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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열대지방에 위치한 필리핀은 1년 내내 덥다.

 

하지만 코딜레라 산맥으로 들어가면 말이 달라진다. 그 주변에 위치한 이푸가오(Ifugao), 마운틴 프로빈스(Mountain Province), 칼링가(Kalinga) 주 등은 서늘한 날씨를 자랑한다. 이 지역에 있는 가게들은 추위에 약한 필리피노들을 위해 털모자를 팔기에 여념이 없다.

 

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서늘한 날씨를 꿈꾼다. 그래서 일까. 그 비싼 전기세와 기름값은 온데간데 없이, 사무실이나 버스에서 에어컨이 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필리핀 생활을 할 때, 가디건 하나 정도 챙겨가지고 다니는 것을 우리는 '센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열악한 교통 여건과 심심찮게 들려오는 산사태, 도로 유실 등의 소식은 코딜레라 산맥으로 가려는 여러 사람들의 발걸음을 망설이게 만든다. 그래서 바기오(Bagio)는 필리피노들에게 항상 신선하게 다가온다. 메트로 마닐라(Metro Manila)에서 6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고, 다른 지역에 비해 가는 길이 잘 닦여 있다.

 

거기에 30만명에 육박하는 인구를 바탕으로 고산지대에 구성된 도시는 여러 대학과 각종 편의시설 등이 자리잡고 있다. 메트로 마닐라와 가장 비슷하면서도 여행 온 기분이 날만한 곳, 그런 점이 필리피노가 바기오를 사랑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필리피노라면 꿈꾸는 서늘함, '바기오'에 있다

 

바기오는 1900년대 초 필리핀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들의 휴양도시로 건설되었다. 이후 진주만을 폭격한 일본은 아시아의 미국의 전략 기지들을 하나둘씩 공격하면서 바기오에 휴양시설로 건설돼있던 캠프 존 헤이(Camp John Hay)를 폭격한다. 1946년 전범으로 체포되어 사형된 일본의 장군 토모유키 야마시타는 바기오를 일본군의 본부로 사용하고 미군은 재탈환을 위해 수많은 폭탄을 바기오에 쏟아붓기 시작한다.

 

오늘의 바기오는 외세들의 침입으로 고통받았던 시간을 간직한 채 새로운 도시로 태어났다. 해방 후 몇 차례 지진을 맞긴 했지만, 필리핀국립대학 바기오 캠퍼스, 필리핀 사관 학교, 세인트루이스 대학 등 많은 학교들이 자리잡아 교육의 도시로 불리고 있고, 서늘한 날씨를 중심으로 발달된 교통과 행정 등의 기능은 메트로 마닐라 다음의 도시로 손꼽는데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도시를 탈바꿈 시켰다. 루손 지역에 공급되는 대부분 야채와 과일은 서늘한 날씨 탓에 맛이 좋은 바기오 출신이며, 산토 토마스 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연 환경은 수많은 이방인들의 발걸음을 바기오로 끌어들이고 있다.

 

외부지역에선 비교적 교통이 닿기 좋은 편이지만, 코딜레라 산맥에 위치한 여느 도시에서 바기오를 가려하면 장시간 버스행을 각오해야 한다. 새벽 5시, 사가다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 꾸야(나보다 나이 많은 이를 지칭하는 따갈로그어)의 재촉 속에 부랴부랴 버스에 올라탄 나는 사가다에서 바기오 가는 길이 그 어느 곳보다 경치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라이스 테라스의 장관과 산맥 사이로 걸쳐있는 구름과 안개의 느낌은 이방인에게 신선한 느낌을 선사해주곤 했다.

 

그런 느낌이 어느 순간 끊어지기 시작한다. 평지에 온 느낌은 들지 않는데 졸리비(Jolibee : 필리핀 패스트 푸드점)가 보이고, 4륜 구동 택시들이 쉴세 없이 움직이는 곳에 내가 들어와있음을 느끼게 된다. 도시 중심에 매캐한 매연 냄새와 분주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 당신이 그것을 깨달았다면 이미 바기오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마냥 천국일 것 같은 이 도시는 오늘날 새로운 문제를 맡고 있다.

 

"SM 몰이 들어오고, 도시가 개발되면서 교통체증이 심해졌어요. 몰이 들어온 건 좋지만 풍경에는 좋지 않고 맑은 공기를 마시려고 하면 도시 외곽으로 나가야 하죠. 바기오가 점점 메트로 마닐라처럼 되는거는 아닌지…"

 

도시가 발달할 수록 벌이가 나아질 것 같은 택시 기사는 그렇게 자기 터전이 고유의 색깔을 잃어가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바기오 끝자락엔 그들의 자부심이 있다!

 

문민정부 시절, 우리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로 쓰이던 국립중앙박물관을 허물고, 첨탑부분을 독립박물관으로 옮겼다. 우리에게 있어서 일제의 기억은 그만큼 쓰리고 지우고 싶은 부분이다.

 

메트로 마닐라에 위치한 필리핀 국립박물관은 스페인 시대의 양식을 따르는 건물에 위치하고 있으며, 상당부분의 유물 역시 당시에 기초하고 있다. '레가스피(Legaspi)'는 그들을 정복하기 위해 이 땅에 발을 들인 초대 스페인 총독의 이름인데, 그의 이름을 딴 도시와 수많은 거리는 지금 필리핀에서 살아가고 있다. 역사를 인정한다고도 볼 수 있고, 합리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이들에겐 익숙하다.

