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탁구 고수였던 나, 탁구는 나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자존심이 얼마전부터 산산히 무너져버렸다.

자칭 탁구 고수였던 나, 탁구는 나의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자존심이 얼마전부터 산산히 무너져버렸다. ⓒ 곽진성


세상엔 탁구 고수가 참 많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유남규, 현정화 등 전설적인 탁구 영웅들은 물론이고 2004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유승민 선수, 그리고 최근 모 TV 프로그램에 나온 5살 탁구 신동 등 참 많은 고수들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림에도 사파가 존재하듯 알려지지 않은 탁구 고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대표적으로 자칭 '우리동네 유남규'인 내가 그랬다. 난 내가 탁구를 정말 잘 친다고 믿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과 시합을 하면 대부분 이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추어 중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 무기는 스핀 서브, 강력한 내 서브를 막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건만, 나의 오만함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느날 아는 동생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운동 신경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여진이란 여자 후배였다. 내가 탁구를 잘 친다고 하도 자랑을 하자 탁구 좀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다.

"오빠, 탁구 한 게임 쳐요. 좀 가르쳐주세요"
 하이힐 신은 후배에게 강스매싱 당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이힐 신은 후배에게 강스매싱 당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 곽진성

뭐 배우고 싶다면야 얼마든지라는 생각으로 약속을 잡고 탁구장에 갔다. 속으로 '돈 안받고 가르쳐주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 하는 마음으로 호기롭게 후배를 만났다.

그런데 웬 걸, 배우는 사람의 자세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탁구를 배운다면서 높디 높은 하이힐을 신고 온 것이다.

"웬 하이힐? 그래 가지고 어디 제대로 움직이겠니?"

살짝 핀잔을 줬다. 후배는 멋쩍은 듯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찌 괜찮으랴, 안 그래도 실력 차이가 날 텐데, 하이힐 신은 채로는 제대로 된 게임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울컥한 마음에 후배에게 죄값을 받으라~는 심정으로 특기인 스핀 서브를 넣었다.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있는 힘껏 서브를 넣었다. 그런데,

탁구공이 네트를 넘어 후배 탁구대로 건너간 순간, 피슝, 엄청난 강 스매싱이 번뜩였고 탁구공은 내 탁구대에 그대로 꽂혔다. 난 그대로 얼어 붙었다. 세상에, 자칭 탁구 고수가 하이힐 신고 엉거주춤거리던 후배한테 스매싱을 당한 것이다.

'서...설마, 우연이겠지?'

나는 우연이겠거니 하고 이번엔 커트성 서브를 넣었는데 다시 한번 후배의 강력한 스매싱에 무너졌다. 그렇게 몇 번의 강력한 스매싱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져버린 난, 하이힐 신은 여진이에게 첫 세트를 어이없게 내주고 말았다. 자신감이 생긴 후배, 이게 진짜 실력이냐고 따지고 물었다.

"오빠, 이게 진짜 실력 아니지?"
"아아...물론 아니지"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나는 이후, 높은 구두를 신은 후배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해 공을 탁구대 구석구석 집어 넣었고 결국 세트 스코어 3대2의 진땀승을 거뒀다.

하지만 내 등뒤로 "하이힐 안 신었으면 내가 이겼을 텐데"라는 볼멘 소리가 비수처럼 팍팍 꽂혔다. 이 비극적 사태 앞에서 나는 '하이힐 女한테 강 스매싱'당한 사건이 소문나지 않게, 얼른 탁구계(?)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탁구 달인(?)의 끝없는 추락

하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처럼, 내가 '하이힐 女'한테 질 뻔했다는 소문은 날 탁구 고수로 알고 있던 친구, 후배들 사이에서 안주거리처럼 회자됐다. 그래서일까? 어느날 갑자기 겁없는 후배 재영이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게다가 밥값이랑 탁구비 내기를 하자는 것이다.


"진성형, 탁구 한 게임 쳐요. 밥값이랑 탁구비 내기 어때요?"


 어렵게 찾아낸 탁구장, 여기서 후배들이랑 한판 대결을 펼쳤다

어렵게 찾아낸 탁구장, 여기서 후배들이랑 한판 대결을 펼쳤다 ⓒ 곽진성

아, 탁구계를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야속한(?) 세상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대로 경기를 안 한다면 나는 패배자, 요즘 유행하는 말 그대로의 '루저'가 되기 때문이다.

"응, 좋아. 받아주지. 날짜는?"
"다음주 수요일 어때요?"
"좋아.좋아"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 게다가 기말고사, 공모전이 겹쳤지만 그보다 후배의 콧대를 꺾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왕 시합하는 거, 철저히 눌러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드디어 다가온 12월 2일 수요일. 우리는 학교 앞 조그만 탁구장에서 경기를 하기로 했다. 4세트를 먼저 이기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승리 방식을 정했다.

