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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16세기 조선

한 동양사학자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조선은 다른 동양권 대부분의 나라가 권력교체기였던 16세기말에 멸망했어야 합니다. 임진왜란이 오히려 왕조의 생명을 300년 이상이나 연명시켜준 셈입니다."

이 뼈아픈 소리를 들어야 할 만큼 16세기 조선은 확실하게 쇠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국가 체제를 결정짓는 소유제도와 조세제도 모두에서 '유교적 농촌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겠다던 애초의 호언장담은 없어졌습니다. 철저한 사적소유에 바탕을 두고 양반만을 위한 신분제국가로 출발했던 것부터가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려 말 성리학자들이 조선건국의 명분으로 내세운 '유교근본주의'의 핵심골자는 맹자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민심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내세운 '정전법'이었습니다. 근대이전에 재화는 오로지 토지에서만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에 토지의 소유제도는 결정적으로 조세제도를 결정짓는 잣대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송나라 성리학, 특별히 주희에 의해 '정전법'의 원리는 토지의 자유로운 사적소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수정되었습니다. '사대부'라고 하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신사계급의 경우는 품위와 교양과 학문을 위해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풍요로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양반들에게 완전한 사적소유가 가능하게 해준 이론적 기반이 되어주었습니다.

게다가 조선 건국 이후 200년간 거듭된 평화는 지배양반층에게 안일한 사고를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군사력을 키우고, 성을 개보수하기 위해 세금을 징발하는 일은 '민폐'였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백성을 위한 엄청난 은혜를 보이는 듯한 이 논리 뒤에 숨은 것은 대토지소유 양반들의 음흉한 노림수였습니다.

직접세인 전세는 유교 정전법에 규정된 1/10세금에서 점점 낮아져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시대에는 1/20을 넘어 1/30의 일에 육박했습니다. '민폐'에 대한 염려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서원이나 향교에 이름을 올리기만 한다면, 학문과 교양을 위해 애쓰는 양반들의 지식활동의 대가로 면세권을 얻었습니다.

거기에다 열녀나 효자로 인정받은 가문은 면세권을 얻었으니 멀쩡한 며느리를 수절시키거나 자결시켜 집안의 부귀영화를 얻는 일에도 양반들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용서가 되었습니다. 학문과 교양과 품위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반면에 관청을 유지하고 도로를 보수하거나 질서를 유지하고 국경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간접세격인 공납과 역의 의무는 갈수록 커져갔습니다. 이런 간접세는 '인두세' 성격이 강해서 수 만 헥타르를 가진 거부도, 한쪼가리의 밭도 없는 가난뱅이도 평등한 세금을 냈습니다. 마치 오늘날 기름 1리터를 사거나 혹은 과자 한 봉지를 사면서 내는 세금이 공평하듯이.

이렇게 '보이는 간접세'만으로도 허리가 휠 지경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간접세'의 횡포는 더더욱 심했습니다. 아전들이 무급 자원봉사자들이다보니 불쌍하게 여겨 인정이나 베풀자는 의미로 제정된 간접세가 바로 '인정세'입니다. 그러니까 합법적인 뇌물인 셈이죠. 16세기 말에 이르면 물건으로 바치는 세금인 공납을 하려면 관청에 인정을 바쳐야 하는데 실제로는 바친 물건의 9할은 인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진상할 것은 꼬치에 꿰고, 인정은 말 등에 가득하다."

그 외에도 지금으로 보면 부가가치세에 해당하는 '작지세'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세금을 낼 때 그 세금을 수납하는 관청의 경비를 세금에 덧붙여 내는데 '장부책을 구입할 때 보태쓰십쇼'하고 내는 종이 값입니다.

하지만 작지세가 세금보다 적은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가령 특산물인 감귤을 제주도에서 한양의 서옹원에 낸다고 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동네 수령에게 수납(작지세 첨부)+ 배에 선적(작지세 첨부)+ 배에서 하적(작지세 첨부)+ 수레에 선적(작지세 첨부)+ 수레에서 하적(작지세 첨부)+사옹원 수납(작지세 첨부)+사옹원 창고에서 수랏간으로 이동(작지세 첨부)…

