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민주당 후보자를 만나보면 하나 같이 명함에 '무상급식'을 새기고 다닙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을 쟁점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심상정 경기도지사 진보신당 예비후보는 "이번 지방선거가 무상급식 국민투표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광맥을 발견한 것처럼 무상급식에 매달리는 진보진영 후보를 보며 꾸역꾸역 불안한 마음이 올라옵니다.
무상급식이 쟁점화되면 어느 쪽에 유리할까요? 한 마디로 여야가 비기는 싸움이라고 봅니다. 즉, 역대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늘 승리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과적으로 야당에게 불리한 싸움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찬성하는 쟁점을 야당이 선점하는데 야당에게 불리하다니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구요?
무상급식 쟁점은 도덕적 쟁점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론의 지지가 높습니다. "어떻게 초등학생을 굶길 수가 있지?"하면서 마치 무상급식을 하지 않으면 다수의 학생이 굶게 되는 것처럼 정서적인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무상급식 예산을 전액 삭감한 경기도 의회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것처럼 감성적인 쟁점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감성적인 쟁점은 초기에는 폭발력을 갖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권자는 차분하게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왜 이 쟁점에 직접 뛰어들었을까요? 대통령이 한 마디 하면 어차피 찬성파와 반대파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양분될 것입니다. 하지만 중간층은 이 쟁점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됩니다. 한나라당이 조중동과 방송을 동원해서 무상급식은 교육예산을 비효율적으로 쓰게 된다며 그 예산을 다른 곳에 사용함으로써 더 나은 공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고 선전하기 시작하면 여론은 변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상급식 선거 쟁점화, 야당에게 유리할까이런 쟁점은 여론조사를 통해 어떤 입장이 유리할지 판가름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신이 확고한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여론조사에서는 무상급식에 찬성한다고 답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 쟁점이 유권자에게 도덕적인 쟁점으로 받아들여지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 쟁점에 대한 태도가 표로 연결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권자는 여론조사에서는 무상급식을 찬성한다고 답변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쟁점을 보고 투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쟁점은 전국민이 쉽게 합의할 수 있는 '합의쟁점'입니다. 선거에서 쟁점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은 균열쟁점이지 합의쟁점이 아닙니다. '균열쟁점'이라 함은 양진영이 목숨을 걸고 싸울 만큼 중요하면서도 국민들 사이에 지지가 양분되는 쟁점을 의미합니다. 유권자는 균열쟁점에 따라 투표하지 합의쟁점을 보고 투표하지는 않습니다. 균열쟁점은 유권자의 이해관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에 누가 쟁점을 어떻게 제시하고 설득하느냐에 따라 여론의 향배가 다르게 전개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진보진영이 무상급식을 주요 선거쟁점으로 의제화했을 때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진보진영이 무상급식에 올인하는 동안 한나라당은 그 예산을 사용해서 어떤 정책을 펼칠 것인지를 설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상급식 쟁점이 여론조사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표에서는 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면 진보진영은 무상급식 쟁점을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쟁점을 포기하는 순간, 핵심 지지층이 진보진영에 투표할 의욕도, 선거운동을 할 의욕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진보진영은 이 쟁점에 관한 한 절대 흔들리지 말고 무상급식 입장을 재천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쟁점에만 묻혀서 승부를 보려고 덤빈다면 낭패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선거 후에 여론조사에서는 우리가 이겼는데 왜 선거에서는 패배했을까 하며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무상급식으로 실질적인 이득을 보는 계층은 저소득층입니다. 조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한나라당에 연결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무상급식 하나만으로 투표행태를 바꿀 확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반면에 진보연대의 핵심 지지층이 될 수 있는 중산층(중상, 중하 포함)의 경우는 무상급식을 찬성한다 해도 도덕적인 이유에서 하는 것이지 급식비 자체가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계층은 좋은 교육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습니다. 자녀에게는 계층상승의 가능성을 물려주고 싶은 욕구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분당, 일산 등 신도시 중산층의 교육열은 강남을 능가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강남 학부모와는 달리 지난 교육감 선거에 대거 참여해서 김상곤 후보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이들이 교육감 선거에서 원하는 것은 질 좋은 교육이지 평등한 교육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 주경복은 패배하고 김상곤은 승리했나2008년, 2009년 서울과 경기도에서 치러진 교육감 선거에서 주경복 후보가 패배하고 김상곤 후보가 승리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서울 교육감 선거는 공정택 후보의 승리라기보다는 주경복 후보의 패배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주 후보가 전교조 교사의 지지를 받는다는 소문이 패배의 원인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공정택 후보에 대한 강남의 몰표는 공 후보에 대한 적극적 지지라기보다는 주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한 반대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에서 가장 설명력이 높은 이론은 '위협이론'입니다. 강남 엄마들 사이에선 교육감 선거 날 하루 종일 다급한 전화벨이 울렸다고 합니다. "주 후보가 당선되면 전교조 교사들이 우리아이들 교육을 모두 망칠 것"이라는....
강북에서는 주 후보에 대한 선호가 높았지만 낮은 투표율로 인하여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서민들의 투표율이 낮은 것은 선진국에서도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강북에서 이처럼 투표율이 낮았던 이유는 질 좋은 교육에 대한 욕구가 높은 중산층이 교사평가를 거부하는 주 후보에게 선뜻 표를 주지 못한 데 있었다고 봅니다.
