타의 모범이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5·16 쿠데타 직전에 "2·26 사건 때 일본의 젊은 우국 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기타 잇키는 바로 일본 2·26 쿠데타의 사상적인 배후였다. 그리고 기타 잇키에게는 '극우 파시스트' '일본 우익의 정점' '군국주의자'라는 키워드가 항상 따라다닌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는 기타 잇키와 2·26 쿠데타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언급되는 일이 잦다.

그러나 <기타 잇키>의 저자 마쓰모토 겐이치는 '기타 잇키 = 극우 파시스트, 국수주의자'라는 시각에 반기를 든다. 이렇게 짧은 한마디로는 좌익과 우익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기타 잇키 사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평전 <기타 잇키>는 결코 짧지 않다. 저자는 30년에 걸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생생하고 입체감 있는 기타 잇키를 재현한다.

당대에는 가장 불온했던 혁명가

1936년 2.26사건 직후 경시청에 출두한 기타 잇키.
 1936년 2.26사건 직후 경시청에 출두한 기타 잇키.
ⓒ '교양인'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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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잇키(1883~1937)의 시대, 일본은 격변기였다. 19세기 중반,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을 계기로 국민국가의 틀을 마련하고 근대화를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천황'이라는 상징체계는 일본 사회의 구석구석에 스며든다.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는 '대일본제국헌법' 제1조가 분명히 보여주듯, 천황과 관련되는 한 역사에 대한 사실적 접근이나 상식적 판단도 용납되지 않는 시기였다.

기타 잇키는 많은 이들에게 천황의 숭배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그는 한 번도 천황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그는 '천황 신화'를 거부한 인물이다. 더 나아가, 천황을 중심으로 국민과 신민을 통합해야 한다는 '국체론'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고 해체한 사람이었다.

그는 국체론자들이 말하는 '천황의 국민'을 '국민의 천황'으로 바꾸어버린 급진주의자였다. 1906년에 완성된 그의 문제작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의 논리에 따르면, 국민들은 천황에 예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천황을 재규정할 수 있는 주체가 된다. 또 천황은 특권을 지니긴 했지만 국가에 귀속된 국민의 일원이며, 의회와 더불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기타의 생각이었다.

천황 신화를 정면으로 배격하는 <국체론과 순정사회주의>는 출간된 지 5일 만에 발매가 금지되었다. '천황의 숭배자'로 알려진 기타 잇키가 사실 당대에는 가장 불온한 혁명가였던 셈이다.

천황의 숭배자라고? 천황 신화를 거부한 급진주의자!

그런데 도대체 기타 잇키가 천황주의자라는 오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저자는 일본의 국가주의 운동 '2·26 쿠데타'를 그 원인으로 꼽는다.

2·26 쿠데타가 일어난 1936년, 일본의 국민들은 경제공황·농촌공황을 겪으며 암담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쿠데타의 주역들인 청년 장교들은 이러한 상황의 원인으로, 군·정부·정당 수뇌가 천황과 국민 사이를 가로막은 채 제멋대로 정치를 하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따라서 천황 중심의 친정 체제를 세우는 것이 2·26 쿠데타의 목표였다.

이 쿠데타의 사상적인 배경이 바로 <일본개조법안대강>이었다. <일본개조법안대강>은 기타 잇키가 '일본의 혼을 밑바닥부터 뒤집어 국가 혁명을 이루자'는 내용을 담아 1923년 출간한 저서다. 귀족제도의 폐지, 보통선거 실시, 사유재산 제한, 대자본의 국유화, 노동자의 권리 향상, 국민 인권의 옹호 등 혁명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좌우익을 포괄하는 지식인 계층에 파란을 몰고 왔으며, 일본의 타락상에 분노하고 있던 청년 장교들에게는 '바이블'로 통했다.

그런데 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의 생각과 기타 잇키 <일본개조법안대강>의 핵심 내용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다. 기타 잇키는 천황을 하나의 기관으로 간주하고 혁명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지만, 청년 장교들은 그것을 천황 중심주의의 국가개조론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일본개조법안대강>의 기본 발상은 '천황의 국민'이 아니라 '국민의 천황'이었지만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장교는 거의 없었다. 

천황은 자신의 친정을 주장한 청년 장교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쿠데타를 신속하게 진압하라는 천황의 명령으로, 쿠데타의 주역들은 사형을 당했다. 그리고 기타 잇키 또한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사형을 당하게 된다. 2·26 쿠데타에 직접 가담한 것은 아니지만, "순진한 황국 청년 장교들에게 불령(不逞)·과격한 사상을 주입했다"는 죄목이었다.

