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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광화문 광장이었다.

 

지난 8월 1일 개장 후 직접 다녀온 사람들, 유심히 주목해 온 사람들이 많은 얘깃거리를 만들어낸 그 곳에서 한 방송 프로그램 제작진이 촬영을 하자고 했다. 내 애독서를 소개하고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에 쓸 인서트 화면을 찍기 위해서였다. 세종대왕상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면서도 기분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왜 하필 그곳인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 일요일 한낮인데도 한파가 몰아쳐서 세종대왕상 근처는 분위기가 썰렁했다. 현장에 나온 제작진 2명과 함께 날씨도 너무 추운데다 찍을 분량도 짧은 만큼 최대한 빨리 끝내자고 얘기를 나눈 뒤 서둘러 촬영을 시작했다. 그 때 경찰관 2명이 성큼 다가와 우릴 향해 물었다.

 

"뭐 하시는 건가요?"

 

느닷없이 촬영을 중단시켰다. 게다가 입고 있는 정복이 위력적으로 느껴져 불쾌감이 더했다. 이러저러하다고 이유를 설명을 하고 난 뒤, 어색한 촬영을 계속했다. 칼바람에 귀도 손도 시려 가뜩이나 펴지지 않는 인상이 더 굳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현장 관리직원이 다가와 대뜸 '허락을 받았느냐?'고 묻는다. '허락이라뇨? 누구한테 왜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고 되물어도 막무가내로 서울시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촬영을 제지했다.

 

광장은 시민이 자유롭게 누려야 할 도시의 몸

 

길을 걷는 사람이 자신의 도시, 동네와 맺는 관계는 정서적인 관계인 동시에 신체적 경험이라고 한다. 도시는 인간의 몸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존재한다는 말도 있다. 길과 광장은 도시의 몸이고, 시민들은 이곳을 신체적으로 경험하면서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광화문 광장이나 서울 광장은 누구의 몸일까? 

 

그동안 서울 걷기를 하면서 좁고 가파른 길, 끊어져서 걷기 힘든 길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제지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자기가 걷고 싶은 길을 걷지 못하거나 머물고 싶은 곳에서 나가라고 한다면 어떨까? 격노할 수밖에. 이런 분노는 물리적인 제지나 추방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도시의 몸에서 소외된 배신감 때문에 생긴다.  


얼마간의 실랑이 끝에 약 15분간의 촬영이 힘겹게 끝났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스태프 수십 명 이상이 참여해서 몇 시간씩 소요되는 행사인 경우에는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에 사용허가신청을 해야 한다고 한다. 광장을 이용하는 일반인들에게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우 일행 셋이서 광장에서 몇 분 촬영하는 것조차 공권력으로부터 제지당하고, 허가신청이든 협조요청이든 번거로운 행정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몇 분 촬영을 위해 주민번호를 적어내고 사유서를 내야 하는 광장. 사소한 일에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었던 것은 이 '광장'에 대한 배신감 때문일 것이다.

 

시민을 배신하는 광장이여 속히 돌아오라!


지난해 촛불시위부터 올해 서거정국까지 서울 광장, 광화문 광장을 둘러싼 시민들과 서울시의 갈등이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광장의 사전적 의미는 개방된 장소에 사람들이 한데 모이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이다. 
 
한 사람의 서울시민으로서 서울이란 도시의 몸, 그 중심에 있는 광화문 광장에서 느낀 바로는 광화문 광장은 최소한 광장의 정신과 형태는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광장이 들어설 자리에 조성된 대형화단과 전시공간은 오히려 광장의 설 자리를 빼앗고 있다. 주변 분위기도 미 대사관의 경비병력과 어우러져 흡사 80년대 천안문 광장을 연상케 한다.

 

최인훈의 광장이 떠오른다. 밀실에서 광장으로 나온 지 60년. 그 숱한 세월을 보내고도 여전히 광장이란 이름으로 또 다른 밀실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시민이 걷기 좋은 거리, 시민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떠들 수 있는 광장, 시민을 배신하지 않는 광장으로 광화문 광장을 하루 속히 시민들 품으로 돌려주기를!

덧붙이는 글 | 이계안 기자는 17대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태그:#광화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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