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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저녁 오랜만에 TV를 켰다.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두 팔 없는 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시선이 멈췄다. MBC스페셜 <승가원 천사들>이었다. 두 팔이 없고 입천장이 뚫린 채 태어난 태호(11세)가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미술 다음으로 좋아하는 음악시간에는 박자에 맞춰 짝짝이를 치기도 했다. 체육시간, 릴레이 풍선 건네주기 게임에서도 태호의 활약은 빛났다. 팀을 1등으로 이끌어서가 아니라, 끝까지 경기를 마친 꼴등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태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당당히 골인지점을 향해 엉덩이를 굴리며(?) 나아갔다. 그리고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

사이좋은 의형제, 태호와 성일이
▲ MBC스페셜 <승가원 천사들> 사이좋은 의형제, 태호와 성일이
ⓒ 손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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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을 쓸때까지 언제라도 기다리리

태호는 장애아동보육시설 승가원에서 산다. 태호는 미숙아로 태어나 뇌병변 1급 장애 판정을 받은 성일이(8)를 돌봐주는 형이기도 하다. 태호는 손에 힘이 없는 성일이에게 '홍성일'을 쓰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태호의 발가락으로 성일이의 손가락에 힘을 주어 '홍'을 써보인다. 계속되는 연습에도 '홍'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태호는 포기하지 않고 성일이가 쓸 때까지 기다린다. 성일이가 드디어 '홍'을 썼다.

태호가 '엄마!'를 외쳤다. 승가원 '엄마'는 태호와 성일이에게 과자 선물을 주시고는 나머지는 '성일'을 모두 다 쓰고 나면 주시겠다고 한다. 성일이는 '홍성일'을 다 쓸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태호가 옆에 있으므로.

태호와 성일이가 이사를 갔다. 원래 살던 여자아이들 방에서 터프한 남자아이들이 사는 햇님실로 옮긴 것이다. 남자아이들 방에서의 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험난했다. 숨막히도록 태호를 끌어안는 친구, 보기만 하면 얼굴을 꼬집는 동생 등 지뢰밭 투성이다. 태호는 '도망가', '문 잠가!'를 외치며 이들을 피해다녔다.

슬프고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무서웠을뿐. 그와중에도 태호와 성일이는 웃음이 나왔다. 피융, 피융, 풍풍 소리를 내며 저희들끼리 웃었다. 울기만 하던 성일이는 어느새 햇님실 생활이 익숙해졌다. 더이상 울지 않았다. 태호에게도 수호천사가 생겼다. 태호를 괴롭히는 친구가 생기면 다른 친구가 막아주었다. 태호는 또 그렇게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만들어 나갔다.

서로 돕는 아름다운 반을 만들겠습니다

5학년이 된 태호가 회장선거에 나갔다. 아침부터 때빼고 광내고... 할머니같다는 성일이의 놀림에도 2대8 머리 가지런히 하고 선거에 임했다. 친구들을 잘 도와주고, 아름다운 반을 만들고 싶다는 공약도 발표했다. 아까운 한 표 차이로 낙선. 여러 표 차이로 부회장도 낙선.

어떤 일에도 울지 않던 태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2학기에도 기회가 있다며 담임선생님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태호는 회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공약은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친구들이 태호를 도우며, 약자를 돕는 법을 알아가고 '나눔'이 퍼지는 아름다운 반이 될 날이 머지 않았으니 말이다.

씩씩한 태호와 미소천사 성일이
▲ MBC스페셜 <승가원 천사들> 씩씩한 태호와 미소천사 성일이
ⓒ 손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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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가 장애가 아닌 날

성일이를 비롯한 승가원 아이들 세 명이 태호에 이어 또 일반학교에 진학했다. '또'라고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난관이 많아 실제 장애아들이 일반학교에 진학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일반적으로 장애아가 일반학교 수업에 참여하는 데에 문제가 없으면 학교가 장애아를 거부할 수 없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지만, 장애아를 배려하지 않는 학교 시설이나 수업진행을 도와주는 특수 교육보조원의 부족, 인식 부족 등으로 학교를 다니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통계에 따르면 유치원을 비롯해 전체 초중고 장애 학생 6만 2천여 명(2006년 기준) 가운데 일반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63% 수준이다. 여전히 10명중 4명은 장애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교에 수업을 받고 있다. 반면, 미국은 장애 학생 가운데 95%가, 캐나다는 장애 학생이 100% 일반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독일에서 발도르프 교육을 배우고 돌아오고 <캠프힐에서 온 편지>를 쓴 김은영 씨가 양평에 연 특수 대안학교 '슈타이너학교'에서는 장애, 비장애 아동이 함께 공부한다. 하지만 비장애 아동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꺼려하는 학부모들이 많아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렵다고 전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 걸까. 정작 아이들이 배워야할 것을 피해버린 채 말이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승가원 천사들>은 우리가 나눈 장애, 비장애의 기준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는 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어쩌면 장애인의 날은 그것이 사라질때에 가장 큰 의미를 가지는 지도 모르겠다. 더이상 장애가 장애가 아닌 날이 오고, 장애가 장애물이 되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장애인의 날은 따로 지정할 필요가 없을테니 말이다.

물론,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는 매우 요원한 일로 보인다. 특히 4대강 삽질로 삭감된 장애인 관련 예산을 보면 더욱 암울해진다. (장애아 무상보육지원금 50억원 삭감, 장애인 차량지원비 116억원 삭감) 그래도 좌절하지는 않을란다. 태호가 가르쳐준 건 느리더라도 꾸준히 끝을 향해 엉덩이를 움직이며 나아가는 것이었으므로.


태그:#MBC스페셜, #승가원 천사들 , #태호, #성일이, #슈타이너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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