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조상의 뿌리를 찾아가는 김상열희곡집 '동방의 북소리' 출간
극작가 고 김상열 씨의 11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열두 번 째 희곡집 '동방의 북소리'가 2009년 10월 26일 세상에 나왔다.
이번 12번째의 희곡집은 영상매체를 위한 작품들을 모아서 발간한 것으로, 1986년 9월 12일 MBC '특집드라마'로 방영되었던 <갈매기>, 1988년 8월 15일~16일 이틀간에 걸쳐 8.15특집드라마로 방영되었던 <동방의 북소리>, 미 방영된 6.25 특집드라마 <아제카레의 나라>, 미완의 영화 시나리오 <제이슨 리>가 수록되어 있다.
극단대표, 연출가, 작가로 불꽃처럼 살다간 김상열 선생이 영상매체를 위하여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77년부터 MBC <수사반장>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그는 4년간 무려 200여 편의 수사드라마를 썼고, TV문학관, 베스샐러극장 등 특집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도 다수 썼다.
이 책의 표제가 된 <동방의 북소리>는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에 상영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우리고유의 북소리 울림을 찾아가는 다큐드라마다. 드라마는 한 씨 가문에서 홀대를 받고 자라난 수연(송옥순 분)이 행방불명된 엄마(정혜선 분)가 멕시코의 어느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엄마를 찾아 나서면서부터 시작된다.
한편, 수연의 이복동생인 수철(이성수 분) 역시 누나 수연의 긴 여정을 따라 엄마를 찾아나선다. 타고난 신기(神氣)와 욕구에 이끌려 누나 수연이 곧바로 엄마를 찾아 나선 대 반해, 역사학도인 수철은 누나의 뒤를 밟으면서 몽골리언의 과거와 현재를 추적하며 몽골리언의 뿌리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수철과 수연은 엄마를 찾아가며 긴 여정의 군데군데에서 인류와 자연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내레이터 역할도 한다.
제작팀은 이 작품의 다큐제작을 위해 실제로 알래스카, 미국, 멕시코, 하와이, 네팔까지 몽골리언이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지역을 누비며 촬영을 했다.
수연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알래스카 앵커리지. 약 4만 년 전 이곳은 아시아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이 아직 붙어 있었던 곳으로,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리언의 한 무리가 지금의 베링해협을 지나 가장 먼저 닿은 곳이다. 이들은 베링해협 주변에 정착하여 유피크(Yupik)어를 쓰는 에스키모로 변하여 살게 된다. 그들보다 앞서 도착한 무리는 더 남쪽으로 내려가 북미지역에 인디언 문명을, 더 남쪽인 멕시코와 중미지역에선 마야문명을 이룬다.
수연은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은 '인도에서 건너온 얼굴 검은 종족'이란 뜻으로 백인들이 비하에서 쓰는 말)인 나바호 족 등이 살고 있는 북미주 서부를 거쳐 엄마가 일하고 있다는 멕시코 메리다 에니깽 농장으로 간다. 에니깽 농장에서 하와이로 떠나버린 엄마의 흔적을 발견한 수연은 메리다에서 하와이 호놀룰루로 떠난다. 그리고 마침내 환상으로만 그리던 엄마를 임종 직전 호놀룰루의 어느 병원에서 극적으로 상봉한다.
그러나 수연이 그토록 찾았던 엄마는 곧 숨지고 만다. 이에 수연은 가장 원형적인 몽골리언의 모습을 보고자 히말라야로 간다. 히말라야는 몽골리언의 발생지이며, 숨진 엄마의 영혼의 고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연은 히말라야 산록 네팔에서 셰르파로 일을 하고 있는 티베트인들을 만난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등반대원들에게 고용되는 셰르파족은 티베트계 몽골리언들이다. 무거운 멍에를 등에 지고 문명사회 등산가들의 몸종 노릇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셰르파족…… 세계를 제패했던 저력은 어디로 가고 어찌하여 등짐장수 산세로 전락했단 말인가? 수연은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짓는다.
수연은 셰르파족의 생활양식이 한국과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한다. 네팔에 도착한 수연은 자신이 오랫동안 두드려왔던 북을 내려놓고, 한국의 당산 고모님이 흔드는 방울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북소리를 찾아 떠난다. 수연은 그 북소리가 엄마의 음성임을 알았다.
"이제 내 인생의 북장단은 끝날 때가 되었다. 아무런 미련 없이 북채를 놓을 때가 온 것이다…… 내일 새벽에는 8000미터 마나슬루 정상을 향해 떠난다. 그 정상에 오르면 티베트의 광야를 넘어 나를 보냈던 발원지, 그 몽고의 분지에서 들려오는 출발의 북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병색과 피곤함이 극한 달한 수연이 카트만두의 시립병원에서 쓴 마지막 편지다. 수연은 1980년 8월 1일 마나슬루 등정에 올랐고, 초입에서 동행한 셰르파를 하산시켰다. 단독 등반을 시도한 수연은 영원히 히말라야 근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익살스런 셰르파는 수연이 티베트로 갔을 거라고도 했고, 어느 늙은 셰르파는 수연이 몽고의 들판에 거의 도착했을 거라고 했지만…… 나는 그걸 믿지 않았다……. 아냐, 수연 누님은 …… 광화문이나 무교동의 어느 찻집에 있을 거야……."
수연 누나의 뒤를 쫒아온 수철의 독백과 함께 희곡은 막을 내린다. <동방의 북소리>는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몽골리언의 비극적인 삶을 조명하면서도 '몽골리언에게 분명히 비전이 있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동방의 북소리>는 MBC다큐드라마를 통해서 감동적으로 감상을 하기도 했지만, 이번 발간된 희곡집을 읽으면서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음미하게 되어 반가웠다. 특히 희곡에 나오는 배경은 기자가 한 때 세계 일주를 했던 현장이어서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이처럼 김상열선생은 우리 곁에 없지만 매년 선을 보이는 새로운 작품집과 새로운 무대에서 우리 곁으로 다시 살아서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고인의 아내인 연극배우 한보경 씨의 열정으로 이루어진 결정체다.
한보경 씨는 매년 희곡집 출간과 연극무대를 거의 빠짐없이 올리고, 김상열연극상, 김상열연극장학금 등 기념사업을 추진해오고 있다. 한 개인이 이러한 기념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녀의 연극에 대한 끝없는 열정이 식어가는 우리나라 연극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살아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죽어서도 사랑을 받는다. 한보경씨의 열정과 사랑으로 엮어낸 희곡집을 저 세상에서 받아본 고인의 마음은 어떠할까? 고인은 자신의 희곡집을 받아보고 분명히 행복해 할 것이다. 두 분의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에 찬탄을 보내며 아울러 고인의 열두 번째 희곡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뉴스게릴라 최오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