후대의 기억은 잔인했다. 기타에게는 '천황 친정 체제를 위한 쿠데타의 지도자'라는 이름만 남았다. 천황 주권론에 정면으로 맞섰던 기타 잇키는 '사이비 혁명가' 혹은 '극우 파시스트'라는 오해를 받으며 역사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2.26 쿠데타 군이 한때 점령했던 경시청을  빠져나와 부대로 돌아가고 있다. 쿠데타의 주역인 청년 장교들은, 천황을 혁명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 기타 잇키의 사상을 천황중심주의의 국가개조론으로 오해했다.
 2.26 쿠데타 군이 한때 점령했던 경시청을 빠져나와 부대로 돌아가고 있다. 쿠데타의 주역인 청년 장교들은, 천황을 혁명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 기타 잇키의 사상을 천황중심주의의 국가개조론으로 오해했다.
ⓒ '교양인'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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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념으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사유의 직조물"

그러나 기타 잇키의 사상 체계는 결코 간단치 않다. "기타는 내셔널리스트이긴 해도 결코 국수주의자는 아니"라는 저자의 말만 봐도,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힘든 기타 잇키 사상의 복잡성을 읽을 수 있다.

기타는 우익으로 분류되지만, 사회주의를 빼놓고는 그를 설명할 수 없다. 그는 계급 차별을 타파하고 하층을 상층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한 평등주의자였다. 물론 '나=국가'라는 사상에 기초한 그의 사회주의적 구상은 개인이나 계급이 아니라 국가를 주체로 한 것이었다. 천황에게 예속된 국민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도 궁극적으로는 '대일본제국'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기 위한 기초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였다. 기타가 '일본 우익의 정점'이라 불리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개인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한 개인주의자이기도 했다. 또한 '동양적 공화주의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신해혁명에 뛰어든 낭만적 혁명가였다. 비록 전쟁을 옹호하고 일본을 세계대정부를 이끌 유일한 나라로 생각했던 제국주의자였지만, 하나의 일본제국 하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대등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시대에 일본에서는 '혁명은 좌익, 내셔널리즘은 우익'이라는 역할 분담, 다시 말해 이항대립의 도식이 통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항대립의 도식 위에서 기타 잇키에게는 당연하기라도 하듯 내셔널리스트=우익이라는 자리가 할당되었고,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마저 없었다."(<기타 잇키>, 37p)

이 책의 역자는 옮긴이 서문에서 "역사상 발자취를 남긴 인물의 사상은 하나의 이념이나 신념으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사유의 직조물"이라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넘나드는 기타 잇키의 폭넓은 사상적 행보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곧 근대 일본이 짧은 기간 동안 마주쳐야만 했던 사상의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박정희는 기타 잇키의 '진짜 얼굴'을 보았을까

군인 박정희는 군사 영웅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탐독하며 스스로 영웅이 되기를 갈망했다. 또한 군대 조직과 국가를 자신과 일치시키는 관념을 드러내기도 했다. 스스로가 곧 국가의 체현자이기를 갈망했던 기타 잇키와 유사해 보이는 대목이다. 실제로 2.26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기타 잇키에 대한 연구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남는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타 잇키 사상의 다양한 측면들을 모두 꿰뚫고 있었을까?

박정희 대통령이 기타 잇키의 사상과 2.26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현 시점에서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2.26 쿠데타를 보며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일본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시 기타 잇키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은 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기타 잇키는 극우 파시스트다'라는 말에는 일면의 진실과 수많은 오해들이 담겨 있다. 이 한마디로는, 과격 천황 숭배자들의 배후로 여겨져 왔지만 그 자신은 절대 천황주의자가 아니었던 기타 잇키, 사회주의 사상을 자양분으로 삼아 스스로가 곧 국가의 체현자이기를 갈망한 기타 잇키, 내셔널리스트이지만 결코 국수주의자는 아니었던 '기타 잇키'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다 표현해 낼 수 없다.

그러므로 평전 <기타 잇키>의 출간은 반가운 일이다. 박정희가 존경했다고 하는 그 문제적 인물, 기타 잇키의 총체적인 진실에 현재로서는 가장 근접해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두툼한 <기타 잇키> 평전을 통해서, 그동안 숨겨져 있었던 기타 잇키 사상의 시대적 맥락을 그려볼 수 있게 됐다. 그러므로 <기타 잇키>는 기타 잇키 개인의 이야기를 함과 동시에, 역사가 한 개인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고 '기타 잇키'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졌는가? 그 인물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근대 일본의 국가주의를 제대로 파헤져 보고 싶어졌는가? 그렇다면 주저없이 평전 <기타 잇키>를 펼쳐보기를 바란다. 역사책과 위인전이 필연적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던 갈증을 해소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태그:#기타 잇키, #2.26, #일본 우익, #박정희,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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