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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영 MBC 사장이 허수아비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물러난 뒤,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우리 선수들의 금메달 소식이 연이어 들린다. 2년 전 베이징 올림픽 때와 너무도 많이 닮아 있다. 1년 6개월 전인 2008년 8월, 나의 해임을 전후하여서도 베이징으로부터 금메달 소식이 잇따랐다.

박태환 선수가 10일 오전 베이징 국가아쿠아틱센터에서 열린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에서 우승한 뒤 은메달리스트 장린(중국·오른쪽)과 동메달리스트 라슨 젠슨(미국)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박태환 선수가 10일 오전 베이징 국가아쿠아틱센터에서 열린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에서 우승한 뒤 은메달리스트 장린(중국·오른쪽)과 동메달리스트 라슨 젠슨(미국)과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 베이징올림픽 조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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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나를 해임하기 바로 전날인 8월 10일, 박태환 선수가 수영 자유형 400m에서 첫 금메달을 딴 것을 비롯하여 해임되던 날인 8월 11일에는 남자 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얻어 올림픽 3연패를 했고, 사격에서 진종오 선수가 남자 권총 50m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박태환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 수석들이 만세를 부르는 사진이 보도되기도 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박태환 선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치하하기도 했다.

그 해 여름, 그리고 올 겨울, 올림픽 열기

촛불 집회가 한창이던 시절, 10% 대까지 추락했던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은 금메달 소식에 힘입어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2008년 8월 둘째 주에 나온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전주에 비해 6.9% 포인트가 상승한 30%였다. 다른 여론조사 기관에서 나오는 결과도 20% 후반대의 지지율을 보였다. "금메달 한 개 딸 때마다 대통령 지지율이 1-2%포인트씩 올라가는 것 같다"는 얘기가 청와대 비서관들 입에서 나왔다. 이렇듯 뜨겁게 휘몰아친 금메달 열풍에 많은 것들이 묻혀 지나갔다.

그 점을 노렸기에 감사원은 그토록 무리하게 감사를 진행했고, 검찰은 내가 해임되자마자 바로 체포했던 모양이다. 감사원이 얼마나 서둘렀는지는 <정연주의 증언 20>에서 밝힌 대로 본감사 후 나온 질문서 발부와 촉박한 답변 시한 그리고 무엇에 쫓긴 듯 서둘러 발표한 감사 결과를 보면 그 속내가 훤히 다 보인다.

2008년 6월 11일에 시작된 KBS에 대한 본감사는 7월 11일까지 한 달에 걸쳐 이뤄졌고, 나흘이 지난 7월 15일부터 1주일 동안 네 차례에 걸쳐 모두 32개 항에 대한 질문서가 날아왔다. 감사원 질문서는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검찰의 신문조서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

감사 결과 문제가 있다고 본 쟁점을 모아서 피감사 기관에 질문서를 보낸다. 피감사 기관의 처지에서 보면 해임, 고소, 고발 등의 중징계까지 가능한 엄중한 질문이기 때문에 시간에 쫓겨 처리할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서에 대한 답변 시한이 2~3일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3차 질문서가 발부된 7월 21일, 감사원은 전화로 나의 감사원 출석을 요구했고, 출석은 이틀 내, 출석 여부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 날 하라고 다그쳤다. 이후 KBS와 감사원 사이에는 나의 감사원 출두 문제를 놓고 밀고 당기는 신경전이 감사원 감사위원회에서 나의 해임 요구를 결정한 8월 5일 하루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전 글에서 밝힌 대로 감사원은 7월 28일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나의 감사원 출두를 요구했으며, 특히 네 번째 출두 요구는 최후통첩과 같은 것이었다. 7월 31일까지 출석하지 않을 경우 출석·답변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32개 질문서 중 아직 답변서가 제출되지 않은 21건에 대해서도 이틀 뒤까지 제출하지 않으면 답변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했다.