반면에 김상곤 후보는 전교조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질 높은 교육을 위해 '교사평가 도입' '공립형 혁신학교' 등의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서울과 경기가 전체적인 후보군의 분포나 자질 면에서 선거구도가 달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촛불집회의 열기가 한창일 때 치러졌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주경복 후보의 패배는 뼈아픈 경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산층 학부모는 공교육을 살릴 정책을 원합니다. 단지 도덕적인 정책보다는 아이들이 사교육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원합니다. '일제고사 폐지' '학교의 무한책임' '교사평가' 공약은 그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중산층 학부모는 또한 자녀들에게 건강하고 좋은 먹거리가 제공되기를 원합니다. '무상급식'보다는 '유기농 친환경 급식' '직영급식' 등의 대안이 더 매력 있습니다.
이런 구도라면 진보진영이 굳이 무상급식을 주요 의제로 들고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도덕적인 합의쟁점보다는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균열쟁점을 들고 나와야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도에서 보수진영은 무상급식을 의제화함으로써 진보진영의 창의적 대안을 덮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낄 것입니다. 진보진영이 이런 싸움걸기에 전력을 다해 달려들면 오히려 손해입니다.
무상급식은 적과 칼싸움을 하러 나갈 때 비상시에 사용하려고 발목에 숨겨둔 단도정도로 생각해야 합니다. 반드시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하지만 꼭 사용할 필요는 없는 무기입니다. 이것을 싸움에서 휘두르게 될 보검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보검은 보다 튼튼하고 저들의 무기를 부러뜨릴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것을 골라야 합니다. 뜨거운 불속과 찬물을 오가며 단련된 것이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공약, 왜 유권자는 외면하나무상급식 쟁점화에 딴죽을 거는 이유는 올 6월 지방선거에 임하는 진보진영의 전체적인 선거구도와 전략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입니다. '진보연대'를 주장하는 쪽은 실천적인 전략보다는 도덕성이 앞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지를 확충하고 양극화를 해소하자,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자, 주택복지를 실시하자, 무상의료, 무상급식을 실시하자 등등...
이들의 주장을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대다수 국민들은 이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요? 심지어는 이런 정책의 직접적 수혜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저소득층마저도 이들을 외면할까요?
첫째는 실현가능성 때문입니다. 예산이 뒷받침 되지 않는 정책은 빌 '空'자 공약일 뿐입니다. 둘째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모든 문제를 사적 영역에서 해결해왔습니다. 실업도 친척, 가족에 의존해서 해결했지 정치영역에서 해결책을 찾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언론이 이런 정책을 좌파, 빨갱이로 몰아붙이면 유권자는 내용을 따져보기도 전에 일단 외면하곤 했습니다.
진보진영은 적어도 언론의 이념공세에 휘둘리지 않을 깨어있는 유권자를 상대로 정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미 진보진영의 확고한 지지자가 아니라 매선거마다 이쪽 저쪽을 오가며 정책을 보고 투표하는 유권자(swing voters)를 대상으로 선거공약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진영이 어떤 선거전략으로 임해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20세기적 진보의 가치와 21세기적 진보의 가치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도 나도 진보를 말하지만 진보의 내용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에서 흔히 언론이나 학자들이 말하는 진보는 서구의 20세기적 진보를 의미합니다. 경제적 분배를 둘러싼 균열에서 평등주의를 지향합니다. 민노당, 진보신당이나 노조, 전교조 등 전통적인 진보진영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은 민주당을 비롯한 개혁진영을 중심으로 한 연대를 '민주연대'라 칭하며 '민주 대 반민주'연대는 흘러간 옛노래라고 폄훼합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말할 때에는 21세기적 가치(문화적 민주주의, 환경, 생태, 평화공존 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진보세력의 핵심은 중산층, 화이트 칼라로서 분권과 자율을 지향하는 시민계층입니다 (20세기 진보와 21세기 진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노무현의 시민주권론'으로 cafe.naver.com/chomagic에 연재). 전교조는 20세기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획일적인 대안과 교육의 평등을 강조합니다. 중산층 유권자는 21세기적 가치를 지향합니다. 자율과 분권, 창의성과 자발성을 원합니다. 개인의 다양한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공교육을 강화하길 원합니다.
21세기 진보적 가치의 연대 되어야수구 기득권 세력을 이기기 위해서는 20세기 진보세력과 21세기 진보세력의 연대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진보세력의 의제에 끌려가는 연대는 필패구도를 만들 것입니다. 20세기 진보주의자들이 지금도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는 과거에는 너무 앞서갔기 때문이지만 요즘에는 너무 뒤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진보진영의 연대는 21세기 진보적 가치의 연대가 되어야 합니다.
21세기 진보연대를 위해 시민주권세력은 좌파 세력의 평등주의적 욕구를 보다 전향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그들과의 암묵적 동의와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상급식'처럼 좌파진영의 주요 의제에 합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선거운동을 펼쳤다가는 '주경복 후보'의 경우처럼 뼈아픈 실패를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진보진영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21세기적 진보 의제를 쟁점화함으로써 수구진영과의 경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진보연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중산층 여론과는 동떨어진 20세기 진보주의자들이어서 걱정이 앞섭니다. 우리사회에서 시민주권을 위한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복지, 교육, 정치 모든 것이 자율과 분권이라는 시민주권을 기본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21세기 진보이념입니다. 진보진영이 깨어있는 시민들의 욕구를 외면한다면 이번 선거에서도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진보진영이 완고한 신념의 우물에 갇히지 말고 냉철한 현실 분석에 기초한 승리전략으로 임하길 기대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cafe.naver.com/chomagic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