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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에 다니는 지나치리만큼 평범한 막내 삼촌에게는 정말 재미있는 술버릇이 있습니다. 요즘도 가족들끼리 모이면 삼촌의 이 재미있는 술버릇에 대해서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유난히 휴일이 적었던 2009년이 아쉬워 지난 주말(19일) 온 가족이 모였습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니, 술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 드디어 삼촌의 특이한 술버릇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삼촌이 군대에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삼촌에게는 군대에 가기 전에 3년 이상 사귀었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요. 입대 직전에 크게 싸우고 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남성들이 입대 전에 많이 겪는 과정 중 하나지요. 모두가 그랬겠지만, 특히나 삼촌이 일방적으로 오랜 시간 좋아했던 친구였기 때문에 마음이 유난히 더 아팠다고 합니다.

삼촌은 그런 마음 상태로 입대를 했고, 육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뒤 자대 배치를 받았습니다. 아마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군내 폭력이 남아있어서 자대배치를 받자마자 선임들의 이유 없는 구타가 있었고, 삼촌은 이등병 때 정말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삶의 이유와 목적도 없는 데다가 선임들의 구타는 계속 되었기 때문에 정말 확 죽어버리려는 생각도 했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이등병에게 날아든 편지 속에 들어있던 건

그러던 어느 날 삼촌은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이등병에게 편지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받아든 편지에는 입대 전 이별한 여자 친구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나와 다시 시작하자는 건 아닐까?'와 같은 종류의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나 편지에는 '우리가 헤어진 것에 대한 잘못이 다 너에게 있다'는 원망의 내용으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삼촌에게는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겠지요. 군 생활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삼촌에게 그녀의 편지는 위로는커녕 삶의 마지막 남은 희망을 무너뜨리는 어떤 것이었습니다. 그즈음 삼촌은 동기와 함께 외박을 나가게 되었고, 경기도 포천 시내에 나가 술이나 먹고 죽어버리자는 심정으로 술을 마셨다고 했습니다.

이별한 그녀에게 직접 그려준 그림과 유사한 그림이다
▲ 나의 술버릇을 생성케한 첫 작품 이별한 그녀에게 직접 그려준 그림과 유사한 그림이다
ⓒ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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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너무 미웠다고 합니다. 정말 오랜 시간 좋아했는데 말이죠. 동기와 둘이서 각각 소주 두 병을 먹은 삼촌이 문득 주인 아줌마에게 펜과 종이를 달라고 했답니다. 그리곤 거기에 그녀에게 줄 그림(편지)을 그리기 시작했답니다. 삼촌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예술가적 기질이 발동했던 것입니다.

무엇을 그릴까 고민도 하지 않은 채 '뻑큐' 손 모양(미국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이용해서 욕을 하는 손동작)을 굉장히 세밀하게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녀가 그림(편지)을 보았을 때 마주보는 쪽 손톱의 미세한 주름까지도 세심하게 배려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봉투를 사서 그린 그림을 넣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편지를 밀어 넣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후로 편지가 그녀에게 보내졌겠고, 그 편지를 보았을 그녀의 기분을 생각하면 미안하기도하고, 한편으로는 굉장히 통쾌하기도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삼촌은 이 사건을 내 인생 가장 못난 행동 BEST3 안에 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전공이 미술 쪽도 아닌데 '죽고 싶다'는 극한의 상황에서 삼촌은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요즘도 군대 동기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삼촌이 가끔씩 이 얘기를 꺼내면 동기들은 삼촌의 예술가적 기질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는 한답니다. 깔깔대고 웃으면서 '넌 참 예민하고 날카로운 녀석이었어'하고 말이지요.

술 마실 때마다 산타할아버지가 되는 막내삼촌

삼촌은 이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지만, 그 때 그 한 번의 행동이 '버릇'으로 남았다는 것이 참 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삼촌은 원래 술을 많이 즐기는 편도 아니고 잘 마시지도 못하지만 기분 좋게 취할 정도가 되었다싶으면 언제나 주인아주머니에게 종이와 펜을 부탁드리게 된답니다. 그리고 한창 분위기가 고조되어있을 때, 신이 난 사람들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자꾸 무언가를 그린다고 합니다. 게다가 삼촌은 술을 마시면 지인들의 주소가 더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삼촌은 자신이 뭘 그렸는가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다고 합니다. 삼촌은 말합니다.

"정말이지 참 많은 것들을 그렸더라고. 그런데 참 곤욕이다. 곤욕이야."

삼촌은 술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흡사 산타할아버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강아지를 갖고 싶다던 사촌 조카에게는 강아지를 그려서 일산으로 보냈고, 중형 자동차가 갖고 싶다던 큰 이모에게는 신형 소나타를 그려서 대전 이모 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친구 분께서 임플란트를 했다며 샘내하시던 외할머니에게는 이빨 모형 그림을 그려서 저 멀리 강원도 양양까지 보내드렸고요. 이외에도 정말 많은 것들을 그렸다고 합니다.

술을 많이 먹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고 술버릇 있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그 사건으로 생긴 삼촌의 술버릇은 이제 저희 집안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습니다. 삼촌이 술을 마시면 가족 누군가가 무언가를 받게 되는 것이 익숙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명절에 모인 저의 가족들은 TV에 방영되는 명절 특집 프로그램을 보지 않고도 막내 삼촌에게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얘기하는 것만으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결혼 8년 차인 숙모는 삼촌이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말에 삼촌은 매일같이 술을 거하게 마셨다고 합니다. 송년회다, 거래처 사람들 접대다, 이래저래 피할 수 없긴 했지만 삼촌은 숙모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술을 거하게 마신 어느 날, 숙모에게 혼날까봐 숙모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사가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지갑은 비어있었다고 합니다. 삼촌은 술에 취해 집으로 가는 길에 아파트 경비실에서 아저씨께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를 빌렸습니다. 삼촌은 그 날도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오늘 그림은, 아내가 좋아하는 캔 맥주와 양념통닭."

덧붙이는 글 | <그들의 특별한 술버릇을 공개합니다> 응모글



태그:#술, #예술가적 기질, #술버릇, #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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