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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비지팡 광장에 늘어서 있는 진마팡과 비지팡. 좋은 일이 뜻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세운 패방이다.
 진마비지팡 광장에 늘어서 있는 진마팡과 비지팡. 좋은 일이 뜻대로 이뤄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세운 패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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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비지팡 일대는 쿤밍의 명동인 난핑제다. 난핑제 한편에 세운 저잣거리 상인상.
 진마비지팡 일대는 쿤밍의 명동인 난핑제다. 난핑제 한편에 세운 저잣거리 상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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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각 도시마다 상징적인 건축물이 있다. 베이징에는 톈안먼(天安門)이, 상하이에는 둥방밍주(東方明珠)탑이, 시안(西安)에는 다옌타(大雁塔)가 있다. 윈난(雲南)성 수도인 쿤밍(昆明)에는 진마비지팡(金馬碧鷄坊)이 있다.

진마비지팡은 쿤밍시 중심가인 닌핑제(南屏街)와 진비루(金碧路)의 교차점에 자리 잡고 있다. 윈난 특색의 민족 건축물로, 높이 12m, 너비 18m에 달한다. 대들보는 조각품처럼 섬세하고 기둥에는 각종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처마 끝은 날아갈 듯하여 웅장함을 더해준다.

진마비지팡은 15세기 초 명나라 선덕제 때 세워졌는데, 예부터 내려오는 전설에서 비롯됐다. 아주 먼 옛날 쿤밍 주변의 한 호숫가에 금빛 찬란한 말이 나타났다. 호수를 노닐던 다른 말과 교배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망아지가 태어났다. 망아지는 커서 하루에 500리를 달릴 수 있었고 외모는 황금빛을 자랑했다. 주민들은 신령스러운 말이라 여겨 '진마'(金馬)라 불렀다.

비슷한 시기 쿤밍의 서산에 푸른 옥과 같은 봉황이 출현했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눈부셔 주민들은 '비지'(碧鷄)라는 이름을 지었다. 쿤밍인들은 진마가 노니는 호수 변 동산을 진마산, 봉황이 나래를 펴는 서산을 비지산이라 불렀다.

세월이 지나 진마와 비지는 사라졌지만, 두 동물을 성스러운 신처럼 모시게 됐다. 이에 두 산 기슭에 각각 진마사와 비지사를 지었다. 명대에는 좋은 일이 뜻대로 이뤄지기(吉祥如意)를 바라는 뜻에서 도시 중앙에 진마팡과 비지팡이라는 패방(牌坊)까지 세웠다.

두 패방은 특정한 시간이 되면 금빛과 푸른빛이 엇갈리는 기이한 자연현상이 일어난다. 지는 태양이 비지팡을 비추면 그 그림자가 동쪽으로 기울고, 이때 뜨는 달이 진마팡을 비추면 그 그림자가 서쪽으로 기운다. 지는 해와 뜨는 달이 하나의 선상에 놓일 때 두 패방의 그림자 윗부분이 엇갈리는데 이를 '금벽교휘'(金碧交輝)라 한다.

지구와 태양, 달의 운행 각도에 따라 생기는 자연현상으로, 60년마다 한 번씩 출현한다. 진마비지팡이 크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수학과 천문학을 접목시킨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위안퉁쓰는 연못을 중심으로 원통보전과 팔각정이 있다. 팔각정은 연못 위에 지어진 불전이다.
 위안퉁쓰는 연못을 중심으로 원통보전과 팔각정이 있다. 팔각정은 연못 위에 지어진 불전이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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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불전 안에는 태국 국왕이 선물한 동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동불전 안에는 태국 국왕이 선물한 동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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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마비지팡은 떠나 위안퉁쓰(圓通寺)로 발길을 돌린다. 위안퉁쓰는 1200여년 전 당나라 중기 때 창건된 사찰이다. 쿤밍에서 오래된 불교사찰 중 하나이자 규모가 가장 크다.

위안퉁쓰는 처음 보타라사(補陀羅寺)라 불렀는데, 원나라 때 전란으로 파괴되어 14세기 초 재건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청나라 초기에는 지금과 같이 팔각정이 세워지고 각종 불전이 들어섰다.