 

그래서일까. 바기오에 위치한 탐아완(Tamawan) 예술인 마을은 새롭다. 1996년 12월, 필리핀 정부의 지원 없이 지역 유지, 지역 주민, 그리고 예술가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마을은 말로는 다 못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바기오에 끝자락에서 지금까지 그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한 번은 바기오에 감기 비슷한 전염병이 돈 적이 있었어요. 결국 그 감기로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는데 너도나도 위험하다고 떠들어대니 사람들이 오질 않았어요. 정부의 지원도 없이 입장료로 운영되는 마을인데… 1년 가까운 시간 동안은 죽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는데요?"

"뭘 어떻게 했겠습니까. 매일 술 마셨지요(웃음)"

 

 

필리핀 루손 북부 지역 전문가로서 론리플래닛 필리핀 편이 탄생할 때 또다른 공헌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예술인들의 대장 '치트' 씨는 이제까지 겪었던 그들의 수많은 어려움을 간단한 대화로 풀어냈다.

 

 

문화에 대한 자부심, 보존으로 이어지다

 

"스페인, 미국, 그리고 일본까지 필리핀을 유린했던 수많은 나라들도 결국 정복하지 못했던게 우리 이고롯(Igorot) 족이고, 이 인근 산악지역이었습니다. 무수한 저항 탓이었죠."

 

탐아완 마을을 지키는 또다른 예술가 '제드'는 이고롯 족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교육의 도시라 불리는 바기오도 예술을 가리치는 단과대학이 있는 학교는 필리핀국립대학 바기오 캠프서 뿐, 그랫서 제드를 비롯한 탐아완 마을의 예술가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연을 벗삼아 자연스럽게 예술을 배웠다.

 

하지만 바기오를 찾아와 그들을 지켜보던 다른나라의 예술인들은 이들의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상호협력프로그램이나 전시회 등을 제안한다. 그런 탓에 '제드'와 또다른 예술가 '조르단'은 공주에 위치한 자연미술가협회 '야투'의 초청을 받아 반년가량 한국에서 머물었다. 그는 한국어를 읽고 쓸 줄 알았으며, 보신탕이 그립다는 말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탐아완 예술 마을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그림, 종이공예, 민속춤, 민속음악 등을 가르치며 이런 영감은 모두 이고롯 문화로부터 비롯된다. 알듯 모를듯한 표정의 '쌀의 신(Rice God)'과 독특한 문양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문화는 요즘 필리핀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들은 정부의 지원 없이 이들 물건을 파는 공간 뿐 아니라 조형물 전시장, 그림 전시장, 그리고 마을 곳곳에는 조각품들은 이들의 세심한 정성이 느껴진다.

 

이들은 방송국 ABS-CBN과 빈민지역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프로그램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렇거든요. 우리가 가진 문화의 우수성이나 자부심이라는 것에 대해 많이 잊고 살아가고 있어요. 특히 없이 사는 아이들은 어떻겠어요. 도시에 와본 적도 없고 박물관조차 본 적 없는 애들이 예술이라는 걸 접해봤겠어요. 애들이 머무는 동안 정신이 없긴 했지만(웃음), 아이들이 우리 것에 대해 알아가고 예술로 치유받는 과정이 참 좋더군요"

 

그들에겐 그만큼 따뜻함이 있고 나눌 줄 아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배고픈 예술인들의 유쾌한 실험, 오늘날 바기오에서 성공할까?

 

예술인 마을로의 조성에 동의한 마을 주민들은 인근 지역으로 이사가는 대신 이 곳에 고용이 되었다. 그렇기에 입장료와 편의시설 수익금 등은 주민들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마을의 정신을 지키는 예술인들은 어떻게 생활을 할까?

 

"우리는 월급이 없지요(웃음). 대신 예술품을 팔거나,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워크샵 등을 개최하여 나오는 돈이 우리의 생활비예요. 넉넉하진 않지만, 매일 술 한잔 마실 돈 정도야 되죠"

 

넉살 좋은 제드는 이렇게 그들의 배고픔을 표현했다.

 

 

'우리의 유산을 지켜주세요'

 

그들의 전시관에 앞에 있는 방명록에 적힌 글귀였다. 자신들의 색깔이라는 것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이들의 입에서 탐아완 마을은 소중한 지점을 이끌어내고 있다. 지역의 사람들이 그들의 혼과 역사를 지키는데 동의하여 조성된 마을, 거기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메마른 감정과 그 삭막함을 적셔주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예술인들.

 

슬픈 역사의 현장 바기오에는 그 어떤 세력도 정복하지 못한 이고롯이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고 그들은 스스로 익힌 그 재주를 이용해 오늘도 소박하게 그 재주를 나누는 즐거움에 빠져있다.

 

"김치를 한 통 가져오면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을 고려해보죠!"

 

제드가 절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던 말인데, 여러분에게만 살짝 속삭였다. 이고롯의 자부심, 그리고 긍지는 그렇게 바기오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블로그와 SBS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위 여행은 9월 초에 다녀온 것 입니다. 현재 사가다-바기오 일부 지역은 태풍과 산사태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태그:#바기오, #필리핀, #루손 북부, #탐아완 예술인 마을, #이고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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