토지소유자들인 양반들이 내는 직접세인 전세는 감세의 대상이었지만 일반 백성들이 내야 할 이 간접세엔 아량을 베풀 수 없었습니다. 정부기관은 이 간접세로 굴러가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을 목전에 두고, 사림파는 더욱더 '백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작은 정부'를 외쳤지만 정작 백성들은 호랑이보다 무서운 세금(간접세인 공납)을 견디다 못해 밤도망을 쳤습니다. 국가의 힘을 결정짓는 잣대는 세금 내고 군대 가는 백성의 숫자가 거의 전부이다시피한 시대였기에 조선은 그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시대의 표상을 보여주는 도자기가 최근 발견되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재개발지역에서 발견된 17점의 백자명기는 임진왜란 때 집이 불타면서 매몰된 것으로 보이며 16세기 후반에 명기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청진동은 그런 도시집중화에 따라 더욱 번창하던 시전이 있던 곳입니다. 그들은 관청의 아전이나 노비와 결탁, 공납을 이용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온 자기는 판매를 위한 것이었든가, 아니면 상인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명기로 쓰기 위해 구입해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청진동에서 발견된 백자명기 서울시 종로구 청진동 재개발지역에서 발견된 17점의 백자명기는 임진왜란 때 집이 불타면서 매몰된 것으로 보이며 16세기 후반에 명기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청진동은 그런 도시집중화에 따라 더욱 번창하던 시전이 있던 곳입니다. 그들은 관청의 아전이나 노비와 결탁, 공납을 이용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온 자기는 판매를 위한 것이었든가, 아니면 상인이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명기로 쓰기 위해 구입해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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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부터 한양의 인구는 급격하게 팽창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농촌에서 도망쳐 나온 유랑민들이 더러는 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했지만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시 인구팽창은 모든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벌어지는데요, 농촌경제가 파탄나면서 도시집중화 현상이 벌어지고, 그 결과 도시를 중심으로 한 시장의 발달을 가져왔고, 그것은 조선시대 중인문화, 도시문화라고 할 수 있는 여항문화를 만들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근대문명의 주체는 농민이라기보다는 시민들이었고, 개성이 아니라 정치의 중심지인 한양에서 성장한 상인과 그의 자본에 의해 견인될 중인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이 문화적으로 발전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려는 싹이 틀 무렵에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은 집권 양반사대부에게는 위기이기도 하지만, 각성의 기회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내부결속에 의해 위기를 돌파하려는 그들의 집념은 훗날 인조반정으로 드러납니다.

전쟁이 남긴 것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과 남해바다를 막아낸 이순신의 힘은 이 전쟁의 승패를 갈라놓았다고 할 만합니다. 바로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늘이 도왔는지 전쟁이후 풍년이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국가의 시스템은 작동을 중지했습니다. 조선이라는 느슨한 농업중심의 유교국가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약삭빠른 독점상인들에 의해 쌀은 매점매석되어 물가는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풍년의 효과는 조정에겐 더없는 하늘의 보살핌이었습니다만 백성들에겐 더 악몽이었습니다. 전쟁을 이유로 충청-전라지역의 세금은 가혹할 정도로 더 많이 걷어갔지만 왕실과 일부 조정대신들은 정권유지에만 이를 썼고, 백성들의 물가를 잡거나 치안의 유지에는 관심도 없어보였습니다.

임진왜란 시기에 다양한 형태의 어사들이 지방에 파견되었는데요, 대부분 세금을 걷어가기 위한 경우였던 것만 보아도 짐작이 됩니다. 그 틈을 타 관리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의 분노는 들끓었고, 조정은 일본군보다 이것을 더 두려워하는 듯했습니다. 위기의 끝에 도달한 것을 직감한 왕실과 조정은 반란의 씨앗을 제거하는데 혈안이 된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곽재우를 비롯한 초기 의병장들은 반역자의 혐의를 두려워해 재빨리 관군에게 군사들은 넘겨버린 뒤 숨어야 했습니다. 빛나는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은 결국 반역의 죄를 쓰고 무고한 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도 집권 양반사대부세력의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전쟁이후 이루어진 논공행상에서 의병장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조정은 일본군을 몰아내고 전쟁을 끝낼 수 있었던 힘을 오로지 명나라의 원군에서 찾았습니다. 그 결과 전쟁을 직접 치른 장수들에게 주는 선무공신은 고작 18명. 그나마 김시민은 겨우 2등급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청난공신 5명, 그리고 무엇보다 피난 가는 임금을 따라갔던 사람들에게 호종공신을 내렸는데 무려 86명. 그중에는 내시만 25명에다 말몰이 꾼 6명이 포함되었으니 전쟁 중 세상을 떠났으나 공신책봉도 받지 못한 억울한 장수들은 눈이나 감을 수 있었을까요?

