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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나눌 수 없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줍잖고 모자라고 어설프나마 책으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조금 있습니다. 책에 모든 삶을 걸거나 바치려는 매무새가 아니라, 내 삶을 알뜰히 다스리는 가운데 책에 깃든 넋을 하나 잡아채어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겠다는 매무새로 책방 하나를 마을 한켠에 조용히 열어 놓습니다.

책장사는 책장사로만으로도 바쁘고 벅차 달리 떠벌리거나 떠들썩하게 알리지 않습니다. 책이란 억지로 쥐어 주며 읽힐 수 없으며, 책을 다루는 사람 또한 책을 모르는 사람한테 억지로 책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책은 읽히는 때가 있고, 모든 사람은 저마다 책을 찾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마을 한켠에 조용히 책방을 연 책장수는 사람들한테 책을 찾아야 할 바로 한때를 헤아리면서 당신 삶을 다부지게 일구는 가운데 책방살림을 꾸립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오든 몇 안 되는 사람이 살짝 기웃거리다 지나가든 책방 일꾼은 날마다 꾸준히 책을 만나고 다루고 만지고 껴안으면서 새로운 책을 차곡차곡 갖춥니다. 묵은 책은 묵은 책대로 오랜 세월을 차근차근 담고 있는 매무새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책은 새로운 책대로 오랜 세월을 무르익혀 남달리 삭인 또다른 빛깔로 가득한 매무새가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책장사 또한 돈벌이 일자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엄청나게 큰 책방을 열어 으리으리 광고판을 붙이고 무슨무슨 에누리나 덤을 안기면서 돛데기 저자판을 이룹니다. 온누리 골골샅샅 새끼 가게를 열어 모든 사람한테 똑같은 책을 안기며 주머니 두둑하게 돈다발을 챙깁니다.

자그맣게 문을 연 동네책방 일꾼 또한 먹고살아야 합니다. 먹고살아야 하는 책을 팝니다. 그러나 먹고사는 책 하나에도 그저 내 배만 채우면 그만이라는 넋이 아닌, 먹고사는 책 하나에까지 함께 밥숟갈 나누려는 넋을 담아서 고맙다는 뜻을 담아서 다룹니다.

인천 배다리에 깃든 작은 책방이자 책쉼터인 <나비날다> 한켠 모습. 자그맣게 꾸리는 책방은 더 많은 책을 갖추거나 꽂지 않으나, 더 깊이 들여다볼 느긋함과 넉넉함이 살아 있습니다.
 인천 배다리에 깃든 작은 책방이자 책쉼터인 <나비날다> 한켠 모습. 자그맣게 꾸리는 책방은 더 많은 책을 갖추거나 꽂지 않으나, 더 깊이 들여다볼 느긋함과 넉넉함이 살아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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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하는 큼지막한 책방이 있는 곳을 두고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문고에 가자." 자그맣게 문을 연 동네책방이 하나둘 모인 곳을 두고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책방골목에 가자." 또는 "책방거리에 가자."

서울 청계천이든 부산 보수동이든 광주 계림동이든 대구 교동이든 대전 원동이든 인천 배다리이든 전주 홍지서림 길이든 청주 중앙로이든, 자그마한 책방이 다닥다닥 잇닿아 있거나 점점이 흩어져 있는 이곳을 놓고 그예 '책방거리'나 '책방골목'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으리으리 번쩍번쩍 큼지막한 책방 하나와 견주어 보면 참으로 보잘것없고 작달막한 책방들이지만, 작은 책방이 작게작게 오순도순 어깨를 맞대고 있으면서 동네를 이루고 마을을 이룹니다.

