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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방영된 KBS 1TV <역사스페셜>
 지난 10일 방영된 KBS 1TV <역사스페셜>
ⓒ KBS 1TV <역사스페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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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일기를 보는 일은 흥미롭다. 특히 그 일기가, 유명한 사람의 일기이거나 특별한 사건의 정황을 상세히 드러내주는 일기일 경우 흥미는 배가 된다. 그런 경우 일기는 단순히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글 정도가 아니라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 된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 이순신의 <난중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이 그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그러나 때때로, 그리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일상을 담은 일기도 타인의 조명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일기가 특정 시대, 특정 계급의 사람의 일상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닐 때다. 일기에는 그 시대를 살아간 개인이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구체적으로 서술돼 있기 때문에, 한두 마디쯤으로 간단히 정리된 역사적 서술에 구체성과 생생함을 더해줄 수 있다.

지난 10일 KBS 1TV에서 방영된 <역사스페셜> '조선의 무관 노상추, 그가 남긴 68년간 기록'은 그런 점에서 눈여겨 볼만했다. <역사스페셜>은 조선 후기의 무관 '노상추'가 68년 동안이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쓴 일기를 소개했다. 노상추는 충무공 이순신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 아니지만 조선 후기 무관들의 일상을 대변할 수 있는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일기가 지니고 있는 역사적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노상추의 일기는 곧 조선 무관의 역사

노상추는 1746년 영조 재위 시에 태어나 정조 재위 시 정3품의 고위관직을 지낸 무관이다. 고향은 경북 구미시 선산읍. 문관이 되고 싶어 했으나 영남 지방의 남인 가문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 뜻을 접었다. 노론이 세를 떨쳐 문과 고위직을 점령하고, 남인 가문에서는 문과에 급제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때였다.

"비록 뜻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무관으로 세상에 나가 내 기상을 떨쳐 보일 것이다. 내 나이 스물 셋. 나는 마침내 붓을 던져버리기로 뜻을 정하고 무예를 시작했다."(노상추 일기, 1768년 7월 27일)

상황적 제약의 탓이 컸지만, 무과 응시는 오래도록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무과는 천민들에게까지 기회가 주어지는 시험이었다. 특히 영남지방의 양반들 중에서는 무관이 드물었기 때문에, 무과를 치르는 양반을 더욱 멸시하는 분위기가 더욱 컸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조건 하에서 노상추의 일기에 드러난 그의 아쉬운 심정은 곧 당대를 살아가는 대다수 무관 양반들의 심정일 것이다.

조선 시대는 문치국가였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도, 역사에 기록되는 사람도 대부분 '문관'인 시대였다. 무관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오늘날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조선시대 무관이 누굴까?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다. 그런데 이순신을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양반이라 하더라도 무관 합격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이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도 아마 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그냥 잊혀져버린 무관에 지나지 않았을 거다."(김성우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KBS <역사스페셜> 7월11일자 방송 인터뷰)

그러니 노상추의 일기가 지닌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노상추의 일기는 곧 조선 무관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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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1TV <역사스페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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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낙동강 하류와 상류는 현대 서울의 강남, 강북

KBS <역사스페셜>이 노상추 일기를 통해 소개한 조선 무관들의 모습에는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노상추가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치르는 상황이 200년 후를 살고 있는 내게도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던 것. 당시의 과거시험은 현재의 대입시험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문제들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집안의 경제적 배경에 따라 관직의 고하가 결정되는 하는 경향이다.

노상추가 '문과' 시험 응시를 포기한 이유 중에는 남인 가문 출신이라는 한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집안의 경제적 배경이 든든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형님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당시 노상추는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게다가 집안 소유지의 작황이 그리 좋지 않아서 문과만 바라보며 허송세월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도 돈이 없으면 공부할 수 없었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는 지역에 따른 양반 분포 상황만 봐도 쉽게 확인이 된다. 재해가 잦아서 밭농사를 주로 짓는 낙동강 상류 지역에는 무반이 많았던 반면, 낙동강 하류 논농사 지역에는 문반이 많았다. 노상추 가문은 낙동강 상류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대해 김성우 대구한의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비옥한 지역을 차지한 양반들은 족세가 커지면서 계속 소과 대과로 나가 선산 향내를 장악할 수 있었고, 한전 지대를 장악했던 양반들은 결국 족세가 약해지면서 갈 수 있는 길이 무관으로 (제한됐다)"

"10년 과거 준비, 굶어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

왜 집안의 경제적 상황이 이토록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일단 지방에서 서울로 과거시험을 보러 간다는 것 자체에 드는 경비가 상당했다. 안태현 옛길박물관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과거 시험을 치르러 한양에 가는 양반들은 적어도 말 한마리와 노비 둘을 대동하고 이동했다고 한다. 웬만한 경제력이 아니고서야, 지방에서 한양까지 가는 먼 여정에서 이들 모두를 먹이고 재우는 비용을 충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안 연구사는 "몇 십년 동안 과거 준비만 하다 보니까 집안 자체가 그것으로 인해 몰락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다"고 말했다.