위안퉁쓰는 대승불교, 소승불교, 라마불교 건축양식의 건축물을 모두 갖추고 있다. 건축된 시기로 보면 당나라부터 청나라까지 걸쳐 있어 중국 사찰 건축양식의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다.

사찰은 공원처럼 되어 있어 높지 않은 푸른 산, 비취색의 연못, 오랜 세월의 풍상을 느끼게 하는 다리, 붉은 정자 등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 불전은 연못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식으로 지어졌다. 천왕전(天王殿), 원통보전(圓通寶殿), 팔각정 등이 그것이다. 불전은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다.

대웅전 격인 원통보전 내는 청나라 광서제 때 만들어진 커다란 3존의 부처상이 있다. 부처상 양쪽으로는 높이 10m에 달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기둥 둘레에는 화려하게 채색된 용이 꽈리를 틀 듯이 장식되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사방 벽에는 오백나한상이 놓여 있어 장엄함을 더한다.

원통보전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팔각정이 있다. 팔각정은 연못 위에 지어진 아름다운 불전으로, 그 안에는 천수관음상과 옥불상이 있다. 팔각정 바로 앞에는 소승불교 양식으로 지어진 불전이 나타난다. 바로 동불전(銅佛殿)으로, 안에는 청동으로 만든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동불상은 태국 국왕이 선물한 것으로, 윈난성 정부가 국보 관리하듯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조각양식은 여느 중국 사찰 내 불상과 다르고 예술적 가치도 뛰어나다. 동불상의 존재로 매년 태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불교 신자가 위안퉁쓰를 방문하고 있다. 위안퉁쓰는 윈난성불교협회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타이허궁은 명나라 때 처음 지어져 청나라 초기 오삼계에 의해 재건됐다.
 타이허궁은 명나라 때 처음 지어져 청나라 초기 오삼계에 의해 재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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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를 뒤바꾼 여인으로 평가되는 진원원.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기다.
 중국 역사를 뒤바꾼 여인으로 평가되는 진원원.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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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밍 중심가에는 동북쪽으로 7㎞ 떨어진 밍펑산(鳴鳳山)에는 진뎬(金殿)이 있다. 진뎬이 처음 지어진 것은 1602년 명나라 때다. 당시 윈난성 순무였던 진용빈은 무당산에 있는 타이허궁(太和宮)을 모방하여 진뎬을 건축했다.

진뎬은 명나라 말기 다리(大理)로 옮겨갔는데, 청나라 강희제 때 오삼계(吳三桂)가 다시 같은 자리에 세웠다. 오삼계는 쿤밍 역사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인물이다. 명말청초의 무장으로, 후대인에게는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의 중국 점령을 도운 반역자로 치부되고 있다.

오삼계는 집안 대대로 무장을 낸 명문가 출신이다. 부친 오양도 유명한 장군으로, 1612년 아버지의 근무지인 요동에서 태어났다. 장성한 오삼계는 오양의 공적 덕에 무장으로 등용되어 출셋길을 달렸다. 당시 요동에서 만주족이 흥기하여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1641년 제독에 임명된 오삼계를 만주족을 막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됐다.

근무지인 요서의 닝위안(寧遠)으로 떠나기 전 오삼계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바로 중국 역사의 운명을 가른 진원원(陳圓圓)이다. 진원원은 쑤저우(蘇州) 출신의 명기(名妓)로, 외모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가 뛰어나고 재주도 많았다.

숭정제의 총애를 받던 전비(田妃)가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사람을 내려 보내 진원원을 불려 들였다. 진원원은 곧 숭정제를 매료시켰지만, 지나친 미모와 요기가 문제였다. 황제의 옥체를 망칠 수 있다는 어의들의 간언으로 숭정제는 진원원을 오양에게 주었다.

오양은 본인이 이미 늙은 데다 아들이 진원원을 마음에 두고 있어 오삼계에게 넘겼다. 황궁에서 벌어진 연회석상에서 본 진원원에게 반했던 오삼계는 크게 기뻐했다.

오삼계는 진원원을 바로 첩으로 삼고 황제에게 충성을 다짐하며 근무지로 떠났다. 명나라가 오삼계를 닝위안으로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닝위안에 위치한 산하이관(山海關)이 요동에서 베이징으로 통하는 군사 요충지이자 최후의 방벽이었기 때문이다.

