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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에 '단순' 풍툼과 비르가는 거의 같은 길이인 반면, 하나의 클리비스나 하나의 포다투스는 두 개의 '단순 음들'에 해당했다."(40p)

<음악 기보법의 역사>(장 이브 보쇠르 지음, 민은기 옮김, 이앤비플러스 펴냄)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을 펼쳐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놀라웠다. 내가 이렇게까지 음악 용어에 까막눈일 줄이야... 제목에 나와 있는 '기보법'이란 말도 모르는 데다, '리가투라'니 '타블라투어'니 하는 용어를 들여다 보고 있자니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게다가 몇 개의 악보를 제외하고는 한눈에 이해할 수 없는 그림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기보법의 역사가 지닌, 간단치 않은 '의미'가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음악 기보법의 역사! 무슨 말이야?

<음악기보법의 역사-소리가 기호로> 표지사진.
 <음악기보법의 역사-소리가 기호로> 표지사진.
ⓒ 도서출판 이앤비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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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기보법은 음악을 가시적으로 표기하는 방법을 말한다. 거칠게 말해 '악보를 기록하는 방법'쯤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장 이브 보쇠르'라는 외국인 교수가 지은 <음악기보법의 역사-소리가 기호로>는 초기 형태의 기보법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음악 기보법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상세하게 다룬다.

하지만 이 책은 음악 기보법을 다룬 기존의 책들과는 다른 듯하다. 지금까지의 책들이 과거의 악보를 해독하기 위한 기술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 책은 기보법이라는 창을 통해 음악에 대한 인류의 사고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완전한 악보란 없다

악보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었던 첫 번째 통념은 이랬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기보법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악보가 가장 발전된 형태의 악보가 아닐까 했었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기보법이 모든 음악 언어에 가장 잘 맞는 기호 시스템이라는 착각을 버리라고 주문한다. 서양의 기보법은 음의 높이와 길이를 우선적으로 결정하는 음악적 개념에 맞추어진 것이며, 이런 기보법으로는 음색이나 강세, 공간까지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모든 음악에 일반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분석과 사상의 유일한 체계를 강요하려는 의지를 말한다"며 완전한 형태의 기보법은 허구라고 못박는다.

이러한 사실은, 20세기 후반 들어 작곡가들이 다양한 형태의 기보법을 개별적으로 선택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가장 정확하다고 여겨지는 기보법에서부터 소리에 대한 최소한의 반응이라 할 정도로 가장 유연한 기보법에 이르기까지, 같은 시대에 사용되는 기보 시스템들 사이의 간극이 이렇게 컸던 적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이 두 극단 사이에도 수많은 시스템이 존재한다. 

<음악기보법의 역사-소리가 기호로>에는 난해한 용어와 기호가 많았지만, 흥미를 끄는 요소도 적지 않았다.
 <음악기보법의 역사-소리가 기호로>에는 난해한 용어와 기호가 많았지만, 흥미를 끄는 요소도 적지 않았다.
ⓒ 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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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보법으로 작곡가의 창의성과 개성을 표현하다 

"음악에 대한 미학적 기준은 계속해서 변하는 것이므로 작곡가는 끊임없이 기존 기보법의 규칙을 어길 수밖에 없다. 결국 작곡가는 기보법이 시대에 맞게 변하는 데 기여한 셈이지만, 이렇게 변화된 기보법은 다시 여러 면에서 작곡가의 창조력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게 된다."(12p)

따라서 '완전한 악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만큼 끊임없는 창작욕을 불러일으킨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을 좋은 예로 꼽는다.

'12음 기법'은 한 옥타브 내 12개의 음이 다른 음들과 동등한 관계를 맺도록 작곡하는 방식을 말한다. 조성음악은 1개의 으뜸음과 이에 종속적으로 상관하는 여러 음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는 데 반해, 12음 기법에서는 어느 음 사이에도 지배관계가 없다. 쇤베르크는 기존의 기보 시스템으로 자신의 화성 개념을 표현할 수가 없다고 판단해 새로운 시스템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작곡되는 연주?' 통념을 깨는 오늘날의 악보

결국 다양한 형태의 기보법은 그만큼의 개성을 표현을 보장한다. 사티(Erik Satie)를 보자. 그의 피아노곡 중간 중간에는 음악 기보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무관해 보이는) 단어나 문장이 나온다. "나는 다른 것을 더 좋아한다. 자동차를 하나 찾으러 갑시다"나 "부엉이가 자기 새끼에게 젖을 먹인다"와 같은 문장이 그 예다.

이런 이유로 사티의 이 악보들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다. 사티 자신 역시 그 의도에는 속시원한 답을 해주지 않았다. "연주자와 나 사이의 비밀"이라고 했을 뿐. 덕분에 연주자들은 그의 악보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자세로 대해야만 한다.

현대에 이르면 기보법은 더욱 전통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얼 브라운(Earle Brown)이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전위음악 작곡가는 기존의 기호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그래픽 코드를 창안해 기존 통념을 뛰어넘는 악보를 만들었다.

그의 작품 <1952년 12월(December 52)>이라는 곡이 좋은 예다. 이 곡 악보에는 서로 다른 길이와 두께의 막대들이 수직과 수평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악기 지시도 없고, 연주 시간도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도형의 위치와 중요도를 통해 연주 음역과 강도, 지속 시간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다양한 상징과 기호로 이루어진 르네상스 시대 악보들.
 다양한 상징과 기호로 이루어진 르네상스 시대 악보들.
ⓒ 서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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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기보법의 망을 빠져나간다"

앞서 저자는 서문에서 "소리는 계속해서 기보법의 망을 빠져나가고, 음악은 저 너머에 있는 듯하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기보법이 지닌 상대성과 독창성이 나타나는 과정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 때문일까. 기보법의 변천 과정이 품고 있는, 결코 작지 않은 의미에 대해 읽다 보니 작곡가와 연주자들의 고충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창작의 표현'과 '악보의 해석'이라는 말의 진정한 무게를 느끼게 된 것이다. 어려운 용어를 부여잡고 끝까지 읽은 노력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물론 전문적인 설명이 많아 어쩔 수 없이 뛰어 넘어가야 했던 부분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보고픈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 비전공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조금만 더 친절한 책이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하지만 음악 용어를 모른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평소 클래식 음악을 취미 삼아 듣고 주요 작곡가의 작품 경향 정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악보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까지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흥미를 느낄 만한 요소가 이 책에는 많은 것 같다. 


소리가 기호로 음악기보법의 역사

장 이브 보쇠르 지음, 민은기 옮김, 이앤비플러스(2010)


태그:#음악 기보법의 역사, #기보법, #이앤비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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