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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미학연구소장 성낙주씨가 사진전을 찾은 사람들에게 '석굴암 백년의 빛'을 설명하고 있다.
석굴암미학연구소장 성낙주씨가 사진전을 찾은 사람들에게 '석굴암 백년의 빛'을 설명하고 있다. ⓒ 김현자

1962년에 국보 제24호로 지정, 1995년 12월에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된 석굴암(문화재지정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이다)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석굴사원으로 우리 건축사상 최고 걸작품이라고 한다. 천년의 영광을 지닌 석굴암은 그러나 가까운 100년 전에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 '석굴암 백년의 빛'(2009.12.1~2010. 2.11)은 석굴암 천년의 영광과 100년 전의 아픔들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며 어떻게 보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귀한 사진전이다. 석굴암이란 단일 주제로 국내에서 열리는 가장 큰 전시회이기도 하다.

▲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석굴암 백년의 빛 (2009.12.1~2010.2.11)
ⓒ 동국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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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영상은 '석굴암의 종교적·예술적인 측면을 새롭게 조명하고, 보존과 그 가치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공유하고자'의 취지로 전시를 기획한 동국대학교 출판부와 불교중앙박물관이 <오마이뉴스> 독자들을 위해 제공한 것이다. 일제의 보수공사와 훼손,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과 1960년대의 보수공사 등 지난 100년 석굴암의 빛과 그늘을 담고 있다.

석굴암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09년 4월 말,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 일행이 석굴암을 찾으면서부터이다. 일제는 을사늑약(1905년) 직후 이 땅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소네는 통감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귀국한 이토 히로부미를 대신하여 통감직을 대행하고 있었다.

소네 일행이 석굴암을 찾은 당시 촬영한 사진 2점이 현재까지 알려진 국내 최초 석굴암 사진이라고 한다. 검은 제복을 입고 본존불 무릎에 도도하게 앉아 있는 사람을 비롯한 무리들은 정복자의 그것으로 보인다. 여하간, 이 사진 두 장에는 당시 석굴암의 처참한 몰골과 일제의 우리나라 및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흑심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석굴암 관련 각종 홍보물들
석굴암 관련 각종 홍보물들 ⓒ 김현자

 일본의 입장에서 제작되어 동서가 바뀐 경주전도로 석굴암과 불국사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으며 일본해가 표기되어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제작되어 동서가 바뀐 경주전도로 석굴암과 불국사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으며 일본해가 표기되어 있다 ⓒ 김현자

 1909년 당시 일제가 일본순사 등과 같은 하급관리부터 고위 간부까지 반드시 지참케 한, 우리나라의 지역과 문화재 등의 정보가 수록된 검은 수첩
1909년 당시 일제가 일본순사 등과 같은 하급관리부터 고위 간부까지 반드시 지참케 한, 우리나라의 지역과 문화재 등의 정보가 수록된 검은 수첩 ⓒ 김현자

전시회에서 만난 한권의 작은 수첩. 소네 부통감이 석굴암을 다녀간 해인 1909년 당시, 일본 순사를 비롯하여 한국에 있는 모든 일제 관리들에게 반드시 지참하게 했던 것이란다. 이 수첩에는 우리나라 각 지역과 문화재 정보 등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고. 우리가 손을 놓고 있을 때 일본의 하급 관리들조차 우리를 집어삼킬 만반의 준비를 했던 것이다.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8월, 석실법당 전체를 해체하여 경성으로 반출하라는 지침이 통감부로부터 경주 주재 일인 관리에게 하달된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석굴암을 하나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는 명백한 증좌인데, 다행히 통감부에서 총독부로의 직제개편이라는 복잡한 정세와 현지 일본인 관리의 항거성 태업 등이 맞물려 사업 자체가 흐지부지 되고 만다. 조섬병탄의 성공으로 자신들의 소유가 명백해진 상황에서 조선인의 민심을 자극하면서까지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정치적 판단도 주효했을 것이다." - 석굴암미학연구소장 성낙주의 <석굴암 백년의 빛> 중에서

소네 부통감이 다녀간 후 석굴암이 일본에 본격적으로 알려지면서 석굴암을 찾는 발길들이 더욱 잦아진다. 그리고 잠시, 이처럼 일본으로 통째로 옮겨질 위기에 몰리기까지 한다.

이후 초대 총독인 '테라우치 마시타케'가 1912년에 석굴암을 탐방한다. 그 후 본격적인 보수공사가 논의된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에 3차례의 보수공사가 이루어진다. 석굴암은 이때 창건 후 처음으로 해체된다. 그리고 시멘트 두겁이 덮이는 등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 일제에 의해 석굴암은 성스러운 불교성전에서 거대한 무덤으로 변하고 만다.