감사원, 정해진 목표 향해 질주

감사결과를 최종 결정하고 해임 요구 결의를 하기 바로 전날에도 감사원은 나의 출두를 요구했다. KBS와 감사원 사이에 이런 내용의 문서를 여러차례 주고 받았다. 목표와 시한은 다 정해놓은 채 감사원은 전력질주를 했다.
▲ 감사원이 2008.8.4 보낸 출석 요구서 감사결과를 최종 결정하고 해임 요구 결의를 하기 바로 전날에도 감사원은 나의 출두를 요구했다. KBS와 감사원 사이에 이런 내용의 문서를 여러차례 주고 받았다. 목표와 시한은 다 정해놓은 채 감사원은 전력질주를 했다.
ⓒ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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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충실한 답변을 하기 위해 답변 기한을 8월 5일까지 연기해줄 것과 사장의 출석·답변 문제는 답변서를 모두 검토한 후에 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를 다시 했다. 8월 1일, KBS는 이런 내용의 회신을 했다.

답변서 제출 촉구 및 출석 답변 요구에 대해 우리 공사에서는 충실한 자료 작성을 위해 제출기한을 8월 5일(화)까지 연기해주실 것과 사장의 출석 답변 문제는 답변서를 받아 본 후 검토해 주실 것을 요청드린 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 답변서 작성을 조속히 마무리짓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답변서가 완료되는 즉시 제출하고자 하오니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장은 사내외 현안과  베이징 올림픽 출장(8월 6일 - 8월 10일 예정) 관계로 귀 원의 출석 답변 요구에 응하기 어려울 것으로 사료됩니다. 따라서 공사의 답변서 내용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후 사장의 출석 여부에 대해 다시 검토해줄 것을 정중히 요청드립니다.

목표와 시한을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상식적인 요구를 거절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더욱이 당시 나는 중국 광파전시국(신문과 방송 전반을 다루는 정부 부처. 한국의 문광부에 해당)에 의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공식 초청되었고, 특히 올림픽 개막식이 있는 8월 8일에는 중국 주석이 주최하는 오찬과, 광파전시국 장관 주최 만찬에도 공식 초청되어 있었다. 중국 광파전시국 왕태화 장관과 수년 동안 쌓아 온 우호관계로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으로 보였다.

나보다 한 살 위인 왕태화 장관과는 KBS의 위성채널인 KBS WORLD의 중국 진출을 위해 여러 번 만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인간적인 우애도 깊어지고, 서로를 이해하는 폭도 넓어지게 된 사이였다(KBS WORLD의 중국 진출을 위해 참 많은 공을 들였고, 많은 KBS 직원들이 고생을 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특보를 지낸 지금 KBS 사장 김인규 씨가 KBS 이사로 있을 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불공정 계약'이라며 그렇게 심하게 반대를 했다. 당시 KBS 노조도 한 패가 되어 몹쓸 짓을 많이 했다).

이런 공식 행사가 아니더라도 올림픽 중계방송을 위해 200명 이상의 제작진이 밤잠 설치면서 땀을 흘리는 취재 제작진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다녀와야 할  처지였다. 8월 1일 감사원에 보낸 회신에서 밝힌 베이징 출장은 바로 이런 내용의 것이었다.

검찰은 출국 금지, 감사원은 해임 요구

베이징 출장은 검찰이 8월 4일, 나에 대해 출국 금지조처를 내려버림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외교적 결례가 될 수도 있음직한 그런 무리한 조치까지 내린 이유는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행여 중국 주석이 주최하는 오찬 자리에 이명박 대통령과 내가 함께 자리하는 것이 기분 나쁜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그동안 조중동 등의 홍보권력을 통해 심어놓은 '배임죄의 중죄인'이 함부로 나돌아 다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나에 대한 해임이 임박했으니, 공식 오찬, 만찬 자리에 참석하는 게 정권 차원에서 볼 때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8월 8일 개막식 당일에 나는 KBS 이사회에서 해임 권고를 의결했으니, 그때 정권 핵심에서는 나의 해임이 임박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터다.

어쨌거나 8월 1일에 보낸 KBS의 회신에 대한 감사원의 답이 8월 4일(월)에 왔다.  오전 11시에 팩스로 왔다. 그 내용이 걸작이었다. 나에게 오후 2시까지 감사원에 출석하여 답변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제출하지 못한 3개의 답변서도 그 날 중으로 답변서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출석 요구서를 받고 다음과 같은 답변서를 보냈다.