아이들은 참고서를 사고팝니다. 대학생도 참고서와 교재를 사고팝니다. 여느 읽을거리를 찾거나 깊은 마음밥을 찾는 사람 발길은 꽤 뜸합니다. 어린이책을 낱권으로 하나하나 챙겨서 아이한테 읽히는 사람 또한 드뭅니다. 서른 권 마흔 권 백 권 이백 권을 뭉텅이로 전질로 안기는 사람은 제법 있습니다. 책이 책대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책을 책대로 다루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돈벌이에 쉬 끄달리듯, 책을 바라볼 때에도 지식조각과 지식쪼가리와 지식부스러기 같은 매무새가 되고 맙니다. 처음부터 돈조각과 돈쪼가리와 돈부스러기에 매달린 삶이었기에 책을 바라볼 때라 하여 달라지지 않습니다. 책 하나가 마음밥이 되어 내 마음밭을 일구는 밑거름이 된다고 여기면서 고이 움켜쥐고 고맙게 받아먹으며 고스란히 삭이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서울 숙대 앞에 자리한 작은 책방 <토리>로 들어서는 한쪽 벽에는 그림 하나 곱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책방을 알리는 간판을 크게 마련하기보다, 책을 나누려는 마음을 조촐히 보여주는 작은 책방 몸짓이 즐겁습니다.
 서울 숙대 앞에 자리한 작은 책방 <토리>로 들어서는 한쪽 벽에는 그림 하나 곱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책방을 알리는 간판을 크게 마련하기보다, 책을 나누려는 마음을 조촐히 보여주는 작은 책방 몸짓이 즐겁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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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책으로 담지 않아도 되던 이야기가 책에 담기고 있으니 어쩌는 수 없습니다. 딱히 책에 싣지 않아도 넉넉하던 이야기를 책에 실으려 하고 있으니 하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식물도감이 아닌 우리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는 들살이였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예도감이 아닌 우리 어버이한테서 이어받는 밭살이였어야 합니다. 육아책이 아닌 어버이한테서 배우고 곁에서 지켜보며 받아들이는 아이키우기였어야 합니다. 요리책이 아닌 어버이한테서 받아먹은 밥을 찬찬히 살피다가는 옆에서 신나게 배우는 밥하기였어야 합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면, 농사짓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은 아주 드물 뿐 아니라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즐거이 농사짓겠다는 사람은 1/100조차 안 되니까요. 아니 1/1000이나 1/10000조차 안 된다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날마다 수없이 쏟아지는 책은 날마다 수없는 이야기거리를 만들지만, 이 이야기거리는 며칠 못 가 스러집니다. 그래도 많이들 팔리는 책이며, 많이들 사랑받는 책입니다. 오직 좁은 울타리에서 큰 책장수한테는 돈벌이가 되고 큰 출판사한테는 이름값이 되는 노릇이지만.

오순도순 주고받는 한식구 밥자리 이야기가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옮아갔습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앞마당 멍석자리 이야기가 극장 화면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소설이나 시나 수필이라는 이름을 걸친 문학이 되어 골방 구석으로 떠나갔습니다.

서울 연세대 정문 건너편에 자리한 헌책방 <정은서점>은 1969년부터 '작은 책방'으로서 헌책방 살림을 고이 이어 오고 있습니다. 몇 해 앞서부터는 헌책방 따님이 책일을 차츰차츰 배우면서 함께 일하며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서울 연세대 정문 건너편에 자리한 헌책방 <정은서점>은 1969년부터 '작은 책방'으로서 헌책방 살림을 고이 이어 오고 있습니다. 몇 해 앞서부터는 헌책방 따님이 책일을 차츰차츰 배우면서 함께 일하며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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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흘리지 않는 일이 되고 놀이가 됩니다. 땀을 흘리면 일터에서 즐겁고 놀이터에서 흐뭇합니다만, 땀을 흘리지 않고 돈만 버는 일이 되고 돈만 쓰는 놀이가 되다 보니, 오늘날 우리 터전에서 쏟아지는 책은 땀을 담지 않고 돈을 다루는 책이 되고 맙니다. 몸품을 팔지 않는 삶이 되고 다리품을 들이지 않는 삶이 되며 손품을 바치지 않는 삶이 된 오늘날은, 몸품과 다리품과 손품이 안 담긴 책과 영화와 운동경기와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줄줄이 흘러넘칩니다.

몸품을 팔아 보고 다리품을 팔아 보고 손품을 팔아 보면, 책에는 없는 그지없이 깊은 이야기를 만나고 텔레비전과 인터넷에는 없는 더없이 살가운 이야기를 만나며 영화와 운동경기에는 없는 가없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음을 온몸과 온마음으로 깨닫습니다. 보육원이나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지 말고 집에서 하루 내내 아이하고 뒹굴어 보셔요. 자동차에 몸을 맡기지 말고 내 두 다리한테 마실을 맡겨 보셔요. 자전거도 좋고요. 빨래기계에 사랑스러운 식구들 옷가지를 맡기지 말고 내 두 손에 사랑스러운 식구들 옷가지 빨래를 맡겨 보셔요.

머리맡에 누워 새근새근 잠든 아이와 옆지기를 꾸덕살 박힌 내 투박한 손바닥으로 살살 어루만져 보셔요. 전기밥솥에 물과 쌀 넣고 땡이 아니라 냄비에 밥물 맞추어 내 몸느낌과 코느낌에 따라 구수한 밥을 지어 내 손으로 식구들 밥상을 차리고, 식구들이 나란히 돌아가면서 설거지를 해 보셔요.