이후 조선에는 의로운 일에 나서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어느 연구자의 기록이 가슴을 파고 듭니다. 임진왜란때 의병참전율이 전체 인구의 3.5%에 이르렀지만 대한제국이 멸망할 동안의 5년간 의병및 대일항전에 참가한 인구의 비율은 1.1%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마치 IMF경제위기 때 국가가 개인과 가족을 지켜주지 못하자 모두가 개인주의에 빠지고,가족이라는 울타리만을 의지하게 되었던 것처럼 임진왜란이후 조선 사람들은 개인주의화하고 가족이나 가문에 기대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걸 탓할까요?

전쟁은 이후 집권사대부들이 탐욕을 응징할 에너지를 전부 쓸어가 버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곽재우를 비롯한 실천적 지식인들은 몸을 사리며 백성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갓 태어난 도시의 중인그룹은 집권사대부들과 우호적인 분위기아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으니까요. 그래서 조선은 다시 300년간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비운의 종말을 맞아야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임진왜란은 그래서 조선왕조에겐 치명적인 결점을 드러내게 했지만 또한 그들의 명줄을 이어준 기회이기도 했던 것일까요?

162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선조임금의 아들인 왕자 인흥군의 둘째 아기가 태어나자 그 태를 담아 땅에 묻은 항아리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흙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유약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 색이 투명하지 못하고 거칠어 한눈에 보기에도 질이 좋지 않습니다. 전쟁 직후, 왕실의 위기를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왕실에서 자손을 태어나면 태를  항아리에 담아 묻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기가 태어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습니다. 특히 왕실에서는 나라의 운명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특별히 정성들여 구운 도자기에 담아 엄격한 절차에 따라 묻었습니다.
▲ 백자 태항아리 162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선조임금의 아들인 왕자 인흥군의 둘째 아기가 태어나자 그 태를 담아 땅에 묻은 항아리입니다. 이때 만들어진 도자기들은 흙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유약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 색이 투명하지 못하고 거칠어 한눈에 보기에도 질이 좋지 않습니다. 전쟁 직후, 왕실의 위기를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왕실에서 자손을 태어나면 태를 항아리에 담아 묻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기가 태어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습니다. 특히 왕실에서는 나라의 운명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특별히 정성들여 구운 도자기에 담아 엄격한 절차에 따라 묻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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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에 도전장을 낸 철화백자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임금 인조는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아 쌀쌀한 남한산성을 나왔습니다. 허둥지둥 들어간 지 50일만의 외출이었습니다. 임금은 곧장 한강 아래 삼전도에서 무릎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바닥에 찧은 뒤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문서를 바쳤습니다. 임금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고, 조선백성들은 치를 떨었습니다.

이에 따라 1639년에 만들어진 삼전도비는 치욕의 상징물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조선 사람들의 가슴을 짓눌렀는지는 1895년에 청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재빨리 한강물에 밀어 넣어버렸던 것을 보아도 그리고 청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으로써 조선을 자주독립국가로 선포하였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독립문을 세울 때만 해도 삼전도에서는 적어도 나라를 잃지는 않았으나 주권을 잃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리라는 것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요? 무려 250여 년간을 조선을 짓눌렀던 항복에 대한 기억속에서도 왜 국력을 기르지 못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도자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철화로 만들어진 이백자는 황실도자기로 경기도 광주의 분원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주둥이 부분과 바닥부분의 독특한 문양인데요, 이 모양에 따라 가마나 시대가 구분되기도 합니다. 이런 문양이 들어간 도자기는 황실의례에 쓰는 도자기입니다. 하얀 백자위에 그려진 붉은 빛 대나무는 절도 있고 아름다워서 도화서 화원의 품격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처절하게 아름다운 핏빛이라고나 할까요?
▲ 백자철화 백죽문항아리 철화로 만들어진 이백자는 황실도자기로 경기도 광주의 분원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주둥이 부분과 바닥부분의 독특한 문양인데요, 이 모양에 따라 가마나 시대가 구분되기도 합니다. 이런 문양이 들어간 도자기는 황실의례에 쓰는 도자기입니다. 하얀 백자위에 그려진 붉은 빛 대나무는 절도 있고 아름다워서 도화서 화원의 품격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처절하게 아름다운 핏빛이라고나 할까요?
ⓒ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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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백자는 산화철이라는 안료를 물감으로 써서 붓으로 그림을 그린 뒤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라서 '철화백자'라고 부릅니다. 산화철은 돌과 돌 사이에서 발견되는 붉은 흙이라는 뜻에서 '석간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철가루입니다.

