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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 아저씨와 꽃게> (임길택·주중식·이기주 가르친 아이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엮음/웅진출판주식회사, 1985.3.31.)

1982년부터 1987년까지 국민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교에서 쓴 글은 반공독후감이나 반공웅변글이나 과학독후감이나 동화독후감들이었습니다. 교과서에 실린 '어른이 쓴 동시'를 흉내내는 동시를 쓰도록 하는 글을 때때로 쓰곤 했습니다. 국민학교 여섯 해에 걸쳐 이러한 글 말고 다른 글을 쓰도록 이끈 교사는 한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여기에 '한 주에 세 번 넘게 안 쓰면 흠씬 두들겨맞고 한 시간 내내 골마루에서 손 들고 서 있다가 밀린 글을 쓰도록' 하던 일기쓰기가 있었습니다. 이무렵 '미쳤다'고 하지 않고서야 글쓰기를 좋아한 동무는 아무도 없었고, 무슨 글을 쓰라고 하면 '안 쓰고 두들겨맞아'야 하느냐, '쓰고 나서 제대로 못 썼다고 두들겨맞아'야 하느냐를 놓고 갈팡질팡이었습니다.

 

모든 글은 원고지 다섯 장을 넘겨야 하는데, 억지로 반공과 과학과 동화를 북돋우는 글을 쓰기란 몇 시간을 연필을 쥐고 있어도 몇 줄 나아가지 않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지난번에 쓴 글을 베낀다든지 비슷하게 쓴다면 어김없이 걸려서 더 두들겨맞습니다. 원고지 장수를 못 채우면 애써 써서 냈어도 숙제를 안 한 아이와 똑같이 맞았고, 독후감 숙제를 다 할 때까지 날마다 한 시간씩 골마루에 손 들고 서 있다가 써야 했으며, 이렇게 해도 안 쓰면 두 달쯤 이 숙제 하나로 두들겨패다가 교사들도 제풀에 지쳐 더는 두들겨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독후감 숙제는 다달이 두 차례쯤 있었고, 숙제를 안 하는 동무는 서너 가지나 대여섯 가지 숙제를 안 한 몫으로 그야말로 끔찍하게 엉덩이에 불이 났습니다. 여기에 일기쓰기를 안 했으면 곱배기로 두들겨맞고, 다른 과목 숙제를 안 했으면 다시 곱배기로 두들겨맞으며, 다달이 치르던 학력평가 시험에서 평균 밑 점수이거나 지난번 시험보다 떨어진 점수일 때에는 다시금 곱배기로 두들겨맞습니다. 국민학교 여섯 해에 걸쳐 학교 안쪽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리면 날마다 몇 시간씩 해도 끝나지 않도록 지겹던 숙제와 이 숙제를 하지 않거나 밀릴 때에 날마다 엉덩이며 종아리며 머리이며 팔뚝이며 손가락이며 온몸 구석구석 두들겨맞아야 하던 두 가지 말고는 거의 없습니다.

 

아침이 되어 학교로 길을 나설 때에는 두 다리가 그지없이 무겁습니다. 그렇지만 하루 공부가 끝날 무렵이 된다든지 쉴 참이나 낮밥때에는 모든 시름과 두들겨맞음을 잊고 골마루며 교실이며 운동장이며 땀이 줄줄 흐르도록 뛰어놉니다. 저녁 다섯 시에는 학년주임 교사가 각목을 휘두르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윽박을 지르고, 저녁 여섯 시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라는 소리가 온 동네에 떠들썩했습니다.

 

그렇다고 일요일에 느긋하게 늦잠을 잔다든지 놀 수 없습니다. 일요일 아침에는 새벽바람으로 일어나서 새마을청소를 해야 했으니까요. 새마을청소에 빠지면 이튿날 월요일에 학교 큰청소를 마치며 또다시 얻어맞을 생각을 해야 하니까,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그러고 보니, 학교 안쪽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다른 한 가지 일은 '청소'이군요. 하루 공부를 마친 다음 모두들 한 시간씩 책걸상이며 골마루이며 교장실과 교무실이며 뒷간이며 창문이며 운동장이며 사육장이며 …… 청소를 해야 했고, 그 주 청소당번 분단은 삼십 분을 더 남아서 다른 구역을 더 청소해야 했습니다. 장학사가 찾아온다고 하면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른다'는 교장선생님 가르침에 따라 한 주 내내 수업까지 빼먹으며 골마루에 반들반들 빛이 나도록 하는 데다가 골마루 한복판 왁스 바른 자리에 발자국 생기면 안 된다고 가장자리로 까치발을 하고 살금살금 걷도록 했습니다.

 

[선거 : 강원 사북국 4년 강원식]

어제 어떤 아저씨가 술 먹으러 오라고 우리 어머니께 말하였다. 어머니가 술을 못 먹는다고 하니 사이다를 먹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갔다. '아마 선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나는 '내 같으면 그 사람은 안 찍어 주겠다.'고 생각했다. (1981년)

 

국민학교 적 동무를 가끔 만날 때에 가끔 국민학교 적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동무들은 어릴 적 겪은 일을 거의 떠올리지 못합니다. 아니, 떠올리지 않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누구나 살림살이가 팍팍하니 옛날 일을 떠올릴 겨를이 없습니다. 지난날 일이란 술잔 한두 차례 비우는 안주거리이지, 더는 주고받을 만한 이야기로 삼지 않습니다. 폐품 모으기를 반과 학년마다 싸움을 붙여 얼마나 고단했고, 가을운동회 공연 준비라며 몇 달에 걸쳐 하루 공부가 끝난 뒤 두어 시간씩 기계체조 훈련을 시키느라 얼마나 괴로웠으며, 방위성금을 얼마나 자주 많이 내느라 어머니 눈치를 보며 힘든 가운데, 해마다 똑같은 곳에 소풍을 가면서 선생님 몫 도시락을 살뜰히 챙기도록 시키는 일로 어머니들 주름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떠올리지 않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으면 잊어버리는 지난날이 되고, 다들 으레 겪으니까 아무것 아닌 일로 여깁니다.

