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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천(歸天)

 

.. 책과 그 안에 들어앉은 글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사람 위에 있다가 죽어서도 땅에 묻히지 않고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귀천歸天한다 ..  <윤성근-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매진,2009) 53쪽

 

"책과 그 안에 들어앉은 글"은 "책과 책에 들어앉은 글"이나 "책과 글"로 고쳐써야 올바릅니다. "태어난 그 순간(瞬間)부터"는 "태어난 그때부터"나 "태어난 때부터"로 손질하고, "그 영혼(靈魂)이"는 "넋이"로 손질해 줍니다.

 

이 보기글을 보면 '그'라는 대이름씨를 세 차례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퍽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면서 '그'라는 대이름씨를 아무 자리에나 넣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할 텐데, '그'를 넣어야 할 자리에는 넣어야 합니다만, 엉뚱한 자리에 얄궂게 넣어서는 안 될 말입니다.

 

이 보기글 첫머리는 "책과 글은 태어난 때부터"로 다듬으면 넉넉합니다. 그저 단출하고 홀가분하게 적바림하면 되는 글입니다. 무언가 더 이야기하고 싶어 이처럼 꾸밈말을 곳곳에 붙일 수 있는 노릇이지만, 애먼 꾸밈말이란 글쓴이 속내하고 엇나가기 일쑤입니다. 가벼우면서 쉽게 쓰고, 맑으면서 알맞게 쓰도록 스스로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 귀천(歸天) : 넋이 하늘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

 │

 ├ 하늘로 올라가 귀천歸天한다

 │→ 하늘로 올라간다

 │→ 하늘로 돌아간다

 └ …

 

"하늘로 돌아간다"를 뜻하는 한자말 '귀천'입니다. 시인 천상병 님이 당신 시에 이 말마디를 쓴 뒤부터 사람들이 이 말마디를 퍽 즐겨쓰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귀천'도 한 마디이지만 "하늘로 돌아간다" 또한 한 마디입니다. 글자수로 본다면 '귀천'은 둘이고 "하늘로 돌아간다"는 일곱이라 할 텐데, 두 말마디를 읽거나 듣는 결에서는 둘 모두 한 마디입니다.

 

한자말 '식사'도 한 마디이고, 우리 말 "밥을 먹다" 또한 한 마디입니다. 한자말 '촬영'도 한 마디이며, 우리 말 "사진을 찍다" 또한 한 마디입니다.

 

말마디란 글자수로 헤아릴 때가 있으며, 글자수 아닌 말흐름에 따른 결로 살필 때가 있습니다. 굳이 한 낱말로만 못박아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 말흐름과 말결을 돌아보면서 한 낱말을 새롭게 지으면 됩니다. 여느 자리에서는 "밥을 먹다"와 "사진을 찍다"라 말하고, 애써 한 낱말로만 써야 하는 자리에서는 '밥먹기'와 '사진찍기'처럼 한 낱말로 추스르면 됩니다. 이런 흐름에 따라 '글쓰기'나 '말하기' 같은 말이 태어납니다. '세기-빠르기-묽기-크기-높이' 같은 낱말들은 모두 이러한 흐름을 따르며 태어났습니다.

 

 ┌ 하늘가기 / 하늘오름

 ├ 하늘마실 / 하늘나들이

 ├ 하늘길 / 하늘부름

 └ …

 

"하늘로 돌아간다"를 뜻하는 한자말을 쓰고 싶다면 이 한자말을 쓸 노릇입니다. 지난날 천상병 님이 시를 즐길 무렵을 생각하면, 그무렵에는 지식인이고 글쟁이이고 한문이나 한문 투 말마디를 즐겼습니다. 이 흐름은 오늘날에도 꽤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한결 부드러우며 손쉽고 해맑은 우리 말로 넉넉하게 문학을 즐기고 생각을 나눌 수 있음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늘로 돌아간다"를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 낱말로 마무르는 슬기를 뽐내지 못했다지만, 이제는 이 말마디를 그대로 즐기면서 한 낱말로 마무르는 슬기를 빛낼 수 있어요.

 

말 그대로 '하늘가기'라 하면 됩니다. '하늘오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느낌을 북돋우며 '하늘마실'이나 '하늘나들이'라 해 볼 수 있어요. 이런저런 말틀을 곱씹으며 이밖에 여러모로 새 낱말을 빚어도 잘 어울립니다. 생각하기 나름이고 쓰기 나름이며 살아내기 나름입니다.

 

더군다나 이 보기글을 보면 "하늘로 올라가 귀천歸天한다"로 되어 있는데,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얄궂은 겹말입니다. 그냥 "귀천한다"라고만 하든지 "하늘로 올라간다"라고만 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글을 쓰면서, 엉터리로 글을 쓰면서, 되는 대로 글을 쓰면서, 우리들이 어떻게 서로서로 깊거나 너른 생각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글자랑 말치레를 하면서 어찌 '하늘오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돈이나 물질이나 힘이나 권력이나 이름값이나 명예나 고스란히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늘가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늘마실이란 새털처럼 가벼운 매무새로 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들이란 솜털처럼 보드라우며 가뿐한 몸가짐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저잣거리 장사꾼 아저씨 아주머니하고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말투를 되찾아야 합니다. 아니, 예닐곱 살 어린이하고 즐거이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글투를 헤아려야 합니다. 되찾는다기보다 생각해야 할 노릇이고, 찾아내야 한다기보다 느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자도 알고 영어도 알고 중국말이나 일본말도 안다 하여 지식이 더 뛰어나거나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 온갖 바깥말을 뒤섞을 수 있다 해서 생각이 더 깊거나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이 나라 이 땅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우러지고자 하는 글이거나 말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말과 내 글은 어떤 사람한테 스며들거나 다가서는 말과 글인지를 톺아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묶음표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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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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