산화철가루의 붉은 색은 매우 미묘하게 온도에 따라 변해서 섭씨 800도에서는 핏빛이 나고 1000도를 넘으면 검붉은 색을 띱니다. 번지거나 증발하지 않기 때문에 그림을 그린 붓 칠의 맛을 그대로 살려 독특한 멋을 냅니다.

청화백자의 색은 짙푸르기 때문에 어찌 보면 차갑게 느껴집니다만 철화백자는 무언가 정감이 어립니다. 그것은 색이 붉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철화백자는 청화백자에 대한 도전장을 내밀기 위해 만들어진 도발적인 도자기이기 때문입니다.

청화백자는 중국의 문화가 세계를 주름잡는다는 상징과 같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자신감은 그들이 유교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야만인들과 다르다는 자부심에서 나왔습니다. 유교사상은 사람의 도리를 정해 놓은 것이라 이것을 지키면 문명인이고 어기면 야만인이라는 잣대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고 모든 이민족이 세운 나라가 그렇듯이 다른 문명을 존중하였습니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물밀듯이 들어와 궁정에서 황제에게 서양문물을 가르쳐주었고 청나라의 수도 북경은 세계문명의 집합소와 같았습니다.

청나라는 중국에 대해서도 존중해주었습니다. 그들의 상징 같은 청화백자는 오히려 청나라 황실에 의해서 더욱 품격이 높아졌습니다. 명나라는 도자기를 좋아했지만 도공을 천하게 여겼습니다만 청나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매우 높은 소양을 갖춘 전문 관리들이 경덕진으로 내려갔고 중국 도자기는 이때 최고중의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도자기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청나라 건륭제 시대의 청화백자입니다
▲ 청화운용문5공편병 도자기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청나라 건륭제 시대의 청화백자입니다
ⓒ 대북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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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두 번의 전쟁을 통해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 힘이 더 우선일 수밖에 없는 냉혹한 세계현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변하는 세계 앞에 선 조선의 선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유교의 나라였던 중국 명나라가 무너진 마당에 문명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이른바 '조선중화주의'사상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중심에 섰다고 생각하였으니 얼마나 기고만장하겠습니까? 그래서 선택한 것이 북벌론입니다.

듣기엔 참으로 달콤해 보입니다만 청나라는 이미 우리나라 군대가 쳐서 쉽게 무너질 작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북벌은 그저 자신들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방법일 뿐이었지요. 적어도 북벌을 구상했다면, 국력을 길러 부국양병의 청사진을 보여줄 준비라도 해야 했지만, 여전히 과학과 기술은 천대받았습니다.

북벌, 청나라 오랑캐에 대한 분노는 이시대의 '색깔론'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청나라에 유입된 세계 선진문명에 대한 동경은 성리학에 대한 도전으로 치부되었습니다. 100년 뒤인 18세기 말에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북벌론을 외치는 양반사대부들의 허위의식을 꼬집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 박제가도 이런 현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오랑캐'라는 한 글자로 천하의 모든 것을 말살하고 있다'

이런 마당이니 도자기가 청나라를 닮으려 할까요? 중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코발트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았고 나라 곳간의 사정도 여의치 않았습니다만 그럴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철화백자는 이런 바탕위에서 탄생했습니다. 청나라에 대해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선비들의 꼿꼿한 절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의지가 철화백자의 붉은 빛만큼 강렬했던 까닭인지 매우 훌륭한 도자기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철화백자는 우리나라 고유의 백자입니다. 맨 처음 만들어진 철화백자가 이것입니다.

청화백자가 선망이 되었던 시대인 세종임금무렵 이 색다른 철화백자는 만들어집니다. 계룡산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철화분청사기와는 또 다른 맛이 이 철화백자에서는 느껴집니다.

바닥에 한글로 '니?히'라고 쓰여 있어서 한글을 만들 무렵 만들어진 도자기로 여겨집니다.