 

우리들 빛나고 해맑은 어린 나날은 하나도 빛나지 못하고 조금도 해맑지 못했습니다. 우리들 빛나는 얼굴을 살리려고 하는 교사를 만나지 못하고, 우리들 해맑은 마음을 쓰다듬으려고 하는 교사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1992년이라고 얼마나 나아지고, 2002년이라고 어느 만큼 좋아지며, 2012년이라고 어느 모로 고쳐졌는지 궁금합니다. 오늘날 교사들은 지난날처럼 반공독후감은 쓰지 않도록 하겠지만 벌써부터 영어를 가르칩니다. 요즈음 교사들은 예전처럼 방위성금이나 갖가지 돈이나 돈봉투를 걷지 않겠지만 진작부터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몹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 강원 사북국 5학년 신미경]

아버지께서는 매일 일을 나가신다. 집에 계시는 어머니께서는 걱정을 하신다.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셔야만 어머니의 마음은 놓이신다. 아버지가 올 시간이 되면, 동생과 나는 아버지를 마중 나간다. 그러면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아버지의 손에서는 탄을 캤던 냄새가 난다. (1983년)

 

아이들 스스로 제 삶을 돌아보며 제 이야기를 쓰도록 하지 않는 교사들은 예나 이제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아이들 스스로 제 삶을 돌아보며 제 이야기를 쓰도록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처음부터 '돌아보도록' 하지 않으며 '생각하도록' 돕지 않는데다가 '살펴보'면서 '껴안을' 수 있게끔 손을 맞잡지 않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제 동무들 살림살이를 헤아리거나 들여다보지 못할 뿐더러, 헤아리거나 들여다보는 눈길을 익히지 못합니다. 이와 함께 제 어버이 살림살이를 헤아리거나 들여다보지 못하는 한편, 헤아리거나 들여다보는 눈썰미를 배우지 못합니다. 제 삶과 제 이웃 삶을 보듬지 못하고, 언제나 제 밥그릇과 수저만 단단히 움켜쥐는 잔재주만 받아들입니다.

 

 

[무더기 빨래 : 강원 사북국 4년 이현숙]

내 동생과 나는 밖에서 실컷 놀고 오면, 옷은 시껌둥이가 된다. 시컴한 옷을 벗어 놓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또 놀러 간다. 옷이 더러워지면 또 쌓인다. 엄마가 왜 그렇게 옷을 껌구냐고 하시며 꾸중을 하시면 나는 이제 안 그러겠다고 한다. 그러고는 또 껌구고 온다. 엄마가 그것을 보고 빨래를 내놓으니 빨래가 무더기였다. 참 많이 있었다. 엄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빨래를 시작했다. 빨래를 다 한 뒤에 어머니는 허리가 아프다며 방에 드러누우셨다. (1983년)

 

<광부 아저씨와 꽃게>와 같은 '아이 스스로 아이 삶과 아이를 둘러싼 어버이와 어른들 삶을 들여다보거나 헤아리며' 쓴 수수하고 투박한 글을 담은 책이란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전에도 이러했고 오늘날에도 이러합니다. 우리 터전에 민주주의가 싹을 틔우거나 뿌리를 내렸다면 우리네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 스스로 아이인 내 삶과 내 어버이와 어른들 삶을 들여다보고 헤아리'도록 이끌어야 할 테지만, 이렇게 하는 초중고등학교가 있다는 소리는 들을 길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린이 스스로 어린이 삶을 살핀 글을 담은 <광부 아저씨와 꽃게> 같은 책은 지난날에도 몇 권 나오지 못했고 오늘날에는 꿈조차 꾸기 어려운데, 어른 스스로 어른 삶을 살핀 글을 담은 책 또한 얼마 나오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꿈꾸기 어렵습니다. 이름난 이들이 쓴 수필책은 나올지라도 내 삶을 당차고 씩씩하게 붙잡으며 살아가는 수수한 사람들이 쓴 수수한 책은 나오기 어렵습니다. 축구선수 박지성 님이 쓴 이야기는 널리 팔릴 테지만, 구멍가게 할배가 쓴 이야기는 팔리지 않을 뿐더러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데다가 구멍가게 할배한테 글을 써 보라고 일러 주는 교사나 책쟁이란 없습니다. 농사꾼 박씨가 쓰는 글이라든지 청소부 최씨가 쓰는 글을 읽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거나 눈물웃음을 짓는 사람이 오늘날 우리 둘레에 얼마나 있을까요. 아이들 어버이가 하는 일은 회사원 일만이 아니요, 밥집 종업원도 있고 짐차 기사도 있을 테지만, 아이들이 바라보는 터전은 몹시 좁습니다. 아니, 아이들 눈높이가 낮거나 얕거나 좁기 앞서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돌보는 우리 어른들 눈높이부터 낮거나 얕거나 좁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태그:#책읽기, #삶읽기, #글쓰기, #생활글, #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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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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