진뎬은 무게가 200톤을 넘는 청동으로 지어진 전각이다.
 진뎬은 무게가 200톤을 넘는 청동으로 지어진 전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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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뎬 안에 안치된 신선상은 오삼계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
 진뎬 안에 안치된 신선상은 오삼계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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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가 닝위안으로 떠난 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농민군의 기세는 들불같아 수개월만에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숭정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오양 등 대신들은 이자성에게 항복했다. 아버지와 가족이 농민군 수중에 떨어지자, 오삼계도 이자성에게 투항하려 했다.

하지만 이자성이 오양을 참수하고 휘하 부장인 유종원이 진원원을 강탈하자 오삼계는 마음을 바꿨다. 청나라 초기 시인 오위업(吳偉業)은 '원원곡'(陳圓圓)에서 '육군이 함께 흰 상복을 입고 통곡하니(慟哭六軍俱鎬素), 노기가 충천하여 붉은 얼굴이 되었네(沖冠一怒爲紅顔)'라고 노래했다.

오삼계는 바로 만주족에 투항해 산하이관을 열었다. 오삼계와 만주족이 몰려오자, 이자성은 베이징을 탈출하며 오삼계 일족을 몰살시켰다. 더욱 분노한 오삼계는 이자성을 끝까지 추격하여 농민군을 말살시켰다.

명의 장군에서 청의 공신으로 신분이 바뀐 오삼계는 중국 서남부에 남은 명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는 데 앞장섰다. 청나라는 오삼계에게 윈난의 행정군사적 전권을 일임했다. 이 권한을 이용해 오삼계는 윈난과 인근 구이저우(貴州)에 독립적인 번국(藩國)을 세워 통치자로 군림했다.

오삼계가 진뎬을 재건한 데에는 연인인 진원원을 위해서였다. 번왕이 된 오삼계는 독자적인 왕국을 꾸리고 왕궁을 세웠다. 진뎬은 높이 6.7m, 너비 7.8m에 달하는데 모두 청동으로 지어진 전각이다. 기둥, 지붕, 문 등이 청동으로 무게가 200톤을 넘는다.

건물 안에는 신선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오삼계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다. 대들보에는 쿤밍의 아름다운 풍광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진뎬은 청동으로 만든 중국 4대 동전(銅殿) 중 하나로,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고 보존 상태가 가장 완벽하다.

진뎬을 만들만큼 오삼계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오삼계는 왕이 된 뒤 왕비로 다른 여자를 세우고 여러 명의 첩을 두면서 진원원을 멀리했다. 진원원도 곡절 많은 인생에 무상함을 느껴 출가해 비구니가 됐다.

뒷날 강희제가 철번정책을 단행하자 1673년 오삼계는 상가희, 경정충과 함께 삼번의 난을 일으켰다. 황제 자리까지 오르지만 1678년 병으로 죽었다. 오삼계 사후 삼번의 세력은 약해져 1681년 멸망했다. 후대인들은 오삼계가 진원원 때문에 명나라를 배신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진뎬은 이런 오삼계와 진원원의 애정사가 숨어 있다.

진위안에서 바라본 다관러우와 가산, 다리 등의 전경.
 진위안에서 바라본 다관러우와 가산, 다리 등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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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관러우는 중국 4대 명루 중 하나다. 문 양쪽 대련은 180자에 달해 '천하제일장련'으로 꼽힌다.
 다관러우는 중국 4대 명루 중 하나다. 문 양쪽 대련은 180자에 달해 '천하제일장련'으로 꼽힌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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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뎬을 떠나 서남쪽에 위치한 다관(大觀)공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다관공원은 1682년 청나라 강희제 때 조성됐다. 1690년 윈난성 순무였던 왕지원이 다관러우(大觀樓)를 비롯한 여러 건축물을 지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규모로 커졌다.

