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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만화책에 담는 삶과 슬기

 

웬만한 일본 만화책은 으레 서른 권쯤은 이어 그립니다. 일본 만화 가운데 스무 권 넘게 이어그리지 않으면 '긴 만화'라 할 수 없습니다. 만화를 길게 그려야 제대로 된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만화를 그리든 사진을 찍든 글을 쓰든, 우리들은 우리가 붙잡은 이야기 하나를 놓고 우리 온삶을 다 바쳐 백 권이든 이백 권이든 쏟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붙잡아서 펼쳐 보이려고 하는 이야기'에는 깊고 넓으며 웃고 울리는 숱한 삶자락이 담겨 있을 테니까요. 이 삶자락을 한 올 두 올 풀어내노라면 어느새 100권이 되고 어느 결에 200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박경리 님 <토지>나 조정래 님 <한강> 같은 작품이 '긴 소설'이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냥 '소설'이라고 느낍니다. <아빠는 요리사> 같은 만화는 벌써 백 권을 넘기고 있는데 끝날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 나라안에 알려지고 읽힐 때에는 '불법 폭력 불건전'이라는 딱지를 온통 달아야 했던 <드래곤볼>은 벌써 여러 해 앞서부터 '정식 번역'이 될 뿐 아니라 만화 즐김이들 사이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며 추천을 받기까지 합니다. 지난날 이 만화를 나쁘게 이야기하고 아이들한테서 빼앗았을 뿐 아니라 불태우기까지 한 분들은 오늘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고작(?) 세 권으로 끝난 일본 만화 <토우마>(서울문화사,2009)를 읽었습니다. 3권째를 보면서 '벌써 끝나는가? 이렇게 일찍 끝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토우마>라고 하는 만화에서 붙잡은 이야기로는 열 권이나 스무 권뿐 아니라 서른 권이나 마흔 권도 넉넉히 이어갈 수 있으리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권으로 마무리되는 만화책 <토우마> 맨 마지막 말을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습니다. "네? 감사장요? 수사에 협력해 줘서 표창한다고요. 저어, 어느 오오카미 토우마 씨에게 전화 거신 건가요? 우리 사무실의 오오카미 토우마는 자연을 사랑하는, 표창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그런 가이드입니다(182쪽)."

 

책을 좋아한다는 분들 가운데 일본 만화를 즐겨 보는 분이 생각 밖으로 퍽 적습니다. 책을 사랑한다는 분들 가운데 만화책을 좋아한다고 밝히는 분이 참으로 드뭅니다. 책을 이야기하는 분들 가운데 만화책 평론을 깊이있게 다루는 분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책을 좋아한다면서 책을 좋아하는 테두리가 더없이 좁다고 하겠습니다. 책을 사랑한다면서 책을 껴안는 품이 너무 어설프다고 하겠습니다. 책을 이야기한다면서 책을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 차갑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린 날부터 만화를 만화답게 받아들이도록 배운 적이 없습니다. 집에서고 학교에서고 '만화는 책이 아니다' 하고 배워야 합니다. 어버이들 가운데 누가 '어른이 된 다음'에도 만화를 즐겨 읽으면서 좋고 곱고 멋진 만화를 가슴에 새기는가요. 교사라는 자리에 선 어른 가운데 아이들한테 읽힐 좋고 곱고 멋진 만화를 당신들 돈을 털어 사 읽고 곰삭이는 이는 얼마나 되는가요. <오타쿠의 따님>이라는 만화를 보며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읽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다들 '저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할 듯합니다.

 

 

 ㄴ. 책 하나에 담는 땀

 

전라남도 장흥에서 살고 있는 마동욱 님이 십만 원에 이르는 사진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사진책 이름은 <정남진의 빛과 그림자>(호영)입니다. 당신 고향마을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고 싶어서 수십만 장 찍은 사진을 고르고 추려 내놓은 두툼한 선물입니다. 온몸으로 부대끼고 두 눈으로 살펴보며 마음으로 삭여낸 삶자락이 깊고 넓다 보니 수십만 장이라는 사진을 찍고도 모자라, 앞으로도 새롭게 수십만 장에 이르는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저는 수십만 장까지는 아니지만, 제 고향동네인 인천 골목길을 해마다 만 장 남짓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이 만 장이 넘어가면, 요 한 해치 사진 만 장을 갈무리하는 데에만 여러 날이 걸립니다. 아니, 한 번씩 죽 돌아보고 추리는 데에만 보름은 걸리고, 애써 추린 사진을 갈래에 따라 나눈다든지 하자면 한 달이 훌쩍 넘어가며, 갈래에 따라 나눈 사진 가운데 어느 녀석을 얼마만한 크기로 다루어 엮느냐를 살피자면 또 한참 걸립니다. 사진 하나로 담을 때부터 오래오래 품을 들이기 마련인데, 작품으로 빚었다 할지라도 낱낱이 있는 사진을 '이야기 있는 꾸러미'로 묶자니, 사진기를 들고 골목마실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더 오랜 품을 들여야 하곤 합니다. 그러고 보면,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연극이든 영화이든 …… 나 스스로 미처 즐기거나 누리지 못하는 열매가 더없이 많을 수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동무와 이웃한테 보여주거나 나누는 열매 또한 아주 작을 수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열매를 일구고자 애써야 하는 사람이지만, 힘껏 거두어들인 열매 또한 바지런히 맛보면서 나누어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아주 흔히 하는 말인데, '나누며 따뜻한 사랑은 그리 크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내 주머니에서 아주 조금만 덜어도 이 작은 돈푼으로 무척 넉넉히 나누는 사랑이 된다고 합니다. 나로서는 아주 조금이라 할지라도, 열 사람 숟가락이 모이면 밥 한 그릇이 되니까요. 한 사람 숟가락으로 열 사람을 먹여살리는 밥그릇이 아니라, 열 사람 숟가락으로 한 사람을 먹여살리는 밥그릇이 되면 즐겁습니다. 내가 내 이웃하고 무언가를 나눈다고 할 때에는 '내가 대단한 부자라서 나누는' 셈이 아니니까요. 내가 그지없이 가난하기 때문에 나눌 수 있으니까요. 내가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기 때문에 나보다 벅차거나 버거운 이웃을 알아봅니다. 내가 힘들고 고단한 탓에 나보다 힘들고 고단한 동무를 알아챕니다. 내 마음밭이 얕거나 어수룩하다고 느끼기에 즐거이 새로운 책을 장만하여 새롭게 곰삭이며 읽습니다. 내 배움이 짧거나 모자라다고 느끼기에 기쁘게 책방마실을 하며, 만 권이든 십만 권이든 아직 머나먼 책읽기일 뿐임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지난 2004년에 우리 말로 나온 <환경 가계부>를 아주 흐뭇하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어느새 판이 끊어졌습니다. 둘레에 선물하고 싶어도 사 줄 수 없습니다. 헌책방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옆지기는 이 책을 살며시 넘겨 보더니 묻습니다. "일본사람이 쓴 책이에요?" "응? 왜?" "이런 책은 꼭 일본책이더라구요." 뒤통수가 뜨끔합니다. 그러고 보니 <즐거운 불편>도 일본책, <백성 백작>도 일본책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태그:#책읽기, #책삶, #책이야기, #만화책, #삶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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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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