사장의 출석 답변 문제에 대한 귀 원의 요구사항을 보면 다양한 사안에 걸쳐 방대한 내용의 조사를 하겠다는 취지로 사료되는 바, 우선 각 사안에 대해 구체적인 질의내용을 보내 주시면 자료들을 다 확인하여 서면으로 1차 답변을 하겠습니다.

사장 출석은 누차 답변한 바와 같이 전례가 없었던 사안이고, 더욱이 당일 11시 경에 팩스로 문서를 보내 당일 14:00까지 출석하라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무리하고 부적절한 요구라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당 공사는 귀원에서 각 답변서 내용 중 구체적 소명이 필요한 세부 질의사항을 명기하여 다시 보내 주실 것을 거듭 요청 드립니다. 당 공사는 이에 대한 성실한 서면답변을 드릴 것이며, 사장의 출석 여부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해 주길 바랍니다.

감사원이 나의 출석을 그렇게 다그친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KBS의 설명은 이미 본조사 과정에서, 그리고 감사원 질문서에 대한 KBS의 답변서를 통해 대부분 이뤄졌으며, 내가 출석한들 답변 내용은 사실 뻔한 것이었다. 어쩌면 당시 감사원은 이명박 정권에 검찰과 충성 경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검찰에서 정연주 사장을 계속 소환하고 있으니, 감사원도 그런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정권 쪽에 보여주고 싶었을 터이니까.

감사원은 오전 11시에 팩스를 통해  오후 2시까지 나의 출두를 요구했다. KBS의 답변 내용이다. 이게 마지막 회신이었는데, 그리고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해임되었다. 권력기관이 총동원된 일사분란한 해임작전이었다.
▲ 감사원 출두요구에 대한 KBS의 마지막 회신 감사원은 오전 11시에 팩스를 통해 오후 2시까지 나의 출두를 요구했다. KBS의 답변 내용이다. 이게 마지막 회신이었는데, 그리고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해임되었다. 권력기관이 총동원된 일사분란한 해임작전이었다.
ⓒ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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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개된 일들은 나의 출석 답변 요구가 얼마나 형식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바로 전날까지 사장의 답을 들을 필요가 있다며 오후 2시까지 출두하라 해놓고는, 실제로 나한테서 아무런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다음날 감사원은 감사위원회 열어 감사 내용과 해임 건의를 의결하고,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KBS의 답변서 내용이 무엇이건, 사장이 뭐라 설명을 하건, 아무 상관없이 이미 정해놓은 목표(해임 요구)와 시한(올림픽 개막 전)에 따라 밀어붙였던 것이다.

마침내 나에 대한 해임 요구와 관련된 감사원의 마지막 절차인 감사위원회가 8월 5일 아침 9시 반, 서울 삼청동 감사원 청사 본관 3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오후 늦게까지 열린 이날 감사위원회에는 김종신 감사원장 직무대행과 이석형, 박종구, 하복동, 김용민, 박성득 감사위원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가 끝난 뒤 '감사원 관계자'의 입을 통해 "정연주 사장의 개인 비리는 없지만, 최근 5년간 누적적자가 1500억 원에 달하고, 인사권을 남용한 점에 대해 큰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여 정 사장의 해임을 요구하기로 했다"는 결정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감사위원회, 당초 일정보다 앞당겨 개최

그런데 8월 5일에 열린 감사위원회는 당초 예정보다 앞당겨 열린 것으로 알려졌다. 감사위원들의 휴가 일정 등을 이유로 들기는 했지만, 당초 예정보다 이틀 앞당겨 감사위원회가 개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8월 4일 오후 2시까지 감사원에 나와서 답을 하라고 했던 그 시점에 이미 다음날 감사위원회 개최는 결정되어 있었고, 그 즈음 검찰에서는 나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친 한나라당 인사들이 다수를 점한 KBS 이사회는 감사원의 해임 요구에 이어 해임 제청을 하기 위해 8월 8일, 이사회 소집을 예정하고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에 맞춰 나의 목을 단두대에 올리기 위한 작전은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이렇게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태그:#정연주, #KBS, #감사원, #MBC, #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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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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