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지난 10년 최고의 책> 특별기획을 진행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전문가와 시민기자, 누리꾼 패널들이 뽑은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을 기본 자료로 삼아, 선정자문위원회의 자문 그리고 누리꾼 투표 등을 거쳐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10권을 선정해 최종 결과를 5월중에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지난 10년간 최고의 책> 서평 기사를 공모해 좋은 기사로 선정된 경우 소정의 특별원고료(사이버머니)를 지급합니다. <편집자말>

성실한 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이,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살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갔습니다. 대학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생각한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사무소에서 경력 쌓아서 나중에 내 사무실을 차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통과의례인 군대에 갔습니다. 남들 다 가는 군대 나는 못 가랴 생각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지원해서 논산훈련소에 가서도, 조교들의 욕이 가득한 폭언 속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후반기 교육기간은 자유로운 분위기였습니다. 자대배치 받아 귀속된 부대는 (당연히)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군대에서 '세상'을 알다

 

가자마자 60명 선임병의 이름과 차량번호를 함께 외우라는데 도저히 못 외웠습니다.(전 암기과목에 약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도 말이죠. 군기가 빠졌다고 했습니다. 매일 맞았습니다. 내무반에서는 점호시간에 말년 병장이 쇼를 했습니다. 새로운 신임병을 위한 쇼였습니다. 위로차원이 아니라 어떻게든 웃기게 해서 내무반 분위기를 쇄신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참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웃음코드가 절묘하게 통하는 얼굴과 말발에 안 넘어가곤 배기지 못했습니다.

 

취침 전에 불려 다녔습니다. 이놈이 불렀다가 주의주고 저놈이 불러다가 때리고 했습니다. 폭력의 강도가 심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정신 못 차리고 행동한 걸 보면. 저는 상급병들의 기대에 부흥하는 신입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상병이 될 때까지 두고두고 '꼴통'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포기'하기까지 나에게 가해졌던 집단폭력의 틀을 벗어나기까지는 꽤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나 때문에 자신들까지 고생한다는 동기들의 시선이 더 힘들었습니다. 그 힘든 시간을 버티게 해 준 것은 자존감이었습니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들로 대접받아왔던 가족이 있었고 나를 좋아하고 존중해주는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탈영하거나 화장실에 목을 맬 수도 있었을 겁니다. 버티긴 했지만 정신은 피폐해졌습니다. 이미 사회생활을 간접 경험한 나로서는 이런 군대가 길러낸 선배들과 같이 직장생활을 잘 해낼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제대 후 복학 즈음에 국가부도사태가 났습니다. 경기에 민감한 건설업과 밀접한 영향을 가지고 있던 설계사무소들이 대부분 인원을 감축하거나 문을 닫았습니다.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시기가 와버렸습니다. 동기들 대부분은 대학원 진학을 했습니다. 더 이상 지지부진한 배움을 핑계로 엄청난 돈을 낭비하기 싫었던 저로서는 부모님의 권유를 물리치고 취업선언을 하고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1년여 만에 당시 잘나가는 벤처기업 쪽에 취업을 했긴 했습니다만 1년을 갓 넘기고 이직, 6개월 만에 또 옮기고, 3개월…….

 

옮길수록 회사의 규모는 작아졌고, 일은 힘들어졌습니다. 그 일들이 대부분 내가 믿지 못하는 정보들을 소비자에게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적이 나올 턱이 있겠습니까. 무조건 기쁘게 믿어야 하고 그 믿음이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해져야 지갑이 열릴 것인데.

 

현실 부적응의 자아 찾기

 

그 때 만난 책이 있습니다. 집에서 보던 한겨레신문에 가끔 칼럼을 기고하던 박노자의 책 발간 소식에 단번에 구입했습니다. 제목도 도발적이었고 내용은 더 대담했습니다. 대학 다니면서도 한번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관련 서적을 들여다 본적이 없는 저로서는 여태 이런 사람은 없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뭔가 찜찜하고 가려운 구석을 구석구석 시원하게 해주는 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지금도 대다수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 항상 들어가는 이순신 장군. 그를 기리는 세종로의 동상이 박정희의 '충'을 세뇌하는 작업의 일환이라는 것이나 글로벌한국을 꿈꾸던 당시에 영어공용화 이론에 대한 신랄한 비판, 한국 교회에 대한 선민의식과 배타주의를 지적하고 군대문화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다니 말이죠. 거의 모두가 금기시되는 비판이었습니다. 신성한 곳에 위치한 것들을 비판하는 일에 내가 끼어든다는 것이 그리 신나는 일인 줄 처음 알았지요.

 

대학교수를 비판한 것이나 짐짓 모른 체하고 있던 '검은' 외국인에 대한 차별의식을 강도 높게 비판한 글들은 도무지 동의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논리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가 꼭 바르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려준 것이었습니다.

 

민족주의와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비판은 배경지식이 없던 나로서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비판이었습니다. 한국=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머릿속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여태 배워서 넣어왔던 지식들이 휴짓조각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사물과 현상에 대해 깊은 통찰과 해석을 보여주는 그의 글들에 진정한 스승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속에 등장하는 책들과 참고서적 리스트들을 도서관에서 뒤적거렸습니다. 대부분은 단숨에 읽기엔 거부감이 드는 무거운 책들이었죠. 그러다 눈이 맞으면 몇 시간이고 앉아서 독파했습니다. 그렇게 넓혀간 독서목록은 내 삶에 지침을 내려 주었습니다.

 

홍세화, 윤구병, 전우익, 스콧 니어링, 조셉 젠킨스로 이어져 자본론, 공산당선언, 쑨 원과 김구 등으로 넓혀갔습니다. 동화작가 권정생의 삶에 존경을 표하게 되었고 하이타니 겐지로의 교육철학이 가슴에 담겼습니다.

 

책으로 대화하기

 

인문학이 생태학으로 다시 철학과 농학을 공부하면서 시골살이를 꿈꾸었습니다. 내가 마음이 편안하려면 이렇게 사는 것이 답이겠구나. 귀농관련 서적들과 잡지들을 탐독하고 간단한 농사관련 책들로 공부를 했습니다. 생태 집짓기 관련 책을 읽고 인터넷을 떠다니다가 가입한 카페에서 공지된 현장에 가서 몇 달씩 일을 하고 왔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또 책을 읽었습니다. 책읽기가 즐거워졌습니다. 궁금해 하던 것들을 찾는 수준에서 지식의 폭을 넓히는 재미로 확장되었습니다. 좋아하는 학자, 저술가의 리스트가 생겨났고 꾸준히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시골로 내려와서 미완의 집에서 자식 낳고 살게 된 지 4년입니다. 외부에서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가계구조 속에서도 '별일 없이 살고' 있습니다. 한달에 열 권쯤 읽는 책들의 대부분은 서평 이벤트로 얻는 것들이거나 출판사에서 소개를 부탁하며 보내주는 것들입니다. 글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이, 글로 소통하는 것이 기쁨을 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불만들이 많습니다. 부모님도 장모님도. 주변 친구, 지인들도. 한창 돈벌 나이에 시골에서 책이나 읽고 있는, 내가 지금 이렇게 된 것 다 그 책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당신들의 대한민국/ 박노자/ 한겨레신문사/ 8,500원


당신들의 대한민국 1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2001)


태그:#당신들의대한민국, #박노자, #2000~2010최고의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