이 철화백자는 중국풍 같은 것은 처음부터 관심도 없는 듯 도도하게 그려진 무늬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것을 만든 도공은 청화백자의 수입에 목을 매는 사대부들을 보면서 비웃고 싶어서 이 도자기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0년이 지나 다시 나타난 철화백자는 도도함에서는 못지않으나 이런 여유는 없습니다. 세종임금시절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글자,달력,시계,의학,지리서,농사법을 만들 때의 민족주의와 청나라에 대해 분노하면서 생겨난 민족주의는 붉은 빛을 머금었지만 다른 것이라는 것을 이 도자기가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 백자 철회 새끼줄문 병 철화백자는 우리나라 고유의 백자입니다. 맨 처음 만들어진 철화백자가 이것입니다. 청화백자가 선망이 되었던 시대인 세종임금무렵 이 색다른 철화백자는 만들어집니다. 계룡산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철화분청사기와는 또 다른 맛이 이 철화백자에서는 느껴집니다. 바닥에 한글로 '니?히'라고 쓰여 있어서 한글을 만들 무렵 만들어진 도자기로 여겨집니다. 이 철화백자는 중국풍 같은 것은 처음부터 관심도 없는 듯 도도하게 그려진 무늬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것을 만든 도공은 청화백자의 수입에 목을 매는 사대부들을 보면서 비웃고 싶어서 이 도자기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0년이 지나 다시 나타난 철화백자는 도도함에서는 못지않으나 이런 여유는 없습니다. 세종임금시절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글자,달력,시계,의학,지리서,농사법을 만들 때의 민족주의와 청나라에 대해 분노하면서 생겨난 민족주의는 붉은 빛을 머금었지만 다른 것이라는 것을 이 도자기가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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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과 환국

'조선중화주의'를 선택하는 그 순간, 예고된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것은 문명의 잣대인 "예의범절"에 대한 논쟁입니다.

"예절"이란 법률과 규칙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지난번에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법칙이 그러하듯이 예절 또한 사회적 합의의 결과이거나 시대정신의 표현입니다. 따라서 합의방식이나 절차에 대해서 정치세력간의 뜨거운 정쟁이 벌어지고, 또한 자신의 입장이 절대적 진리라는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조선에서도 이런 논쟁과 정쟁이 벌어졌는데요, 그것이 바로 '예송논쟁'입니다. 참으로 딱하게도 이 논쟁은 사회적 요구나 변하는 시대에 대한 대응방식을 두고 벌어진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탁상공론화 해버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힘의 시대, 변화의 시대에 대한 조선 성리학의 대응자체가 '과거로의 회귀'였으니 어쩌면 필연이었습니다.

서인의 영수로 예송논쟁을 이끌었던 송시열의 초상화로 정조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 송시열 초상화 서인의 영수로 예송논쟁을 이끌었던 송시열의 초상화로 정조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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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완벽하게 비현실적인 논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인의 주장은 이상적 왕권국가였습니다. 백성의 뜻을 받아 왕이 통치하고, 왕을 대리하여 관리가 백성을 돌보고, 관리의 횡포는 왕이 벌주고, 왕의 잘못은 신하가 간쟁하는 퇴계이황에 의해 논리정연하게 구비된 통치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理라고 하는 정의는 왕을 중심으로 관철된다는 낙관론적인 정치론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서인의 주장은 왕과 신하는 정치적 대결체라는 다소 적극적인 정치철학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율곡이이가 주장한 대로 세상에 위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氣중심의 철학'의 정치적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수준 높은 정치적 논쟁도 현실과 동떨어지니 결과는 당연히 답이 나올 수 없는 허무맹랑한 논쟁이었고 그 귀결은 환국이었습니다. 남인과 서인이 엎치락뒤치락 하기를 거듭하는 동안 남자로서야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지만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치적 역량으로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 아닐까 싶은 숙종은 17세기 내내 양반사대부들의 손아귀에 휘둘리던 왕권을 되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조선은 비약적인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어찌되었든 신하들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귀양을 가고 부관참시가 벌어지고, 몇몇 가문이 서로 백안시하면서 한때는 유교적 이상향을 꿈꾸던 성리학자로서 손을 잡고 인조반정을 성공시켰던 남인과 서인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리고 이때, 이 무시무시한 균열속에서 '달항아리'가 만들어집니다.