"식민 개척 초기에 산적한 난제들을 젖혀놓고 총독부가 석굴암 수선에 나선 배경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붕괴될 경우 혹여 있을지 모를 조선인들의 동요도 고려했겠지만, 첫번째로는 식민통치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과시하고, 자신들이 조선반도의 유일한 주인임을 천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을 것이다.…(중략) 그러므로 보수공사가 끝난 후 총독부가 '새롭게 탄생한 석굴암'을 어떻게 활용했는지는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다. 청나라나 러시아로 떨어졌을 조선을 자신들이 구해주었다는 식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그냥 방치했다면 수개월 내에 붕괴되고 말았을 석굴암을 자신들이 거금을 투입해 중창했다는 식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석굴암은 조선반도에서 약탈한 최상급의 전리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생생한 증거가 1910년대 보수공사 와중에 석굴암에서도 상징성이 큰 천개석에 새겨놓은 '일본(日本)'이라는 두 글자이다." - 성낙주의 <석굴암 백년의 빛> 중에서

일제의 1차 수리공사 때에 자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굴암 천정석의 '日本'이라 새겨진 낙서. 이는 석굴암이 대일본제국의 소유물이라는 저주의 문신과 같은 낙인이다. 최상의 전리품이니 천황폐하에게 바치는 봉헌물이란 뜻으로 새겼을 것이다. 일제는 패망으로 물러날 때까지 석굴암을 전리품이라는 시각에 맞춰 관리하고 통제한다.

이런 석굴암을 우리 손으로 응급처치나마 한 것은 1950년대. 그러나 일제가 하던 대로 증기세척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사진전에서 만난, 1951년에 촬영된 '본존불의 어깨와 흉부에 흘러내린 새똥이 말라붙어있고 이끼와 곰팡이, 먼지 등으로 까맣게 오염되어 있는' 사진 한 장은 지난날 석굴암을 외면한 우리의 무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했다.

석굴암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된 것은 1960년대이다. 문화재관리국의 주도로 전실에 전통목조전각을 건립하고 일제가 씌운 시멘트 두겁 위에 제2의 시멘트 두겁을 씌움으로써 비와 바람·날짐승·습기 등으로부터 석굴암을 보호하게 된다. 또한 일제가 입구에 설치한 시멘트 옹벽을 철거하거나 일제가 보수공사 때 해체함으로써 제자리를 잃은 금시조 등의 제자리를 찾는 등의 조치로 석굴암은 본연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된다.

석굴암이 다시 아프다. 왜?

 지난 천여년보다 근대 반세기에 더욱 아픈 상처를 입은 석굴암
지난 천여년보다 근대 반세기에 더욱 아픈 상처를 입은 석굴암 ⓒ 김현자


 석굴암 원형 추적에 단서가 되는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
석굴암 원형 추적에 단서가 되는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 ⓒ 김현자

1960년대의 보수공사로 그나마 안정을 찾은 석굴암이 다시 시끄럽다. 일부 문화재전문가들과 사학자들이 오래전부터 석굴암 원형 논란을 계속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말한다. 일제가 덧씌운 시멘트 두겁을 철거하고 전실에 설치한 목조 전각을 헐어내는 등으로 석굴암 원형을 복원하자고.

석굴암은 해안과 인접, 해발 565m에 조성된 석굴사원이다. 1960년대 복원 무렵의 토함산 기상자료에 따르면 '안개는 123일간 끼었고, 비는 134일, 눈은 40일 내렸으며 결빙일수는 110일'로 온전한 날이 그다지 많지 않다. 이런 기상조건이라면 전각이든 유리각이든 설치해 조각상들을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미 설치된 전각을 헐어내자는 것이다.

전시회에는 조선말인 1891년의 보수공사가 기록된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이 전시되고 있었다. '짧고 긴 서까래' '도끼질이며 톱질이요' '대들보' 등과 같은 부분들이 보였다. 석굴암에 목조 건축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그렇다면 일부 학자들이나 문화재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석굴암의 원형(일제의 보수 직전)과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일제가 씌운 시멘트를 철거함으로써 일제가 보수하기 전으로 되돌리잖다. 원래 없었던 시멘트이니 당연히 철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석굴암에 조금의 충격도 주지 않고 어떻게 시멘트를 철거할 수 있다는 건지. 한편의 사람들은 충격이 가해질 경우 조각상들이 상처를 입으니 시멘트의 수명이 약해질 때를 기다려 철거하자고도 한다.