다관공원은 크게 진화푸(近華浦), 시위안(西園), 난위안(南園)으로 나뉜다. 진화푸는 명청대의 원림(園林)문화의 집대성이다. 고대와 근대의 원림 발전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데, 윈난의 조경 발전사를 대변한다. 시위안은 현대식 원림 형태로, 쿤밍후(昆明湖)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 난위안은 중국과 서양의 원림 문화를 혼합하여 조성됐다.

공원 중앙에는 다관러우가 있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걸어 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배를 타고 가야만 했다. 배를 타는 곳은 진화푸의 유래와 연관되어 있다. 본래 배 출발지는 진위안(疹園)이라 불렸는데, 타이화산(太華山) 봉우리를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진화푸로 달리 불려지게 됐다.

다관러우 앞에는 작은 가산(假山)이 있다. 태호석(太湖石)으로 만든 것인데, 중국인이 얼마나 가산에 집착하는지 잘 보여준다.

다관러우는 중국 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우한 황어러우(黃鶴樓), 유에양 유에양러우(岳陽樓), 난창 덩왕러우(滕王樓)와 더불어 중국 4대 명루(名樓)로 꼽힌다. 다관러우는 3층 건물로, 가장 위층에는 건륭제가 직접 하사한 편액이 걸려 있다.

다관러우의 문 양쪽에는 건륭제 때 유명 서예가였던 손염옹이 쓴 180자의 대련(對聯)이 적혀 있다. 대련은 '천하제일장련'(天下第一長聯)이라 불릴 정도로 서체가 힘 있고 유려하다. 쿤밍의 아름다움 자연풍광을 묘사한 글로, 다관러우가 명루로 등극하게 된 계기가 됐다.

다관러우에 오르면 공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노을이 질 무렵 물 속에 비치는 다관러우의 모습은 절경이다. 다관러우 옆에서는 양팔이 없는 무명 화가가 입으로 글씨를 써서 팔고, 호수 한편에서 시민들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매년 음력 8월 15일에는 윈난 내의 소수민족들이 몰려와 보트놀이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진뎬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쿠이싱러우(魁星樓). 전각 안에는 오삼계의 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진뎬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쿠이싱러우(魁星樓). 전각 안에는 오삼계의 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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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핑제로 들어가는 입구에 건축된 또 다른 패방 중아이팡(忠愛坊). 중아이팡 앞 공원에는 간단한 즉석 마사지를 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난핑제로 들어가는 입구에 건축된 또 다른 패방 중아이팡(忠愛坊). 중아이팡 앞 공원에는 간단한 즉석 마사지를 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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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Tip

진마비지팡은 500여년 동안 세 차례나 파괴되어 복원됐다. 지금 볼 수 있는 진마비지팡은 1998년 건축된 것으로, 광장과 함께 조성된 것이다. 광장 주변에는 골동품과 푸얼(普洱)차를 파는 상점이 많아 언제나 많은 관광객이 붐빈다.

위안퉁쓰는 쿤밍시 북쪽 위안퉁산 자락에 있는 위안퉁제에 자리 잡고 있다. 위안퉁쓰의 개방시간은 8:00~18:00이며, 입장료는 5위안(한화 약 850원)이다. 진마비지팡에서 버스로 위안퉁쓰를 가려면 A2, 4, 101번을 타면 된다. 택시를 타고 갈 경우 12위안(약 2050원)이 소요된다.

진뎬은 밍펑산 정산에 위치하고 있다. 진뎬의 개방시간은 매일 8:00~18:00이며, 입장료는 20위안(약 3400원)이다. 진마비지팡에서 버스로 진뎬에 가려면 10, 71번을 타면 된다. 택시를 타고 갈 경우 20위안 안팎이 소요된다. 진뎬 왼쪽 건물에는 오삼계와 진원원의 사랑에 관한 역사자료가 모아져 전시되어 있다.

다관공원은 시 중심가에서 서남쪽으로 2㎞ 떨어진 다관루(大觀路)에 자리 잡고 있다. 다관공원의 개방시간은 매일 7:00~22:00이며, 입장료는 20위안이다. 다관러우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따로 입장료를 2위안 내야 한다. 진마비지팡에서 버스로 진뎬에 가려면 4, 52, 54번을 타면 된다. 택시를 타고 갈 경우 10위안(약 1700원)이 소요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중국, #윈난, #운남, #쿤밍, #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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