노상추의 경우 무과 응시를 결정하고 급제하기까지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노상추의 일기에도 오랜 과거시험 준비로 인해 생긴 경제적 어려움을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논 아홉 마지기, 밭 90마지기, 돈 50냥이 10년 과거 준비에 모두 들어갔으니 앞으로 굶어죽는 것을 면하기 어려운 것인가. 공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가소롭다."(노상추일기, 1782년5월7일)

특히 노상추가 치렀던 무과 시험에서는 경제적 부담이 더욱 컸다. 도구로 사용되는 활을 응시자가 직접 준비해야 했던 것. <역사스페셜>에 따르면, 활 하나에 어린 소 한 마리 값은 족히 됐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한다. 시험용뿐 아니라 연습용으로 소비되는 활의 양도 상당했는데 말이다. 노상추의 경우 한해 겨울 동안 화살 5,000발을 쏘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시험 도구를 마련하느라 쩔쩔 맸을 조선 무관의 모습에서 오늘날 예체능 분야의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조선 무관의 성공비결은 활쏘기!

물론 노상추 일기에는 이런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인고의 세월을 거쳐 정3품의 고위관직에까지 오르게 된다는 노상추의 성공 스토리에는 놓쳐서는 안 될 교훈이 있다. 

1780년 정조 4년에 노상추는 서른 다섯의 나이로 드디어 무과에 급제하는 기쁨을 맛보지만 그 이후로도 4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다. 숙종 때 무과 시험에서 너무 많은 사람을 뽑았던 탓이다. 합격자 모두가 관직을 얻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영남 남인 가문 출신으로서의 한계도 잇따른 임용 탈락의 큰 이유였다. 관직 임용을 위해 노상추는 수시로 한양으로 올라가 무관 고위직을 찾아다녀야만 했다. 

노상추의 앞길은 좀체 열리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관직에 임용된 이후에는 중앙과 지방의 말단 무관직을 전전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한번은 '갑산'이라는 변방지역의 말단직을 맡게 되기도 했는데, 일기에는 "내가 세력이 없어 변방으로 쫓겨났다(1787.6.22)"라고 적고 있다. 

지난 10일 방영된 KBS 1TV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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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1TV <역사스페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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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노상추는 실력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는 엄청난 관운을 거머쥘 수 있게 된다. 1793년에 실시된 활쏘기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노상추가 우연히 정조의 눈에 띄게 된 것. 정조는 하급관료였던 그에게 정3품 관직을 부여하는 파격인사를 단행한다.

물론 정조의 파격 인사는 시대적 상황에 의해 빚어진 우연한 결과였다. 늘 노론의 시해 위협을 받았던 정조는 무예에 능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특히 노상추의 조부 '노계정'이 영조가 신뢰했던 무관이었다는 사실이 정조의 마음에 들었다. 노론이 힘쓰는 세상에서 남인으로서 항상 변방에 머물렀던 노상추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그동안 변방에 머물게 했던 그 이유 덕분에 출세길에 올랐다. 

하지만 노상추가 그런 날을 맞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거듭된 좌절의 순간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때 활쏘기 테스트에서 정조의 눈에 띌 만큼의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면 그런 기회가 또 다가올 수 있었을까.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우리 주변에서 좀체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노상추의 일기는 곧 조선시대 무관들의 역사이지만, 노상추 일기의 이 대목만큼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조선 무관의 특별한 성공비결이다.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는 역사를 스스로 쓰다

노상추의 말년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극심한 당쟁 탓에 관직 생활의 부침을 겪기는 했지만, 노상추는 비교적 평탄한 무관의 길을 걷게 된다. 양반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고, 후손들에게도 좋은 귀감이 되었다.

노상추는 충무공 이순신처럼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무관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역사에 중요하게 기록된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무관의 역사를 기록해주지 않던 시대에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간 인물이다. 2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일기는 조선시대를 살았던 무관 양반들의 인생을 담은 역사서 역할을 하고 있다. 시대의 요구 때문에 일찍이 문관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리고 한 시대를 바르고 당당하게 살아내려 애쓴 수많은 '노상추'들은 68년을 기록한 그의 일기 안에서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하다.


태그:#조선 무관, #노상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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