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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로 그 방관자들이 아니었던가.  이런 무관심이야말로 민주사회와 사회공동체를 허물어뜨리는 병적 존재이다. 무관심은 독재가 번성하고 고문이 번지는 토양이다.

- 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1권 521p, 역사비평사, 2006년 10월

 

어느 날 동네 대형마트에 갔을 때 일이다. 평소라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복잡한 세계를 자연스럽게 이용했을 건데 오늘은 달랐다. 문 앞에 떡하니 붙어있는 금지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것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드나들었던 대형 마트. 돈만 있으면 왕 대접 받으면서 모든 걸 다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거 같이 느꼈던 대형 마트다. 그런데 그 입구에 붙은 안내문은 거기서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매장 안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 바퀴가 달린 신발을 신고 다니면 안 된다.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 애완동물을 데려오면 안 된다. 상품을 담는 카트에는 사람이 타면 안 된다.  매달려서도 안 된다. 앞 사람 카트와 간격은 50cm 이하가 되면 안 된다. 의외로 안 된다는 말이 엄청 많다. 그럼 마트 안에서 '되는' 건 뭘까? 이건 쉽게 생각하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이야기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마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뿐이다. 돈을 내고 물건을 사서 조용히 나가는 거다.

 

이런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충격은 더욱 커졌다. 나는 다음 날부터 길을 다닐 때 이런 금지 표시가 되어있는 장소가 있는지 잘 살펴보기로 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내 주위에는 금지 표시가 많았다. 길거리에는 담배꽁초를 버리면 안 되고 버스 승강장에서는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 지하철을 이용할 때는 문에 옷이나 가방이 끼지 않도록 해야 하며 문이 닫힐 때 억지로 타면 안 된다. 전동차 문에 기대서면 안 된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때는 노란 선 안에 타서 핸드레일을 꼭 잡아야 한다. 전동차 안에서 큰소리로 전화를 받거나 음악, DMB를 보는 건 안 된다. 기타 등등. 도저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 말아야 할 금기가 많다.

 

조지 오웰의 <1984>나 러시아 작가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이 쓴 <우리들> 같은 소설을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한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반대다. 즉, 이 소설에 나오는 배경은 유토피아와 정 반대되는 세계다. 사실 '유토피아 소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완벽한 세계는 아마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공상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상을 해봐도 도저히 인간이 사는 이 세계는 전혀 아름답게 변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글로 쓰면 소설이 되지 않는다. 소설로 쓴다면 아주 유치한 내용이 될 것이 뻔하다. 대신 세상을 살기 좋게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여러 가지 사회학 책으로 나온다. 유토피아는 소설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이자 목표인 것이다.

 

이런 디스토피아 소설 속 배경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사회는 '통제'와 '금기'가 많다는 거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은 개성을 잃고 획일적인 삶을 산다. 예를 들면 구성원들 모두가 똑같이 회색 유니폼을 입고 살아간다든지, 머리스타일은 하나같이 박박 민머리라든지 하는 설정이 그것이다. 인간들은 먼 옛날 공동생활을 시작하면서 규칙을 만들었다. 구성원 수가 많아질수록 이 규칙은 많아지고 복잡해진다.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백히 나누고 이것을 어겼을 경우 벌을 받는다.

 

앞에서 예를 든 두 소설 외에도 디스토피아 세계를 다루는 작품에는 이렇게 수많은 금기 사항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회 중심에 있는 권력자들은 이렇게 복잡한 금기 사항들을 사람들이 잘 지키는지 감시해야 하는 필요를 느낀다. <1984>에 나오는 최고 권력자 '빅브라더(Big Brother)'는 곳곳에 감시 카메라와 감청장비를 둠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사회를 얼마만큼 잘 통제하고 있는지는 그 사회가 얼마나 완벽한 유토피아인지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 사회 구성원들은(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어쩌면 그렇게 꽉 막히게 통제된 사회에서 다들 잘 살고 있는 걸까? 나 같으면 그렇게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라면 단 1분도 못 견디고 미쳐버렸을 거다. 누군가, 어딘가에서, 항상 나를 감시하고 있으며 내 얘기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몸서리가 쳐진다. 이건 분명히 나만 특별히 가진 생각이 아닐 거다. 왜 그들은 통제된 사회에 살게 되었을까? 원인은 아주 간단한 곳에 있다. 그런 사회는 오랜 시간동안 아주 천천히 사람들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100년 전에는 골목길에 감시 카메라가 1개 있었지만 1년에 한 개, 혹은 두 개씩 조금씩 늘린다. 사람들은 살기에 바쁘고 그만큼 느린 변화에는 둔감하기 때문에 이렇게 야금야금 변하는 걸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감기에만 걸려도 감옥에 갇히던 시절이 있었다

 

미셸 푸코는 사회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또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통제를 해왔는지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그가 쓴 책 <감시와 처벌>을 보면 중세시대 이전부터 권력자들이 그들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전략을 썼는지 잘 나와 있다. 그는 또 <광기의 역사>와 <비정상인들>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구성원들을 획일적으로 바꾸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세세하게 분석했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사회는(권력자들은) 구성원을 일단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어 분열시킨다. 여기서부터 작은 기준을 마련해둔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 말이다. 아주 오래전,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이 없던 시절 유럽에서는 사람이 단순히 감기에만 걸려도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 감옥에 가두었다고 하니 놀랍고도 무서운 사실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 대신 더욱 고도화된 분류 방식으로 사람들을 나누어 관리한다. 그건 바로 행동에 대한 기준이다.