나부터 내 삶자리에서 삶다운 삶이라 할 때에는 내 살림집 하나 때문에 동네가 되고 마을이 됩니다. 삶다운 삶인 사람이 하나가 모이고 둘이 모이면서 복닥복닥 싱그러운 이야기꽃 피어나는 마을터가 이루어집니다. 마을놀이란, 마을잔치란, 마을두레란, 마을마당이란, 하나같이 삶다운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 몇몇이 밑뿌리가 되어 이루어집니다.

명륜동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은 알맞춤한 작은 책방으로 한결같은 걸음을 뚜벅뚜벅 걷는 반가운 책집입니다.
 명륜동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은 알맞춤한 작은 책방으로 한결같은 걸음을 뚜벅뚜벅 걷는 반가운 책집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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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이란, 책동네란, 또는 책방골목이란, 책방거리란, 내 삶을 사랑스럽고 믿음직하게 다독이는 사람들이 책 하나에 깃든 사랑과 내 몸가짐에 배인 사랑을 하나로 엮으면서 스스럼없이 나누는 자리에서 열립니다. 책방이 수십 수백 군데가 있다 하여 책마을이 되지 않아요. 일본 도쿄 간다와 같이 151군데 헌책방이 모여 있어야 책동네가 될까요. 책마을이든 책동네이든 책방골목이든 책방거리이든 고작 두 군데 책방만 있더라도 이루어집니다. 아니 꼭 한 군데 책방만 있어도 이루어져요.

아파트숲으로 바뀌어 가는 온누리입니다만,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땀과 벗 삼아 일군 동네 골목에 꽃그릇을 한 해에 한 가지씩 마흔 해에 걸쳐 마흔 가지를 마련하여 집 앞과 담벼락과 지붕과 좁은 마당에 차곡차곡 갖추어 놓으면서, 온 동네와 골목을 꽃동네와 꽃골목이 되도록 바꾸어 놓습니다. 골목동네는 기나긴 해에 걸쳐 꽃동네로 시나브로 탈바꿈하기 마련인 한편, 골목동네는 저마다 자가용 댈 데가 모자라다며 아침저녁으로 시끄러운 삿대질과 목청이 떠도는 무시무시한 싸움동네로 차근차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꽃동네를 이루는 힘이든 책동네를 이루는 힘이든, 꽃마을을 일구는 손길이든 책마을을 이루는 손길이든, 아주아주 많은 사람이 이루어 내지 않습니다. 다문 한 사람 힘으로 이루기도 하고, 두어 사람이나 서너 사람 힘으로 이루기도 합니다. 사람 숫자는 따질 대목이 아닙니다. 꽃잔치 골목집 숫자는 헤아릴 까닭이 없습니다.

책방 숫자를 세는 일이란 부질없습니다. 참고서 헌책방만 가득하여도 괜찮습니다. 어린이책을 낱권책이 아닌 전집으로만 다루는 책방만 늘어서 있어도 괜찮습니다. 어여쁜 골목동네에 골목사람이 꽃씨 하나를 심어서 사랑스레 가꾸듯, 어여쁜 책동네에 책일꾼이 책씨 하나를 심어서 알뜰히 가꿉니다. 서른 해 마흔 해에 걸쳐 달동네 해동네 꽃동네가 됩니다. 서른 해 마흔 해에 걸쳐 별동네 구름동네 책동네가 됩니다.

인천 배다리에서 작은 책쉼터를 꾸리는 일꾼은 책쉼터를 지키는 틈틈이 손품을 들여 여러 가지 즐길거리를 마련해 놓습니다. 작은 책방에서만 맛보거나 누리는 기쁨입니다.
 인천 배다리에서 작은 책쉼터를 꾸리는 일꾼은 책쉼터를 지키는 틈틈이 손품을 들여 여러 가지 즐길거리를 마련해 놓습니다. 작은 책방에서만 맛보거나 누리는 기쁨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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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도화1동 624번지 달동네에서 태어난 아이 하나는 동네 골목에서 뛰놀고 자라면서 배다리 책마을에 마음을 붙이는 동안 사랑스러운 옆지기를 만나 아이 하나를 함께 낳고 기르면서 꽃과 책과 땀을 물려주고 있습니다. 고운 아이한테 아직 흙을 물려주고 있지는 못하는데, 이제부터 차근차근 흙자리를 찾아 살포시 나눌 수 있으면 내 어버이한테서 고운 목숨을 받아 살아가는 고마움을 물려주는 어버이 노릇을 조금이나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태그:#책마을, #책읽기, #삶읽기, #작은책방,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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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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