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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29살, 대학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고 있다. 스무 살 때 재수를 하고 또 휴학도 했었기 때문에 또래들보다 2년 정도 늦게 졸업하는 셈이다. 올 설에도 친척들의 주요 화제 중 하나는 이제서야 취업을 앞둔 내가 준비를 잘 하고 있는지에 관해서였다.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이 고마웠지만, 부담과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은 내 손으로 돈을 벌지 않는다는 이유로 몇몇 친척 어른들은 서른 살에 가까운 내게 용돈까지 주셨다. 사실 스무 살이 되어서부터는 적은 금액이라도 용돈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일찍 결혼했으면 벌써 아이도 생겼을 만한 나이에 그것도 '늙은 대학생'의 이름으로 용돈을 받는다는 것에 얼굴이 붉어졌다.

큰아버지가 주신 빳빳한 현금 5만 원

설날 아침, 제사와 세배를 마치자 큰아버지께서 은행 현금봉투에 빳빳한 현금 5만 원을 넣어서 내게 주셨다. 올해 64세인 큰아버지는 IMF 시절, 50대 초반에 회사에서 퇴직하셨다. 그리고 일찌감치 찾아온 가족 경제난 때문에 십여 년 동안 갖가지 새로운 일을 찾아 헤매셨다.

20년 넘게 사무실에서 입으시던 와이셔츠를 벗어던지셨다. 작업복을 입고 소규모 조립공장에서 일하셨고, 아파트 경비원 근무복을 입고 낮과 밤이 바뀐 생활도 하셨다. 물론 국민 모두가 어려운 시기였으니, 내 가족이라 더 아프고 힘들었을 거라고 할 순 없다. 다만 당시에 나는 십대 혹은 아르바이트도 해보지 않던 20대 초반의 나이여서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실감을 하지 못했기에 뒤늦게 죄송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 큰아버지는 일 년 전부터 '노인 일자리 사업'의 일환인 '아파트 택배'를 하고 계신다. 2007년에 보건복지부가 노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택배업체 4곳과 협약하여 실시한 사업이다. 60, 70대 노인이 택배회사로부터 자신들의 아파트 단지로 온 물건들을 받아서 집집마다 배달하는 것이다.

'물건 하나를 배달하면 500원이 나한테 떨어지는데, 생각보다 무거워서 힘들어. 70대 중반 쯤 되는 몇 분들은 오히려 관절에 무리가 가서 얼마 못 가 그만 두기도 했지.'

요즘 시대 60세는 '제2 인생의 시작' 이라는 말도 있다. 그들을 노인이라 칭하는 것 자체가 우습기도 하지만, 이도저도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6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그나마 용돈벌이를 할 수 있는 정책은 환영받을 일임이 분명하다. 

휴대전화 없다보니 초인종 눌러봐야 알 수 있어

택배 박스
 택배 박스
ⓒ 이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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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운동' 겸 한다는 택배 배송이 실제로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노인 한 명당 하루에 평균 30~40여개의 물품을 택배 회사로부터 받아서 아파트 집집마다 배송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일반 택배기사들과 달리, 회사에서 제공되는 휴대폰이 없다.

그래서 택배 수령인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려면 아파트 15층이건 20층이건 직접 물건을 들고 올라가서 초인종을 눌러봐야만 알 수 있다. 만약 집에 물건 수령자가 없으면 대문 앞에 메모지를 붙여 놓고, 다시 물건을 들고 내려와서 경비실에 맡겨야 한다. 시간과 체력이 두 배로 드는 것이다. 자신의 휴대폰을 이용해서 전화를 해보면 되지만, 하루에도 최소 40통 정도를 통화해야만 하는 요금을 어떻게 감당하랴?

또한 워낙 사회가 무섭다 보니, 택배기사를 위장한 강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을 열기를 꺼려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한번은 현관 초인종 스피커를 통해 문 앞에 물건을 두고 가라는 말대로 놓아두고 갔다가 나중에 택배 물건이 없어져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다행히도 분실된 물건이 관리실에서 발견되어 큰아버지가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아 일단락되었다.

110시간 노동에 평균 40만 원 수령

애당초 보건복지부에서는 하루 4시간 25일 즉, 100시간 일을 하면 50만 원을 벌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현재 하루에 평균 5시간씩 주 6일 일을 하신다. 그리고 한 달에 손에 쥐는 금액은 평균 40만원, 110~120시간 정도 일에 대한 대가다. 복지부 예상과는 달리 좀 더 힘든 노동 강도에 더 적은 급여다. 그럼에도 60~70대 노인들 중에서는 이 '노인 택배 사업'의 일자리라도 얻고 싶어 하는 수요자가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지만 올해 정부 예산안에서 노인일자리 예산이 작년에 비해 190억 원 삭감되었다. 그 예로 70대 이상 노인들에게 하루 서너 시간 폐휴지를 모았을 때 한달 20만 원씩 지급하던 일자리도 이제 곧 사라진다. '늘어나는 평균수명, 빨라지는 조기퇴직'도 서글픈데 '노인 아닌 노인'들이 그나마 용돈벌이를 할 수 있는 작은 기회마저 점점 그 폭이 줄고 있는 실정이다.

5만 원이라는 용돈은 어쩌면 친구 서너 명과 소주를 마시고 한턱 쐈다고 생색낼 수 있는 크지 않은 금액일 수 있다. 하지만 그 5만 원은 큰아버지가 3일 동안 100개의 택배 물건을 배송하고 얻은 땀방울의 결정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큰아버지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딸과 사위가 사는데 혹시나 택배 일을 하고 있는 자신 때문에 자식들이 부끄러워하진 않을지 걱정하신다. 그런 큰아버지를 보며, 그렇게라도 일할 수 있는 여지가 줄고 있는 이 사회를 보며, 5만 원을 쉽게 생각했던 내 자신을 보며, 설날 아침부터 한없이 부끄럽고 마음 아팠다.

덧붙이는 글 | '내 용돈을 돌려주세요' 응모글



태그:#퇴직, #노인일자리, #실버택배, #노인, #용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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