 

아주 옛날부터 사회는 규범으로 관리되어왔다. 쉽게 말해 모두 다 같이 행복하게 사는 집단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규칙을 정해놓은 것이다. 구약시대 성경을 보면 '십계명'이라는 규율이 나온다. 이것은 신에 대한 규율에서 이웃에 대한 것까지 큰 의미로 나눈 열 가지 법이다. 공동체 구성원 중에 누군가가 이것을 어기면 권력자들은 그를 격리시킨다. 감옥 같은 곳에 가두는 경우도 있지만 죽임으로써 공동체와 영원히 격리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인류는 수 천 년, 아니 수 만 년 전부터 이런 규범들에 조금씩 익숙해진 것이다. 규범을 잘 지키면 공동체 안에서 편히 살 수 있고 어기면 벌을 받는 단순한 논리가 사람들을 서서히 획일화시켰다.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박원순 씨가 쓴 책 <야만시대의 기록>은 미셸 푸코처럼 굳이 세계적인 역사를 학문의 틀에 맞춰 들추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근대 역사를 통해 이 나라 권력자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구성원을 통제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잔인함과 공포를 넘어서 미친 역사의 기록이다. 권력자들은 사회를 통제하기 위한 잣대를 갖고 있다. 이것은 처음에는 동기가 아주 순수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권력자들은 공동체를 위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독재자가 나타나 통제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했다. 폭력은 사회를 통제하는 방법으로는 가장 쉽고 확실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몇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폭력으로 통제되는 사회가 오히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지지를 받기도 했다. 자발적인 복종이 일어나는 것이다. 

 

히틀러는 폭력으로 유태인을 통제했지만 자국민들에게는 '우월한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하여 절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넘어설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폭력 앞에서 사회 구성원은 통제 당하는 것에 더욱 끌린다. '포기하면 편해진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통제와 싸우기보다는 이것을 '질서'라는 이름으로 합리화시키며 자기감정을 공동체와 같도록 만들어갔다. 이 과정은 너무도 오랜 시간동안 느리게 진행되었기에 사람들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당장 이런 생각을 갖고 길을 나서보라.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서도 통제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학교 앞에서는 불량식품을 팔면 안 된다는 표지판이 있다. 그 옆에는 역시 학교 앞이기 때문에 경적을 울리면 안 된다는 교통 표지판이 있다. 고개를 돌려서 위를 쳐다보면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감시카메라가 있다. 이것은 누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지 감시하는 것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동차가 불법으로 주차를 하는지 살피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 생활 중에 있는 극히 적은 통제 수단에 불과하다. 이건 아주 합리적인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가 개인을 통제한다는 건 어떤 이유에서든지 불편한 감정을 준다. 말했다시피 우리는 그저 오랫동안 이 불편함에 아주 조금씩 익숙해졌을 뿐이다. 

 

사실 권력자들은 구성원들을 통제할 권리가 없다. 인간은 인간을 통제하면 안 된다. 통제 당해도 안 된다. 커다란 느티나무가 그 아래 자라는 민들레를 통제하지 않는다. 숲속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자기 몸에 붙어사는 이끼와 버섯을 통제하지 않는다. 이는 자연계 어디에서나 똑같다. 심지어 사자나 호랑이처럼 육식을 하는 동물들도 자기가 먹어치우는 동물들을 통제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사실 자유롭게 어울려 살고 있는 것 뿐이다. 이 지구상에서 누가 누구를 통제하거나 금기 사항을 만들어 놓고 지키게 하는 존재는 오직 인간들뿐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자연까지 통제하려고 든다. 갯벌을 퍼내어 거기에 마른 땅을 만든다. 강물을 막고 구조물을 설치해서 강 양쪽에 자전거 도로를 만든다. 사람들은 모든 것에 권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 이제 그 권력의 범위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넓히려고 한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가 유토피아는 아닌데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통제와 금기사항으로 넘쳐난다.  대형 마트나 지하철뿐이 아니다. 학교, 병원, 공원, 비행기, 버스 등 - 어디를 가든지 금기사항은 있기 마련이다. 과연 세상은 얼마나 더 발전할까? 발전과 동시에 통제 또한 늘어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이 발전하면 더 아름답고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또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한다. 누구도 이 세상이 나쁜 쪽으로 발전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굉장히 이율배반적이다. 아름다운 세상은 통제와 금기가 넘치는 곳이 아니라 자유롭게 어울리는 모습니다. 

 

통제를 하는 가장 근본 이유는 사람들이 욕심이란 걸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욕심이 없다면 무엇을 통제하거나 금기를 만들어 놓을 필요가 없다. 애초에 자연의 일부였던 우리들이다. 욕심 없이 아름답게 어울려 사는 법을 터득한 자연에게서 겸손하게 배울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세상 만든 것에 관심을 가지는 일부터가 먼저다. 살기에 바쁘고 힘들지만,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병이다. 사람 몸으로 치면 암 덩어리다. 아름다운 세상을 원한다면 두 눈 부릅뜨고 이 사회를 쳐다봐야 한다. 멀리서 보지 말고 가까이서 자세히 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좋은 세상을 향한 꿈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이 글을 쓴 윤성근은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인터넷에 집이 있습니다. http://www.2sangbook.com


태그:#통제, #금지,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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