달항아리

달항아리를 이해하려면 까마득한 옛날 붉은간토기를 만들었던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씨앗이 너무나 소중하던 시절에 붉은간토기는 부족의 미래를 담은 항아리였습니다. 그 후 붉은간토기는 신주단지로 변해 가족의 미래를 담았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나라의 임금은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냈습니다.종묘는 하늘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요,'사직'은 땅의 신,즉 곡식의 신에게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왕가의 전통을 '종묘사직'이라고도 합니다.

달항아리는 보름달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월대보름에 풍년을 빌고 팔월대보름에 풍년에 감사했던 것은 보름달이 풍년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달을 닮은 항아리는 신주단지로 쓰여 졌습니다.

시간을 건너뛰어 18세기를 열어젖히며 조선시대에 다시 나타난 이 달항아리에는 무엇을 담았을까요?

'왕은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

이것이 유교의 기본 생각이며 조선이 고려왕실을 밀어내면서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것도 이것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담은 것이 달항아리입니다. 조정의 피비린내야 어찌되었든 이제 비로소 전쟁의 상처도 아물었고 평화가 찾아온 듯했습니다.

16세기 4대사화 시기에도 달항아리가 만들어졌습니다만, 이때의 달항아리는 동그란 달모양이라기보다는 항아리 모양이었습니다. 참 묘하게도 다시 당쟁의 절정기인 환국시대에 달항아리가 만들어집니다. 우연일까요?

달항아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양과 색을 가진 것을 저는 호암박물관에서 봤습니다.)
▲ 달항아리 16세기 4대사화 시기에도 달항아리가 만들어졌습니다만, 이때의 달항아리는 동그란 달모양이라기보다는 항아리 모양이었습니다. 참 묘하게도 다시 당쟁의 절정기인 환국시대에 달항아리가 만들어집니다. 우연일까요? 달항아리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양과 색을 가진 것을 저는 호암박물관에서 봤습니다.)
ⓒ 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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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항아리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랫부분과 윗부분이 대칭이 아닙니다. 각각 따로 만들어 이어 붙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굽다보면 틀어지기 때문에 둥그런 모양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달항아리가 만들어지려면 아랫부분과 윗부분은 마치 한 몸인 듯 맞붙어야 합니다.

달항아리는 한마디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두개가 이어져야 하나가 되는 것처럼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당쟁의 절정기에 이 아름다운 달항아리가 만들어진 것이 우연일까요?

흰빛에 대한 집념

박물관에 가보면 백자가마근처에 깨어진 채 발견된 무수한 조각들을 전시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자조각이라고 합니다만 이상하게도 흰색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수많은 실패작들을 보면 하얀색 백자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백토는 불행하게도 철분이 완전히 빠지지 않아 눈처럼 흰색이 나지 않습니다. 백자가 희지 않다는 것은 순결함을 상징으로 하는 선비들에겐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랑캐의 나라라고 업신여기는 청나라의 도자기는 시리다 못해 눈이 부시게 하얗게 변해가는 데 말이죠.

전쟁이 끝난 뒤 여러 임금들은 도자기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보다 눈처럼 시린 '백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려면 질 좋은 백토가 필요합니다.

평안북도 선천에는 매우 훌륭한 백토광산이 있었습니다. 나라에서 이 흙을 가만 놔둘 리가 없었지요. 백성들은 백토를 채취하고 앙금을 없앤 뒤 말려서 실어 보내는 일로 허리가 휘고 다른 일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보다 못한 평안감사가 말렸지만 하얀색 백자를 만들기 위해 핏발을 세운 조정에서 포기할리 없었습니다.

강원도 양구에서도 사정이 딱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양구는 태조 이성계를 위해 백자사발을 만들었을 정도로 오래되고 질 좋은 백토가 나왔습니다. 그런 만큼 흙 맥도 다해갔습니다. 파내기 좋은 곳의 흙 맥은 끝나 깊은 산속 절벽을 무너뜨려야 겨우 백토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산골에 사는 백성들은 백토를 캐내려다 매해 목숨을 잃는 딱한 처지에 빠져야 했습니다.

채취도 고생스럽지만 운반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굽이굽이 산뿐인 강원도에서 산길을 지게로 져 나르고 포구에 이르러 다시 물길로 거슬러 오고 다시 이것을 부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분원에 바치고 가는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상상만으로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나라에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흰색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줍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 나선 백토는 곧 효과를 나타내었습니다. 오로지 흰빛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 낸 달항아리는 집념의 열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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