결전을 앞둬서 조금은 조심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에 앞서 후배의 실력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내 실력을 숨기고 살짝 상대 실력의 간을 본 것이다.

연습을 해본 결과, 재영이의 실력은 별 것 아닌 듯 보였다. 그의 서브는 별 볼일 없었고 받는 자세도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강력한 스핀 서브를 넣는다면 손쉽게 이길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훗, 이런 실력으로 도전했단 말야? 이거...... 쉽게 이길 수 있겠는데?'

자신감이 팍팍 생긴 난 얼른 경기를 시작하자고 했고 잠시 후, 드디어 경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후배한테 제대로 속은 것을 깨달았다. 재영이가 경기 시작 때까지 감춰둔 '진짜 실력'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후배가 서브를 넣자 탁구공은 트위스트 춤추듯 내 탁구대에 팍팍 꽂히는 것이 아닌가? 반면 내가 믿고 있던 스핀 서브를 재영이는 너무 손쉽게 받아 쳐냈다. 그런 상황에 내가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평소 하지 않았던 실수를 연발했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영이는 재빠르게 공격을 이어갔다. 결국 세트 스코어 0대4, 내리 4세트를 내주는 비극적 사태가 발생했다. 너무나 일방적인, 그래서 재미없는 경기였다.

 우리들이 탁구 고수인 줄 알고 관심가지셨던 탁구장 아주머니, 우리의 실력이 밑천을 드러내자 흥미가 없어지셨는지 잠을 주무셨다.

우리들이 탁구 고수인 줄 알고 관심가지셨던 탁구장 아주머니, 우리의 실력이 밑천을 드러내자 흥미가 없어지셨는지 잠을 주무셨다. ⓒ 곽진성


처음에 우리 경기를 관심을 갖고 보던 탁구장 주인 아주머니도 이 지루한 경기에 흥미를 잃으셨는지 곧 쿨쿨 잠에 빠지셨다. 관객이 자버리는 탁구 경기라니, 이런 굴욕도 없었다.

후배 재영이는 내 실력을 알고 나자, 한결 여유 있어진 모습이다. 결국 애간장이 타 들어간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이대로 탁구 하수란 오명으로 불릴 수 없어 후배에게 조금만 더 하자고 말을 꺼냈다. 거의 생떼에 가까웠다.

"야, 내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 6세트 먼저 따기 하자"
"네, 뭐, 그래요. 형"

 허접 일 줄 알았던 재영이,알고보니 숨은 탁구 고수였다

허접 일 줄 알았던 재영이,알고보니 숨은 탁구 고수였다 ⓒ 곽진성

그렇게 다시 열린 경기, 하지만 하늘과 땅만큼의 실력 차이를 뒤엎을 수는 없었다. 결국 세트 스코어 0대6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알고 보니 재영이야말로, 탁구 고수였던 것이다. 게다가 재영이는 뼈와 살이 되는 탁구 조언까지 해준다. 후배의 말을 새겨 들으며, 탁구비와 오늘 저녁을 사는 것으로 이 가슴 아픈 탁구 시합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형도 잘 치지만 너무 스핀만 넣으려고 하시는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 그랬는데, 그래선 더 이상 실력이 늘지 않아요."

그렇게 어깨가 축 늘어져서 집에 가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또 다른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굴욕의 연속, 탁구 하수에게 농락당할 뻔

후배 수하였다. 그런데, 그런데 이번에는 해도 너무 했다. 탁구를 안 해본 지 몇년 됐다는 후배 수하가 나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진성 형, 저랑 탁구 한 게임 치시죠."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탁구의 기본도 모르는 너가 나랑 시합 하자고?'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후배가 탁구비 내기를 제안했기에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었다. 게임도 이기고, 탁구비도 후배가 부담하게 된다면 나로선 손해보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전 게임의 분풀이도 할 수 있고 말이다.

나는 속으로 '좋았어'를 연발하며 기분좋게 경기에 임했다. 역시나, 연습 게임을 해보니 수하의 탁구 실력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경기는 일방적이었다. 나의 스핀 서브를 수하가 제대로 받지 못해 점수 차이가 서서히 벌어졌다. 21점 먼저 내기로 한 경기에서 어느덧 9대3으로 크게 앞서 있었다.

 수하의 공포의 스매싱, '하이힐 女'의 스매싱 트라우마가 되살아 난다.