사진전 소식에 중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처음 만난 석굴암을 추억하며 가볍게 다녀오자 갔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석굴암 사진전에서 2시간 넘게 서성거리며 생각이 분분하게 엉켜버렸다. 석굴암이 안타깝다. 불필요한 논쟁보다는 석굴암이 원하는 소리를 가슴으로 들어 후손들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보전되었으면 좋겠다.

'석굴암 백년의 빛'에는 석굴암 최초의 사진부터 석굴암을 전리품으로 생각한 일본에서 활발하게 출간된 사진집들, 석굴암과 관련된 오래된 자료들과 안상헌의 석굴암 사진, 보수공사 당시의 출토유물들, 석굴암의 원형을 추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 석굴암 엽서들이나 홍보자료들 등, 쉽게 볼 수 없는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원래는 1월 31일까지 전시할 계획이었으나 요청에 의해 2주 연장, 2월 11일까지 열릴 계획이라고 한다. 서룰 종로구 불교중앙박물관(02· 2011-1960~1969)에서 열리고 있다.

 <석굴암 백년의 빛>겉그림
<석굴암 백년의 빛>겉그림 ⓒ 동국대학교출판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석굴암과 석굴암을 건립한 신라인들에게 일종의 감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감동은 '석굴암을 비추는 동해의 일출!' '동해의 일출이 굴 안으로 스며들어 본존불과 다른 조각상들을 비추도록 설계되었다'는 글들을 읽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이런 절묘한 건축물을 남길 수 있었을까. 은연중 석굴암을 민족의 어떤 자긍심으로까지 연결 지어 오직 자랑스럽게만 생각해 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석굴암 백년의 빛>에서 만난 사진들은 이제까지 한치의 의심도 없이 자랑스럽게만 생각해 온 석굴암을 비추인다는 '동해의 일출'이 '일본해의 일출'이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지도 상식과 달리 동·서가 바뀌고 석굴암과 불국사가 지나치게 강조된, 일본의 관점에서 경주를 그린 지도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한 그 쓰라린 심정으로.

"이 글에서의 태양은 '동해의 태양'이 아니라 '일본해의 태양'이다. 다시 말해 야마토의 태양이 그 장엄한 빛으로 석굴암을 감싼다는 것인데, 그것은 아마테라스신이 석굴암을 점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식민지의 아이들은 '동해'가 아닌 '일본해'의 태양빛이 석굴암의 본존불을 비치는 정경을 상상하면서 석굴 안을 구해준 총독부, 혹은 천황폐하의 은혜에 감격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 '조선총독부'의 보통학교 <국어독본> 성낙주 설명

"그런데 위 <국어독본>(조선총독부)의 석굴암과 1946년도에 발표된 미술사학자 윤희순의 <토함산의 해맞이>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윤희순의 <토함산 해맞이>는 해방 후 우리의 중등과정 <국어>교과서에 수 십 년째 반복해서 실려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전체적인 구성과 내용 및 주제까지 매우 흡사하다. 총독부의 <석굴암>은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을 조선 지식인의 뇌리에 이식시켰고, 윤희순 역시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 성낙주의 <석굴암 백년의 빛>중에서

20년 넘게 석굴암을 연구, 이번 전시회에서 수 십 년 동안 수집한 석굴암 관련 자료들을 제공한 석굴암미학연구소장 성낙주씨는 <석굴암 백년의 빛>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국민들 대부분이 석굴암과 관련하여 알고 있는 동해의 일출은 일본해의 일출이라는 것이다. 전시회에서 관련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일반인들에게 석굴암의 빛과 그늘을 알리고자 사진전과 함께 출간된 것이다. 저자는 ①토함산 일출 관련 최초의 글로 추정되는-1916년 9월 1일에 토함산을 찾은-'야나기 무네요시'의 글과 ②조선총독부의 <국어독본> ③윤희순의 <토함산 해맞이>(1946년) ④당시 일본인들의 일출에 대한 시각을 비판한 기행문을 소개, 독자들이 비교하게 하고 있다. 

▶ 저자 성낙주(석굴암미학연구소장)는 이번 특별전에 20여 년간 수집한 석굴암 관련 다양한 자료들을 제공, 거의 매일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전시 설명을 하고 있다. 현재 서울 온곡중학교에 재직, <차크라바르틴> <왕은 없다>란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는 석굴암 담론의 새로운 정립을 시도한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 성덕대왕신종을 총체적으로 조명한 <에밀레종의 비밀>(2008)을 낸 바 있다. 외에 <문화전사 유홍준의 미덕과 해악> <석굴암을 위한 변명> <석굴암 건축기행>외 다수의 글을 '인물과 사상사' '법보신문'등에 쓴 바 있으며 계속 쓰고 있다.


#석굴암#석굴암석불#국보 제24호#유네스코문화유산#불교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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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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