수하의 공포의 스매싱, '하이힐 女'의 스매싱 트라우마가 되살아 난다. ⓒ 곽진성

그런데 그때였다. 일방적으로 앞서가던 상황에서. 수하의 분노의 스매싱이 터졌다. 기초도 없이 제멋대로 휘두른 탁구채에 탁구공이 제대로 걸린 것이다. 탁구공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내 탁구대를 맞고 튀어 나갔다.

후배 수하의 엽기적인 스매싱을 맛본 나는, 얼마전 당한 '하이힐 女'의 강스매싱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히 살아났다. 그런데 그 끔찍한(?) 공포가 떠오르니, 잘 하던 경기가 갑자기 꼬이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탁구공이 갑자기 네트에 걸리는가 하면, 실책을 연발해 점수를 상대방에게 헌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기세가 오른 수하는 초보답지 않게, 능글맞게 경기 운영을 해 동점이 되었고 어느덧 역전이 되었다.

'으앗, 큰일이다. 지면 망신인데,'

아뿔사, 어느덧 점수는 20대 17로 몰리게 되었다. 한점이라도 더 내줘 경기에서 진다면 난 정말로 탁구 하수가 되는 것이었다. 손발이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스페인과의 승부차기를 시청할 때보다 더 떨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오 신이시여! 감사! 아마도 탁구의 신이 내가 안타까웠는지 편을 들어준 모양이다. 다행스럽게도 난 상대의 실수를 틈타 20대 20을 만들었고 듀스 끝에 23대21로 경기를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속으로 '흐엉' 하고 울먹이며, 하늘 높이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그동안 탁구 고수라고 했던 이미지가 있던 탓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수하야, 내가 봐주면서 했어. 너 좀 더 연습해야 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다행이다'라며 속을 몇 번이나 쓸어 내렸는지 모르겠다.

엽기적인 2대1 게임에서 완패하다

그렇게 끝나고 집에 가려고 했건만, 이번엔 수하와 재영이 녀석이 2대1 게임을 제안하는 것이 아닌가. 수하랑 재영이랑 한 편을 먹고 나 혼자 해서 탁구 시합을 하자는 것이다. 음료수 내기였다. 나는 속으로 가만 생각해 보았다. 한 명씩 번갈아 가면서 복식으로 치는 것은 단식으로 치는 것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에 난 내가 쉽게 이길 것이라 생각했다.

'뭐, 나쁠 건 없지. 아까 세트 스코어 0대6 패배를 확실히 만회해 주지'

 탁구 초보 수하(왼쪽)와 재영(오른쪽)와 자존심을 건 2대1 경기

탁구 초보 수하(왼쪽)와 재영(오른쪽)와 자존심을 건 2대1 경기 ⓒ 곽진성


나는 재영이에게 0대6으로 진 패배도 갚아줄 겸 흔쾌히 승낙을 했다. 탁구를 잘 치지 못하는 수하가 있기에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판단 착오였다.

이 녀석들, 완벽한 찰떡 궁합이 아닌가. 환상적인 팀웍으로 경기 내내 날 몰아 세우더니 결국 승리를 쟁취해 버렸다.녀석 둘은 21대 19로 날 이기고 나서 마치 남북 이산 가족이 만난 것처럼 얼싸안고 좋아라 했다. 엽기적인 2대1 게임은 나의 완벽한 패배로 끝이 났다.

"으하하하, 진성 형, 탁구 고수라더니 별 것 아니네요."

재영이와 수하의 웃음 소리는 끝이 날 줄 몰랐다. 나는 살짝 삐친 마음에 후배들에게 자포자기 식으로 한마디 했다.

"에고, 너희 둘 땜에 내가 잘하는 것이 또 하나 없어져 버렸네."

그 말이 웃긴지, 재영이랑 수하가 소리내어 웃는다. 재영이가 "형 미안해요"를 외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괜찮다. 그깟 탁구 하나쯤 버려도 아직 내겐 잘하는 것이 참 많아'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았다.

사실 그랬다. 비록 탁구는 '하이힐 女'에게 강 스매싱 당하고, 2대1게임도 지는 굴욕을 맛봤지만, 아직 내겐 배드민턴, 축구, 족구, 우슈같은 진짜 잘하는(?) 운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탁구 고수란 별명은 이제 굿바이가 됐지만, 그래도 내겐 축구 천재, 족구의 신, 우슈 청년 같은 화려한 수식어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런 운동 별명도, 어쩌면 탁구처럼 망상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 혼자 멋적게 웃었다. 뭐, 아무렴 어떠랴, 오랜만에 후배들하고 보낸 시간이 너무 즐거워 스트레스를 확 날려 버렸으니 그것으로 족할 일이다.

탁구 핑퐁 대결` 하이힐女 2대1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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