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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으로 살았던 나인영(좌)과 종교인으로 살았던 나철(우)은 두 인생을 살았던 동일인이다
 정치인으로 살았던 나인영(좌)과 종교인으로 살았던 나철(우)은 두 인생을 살았던 동일인이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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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대신이 일본 진보당 영수 대외중신에게 한국정부 변경할 일을 의논할 차로 라(나)인영 오기호 양씨를 일본에 보냈더니 그 의논이 합의치 못하야 불원간에 귀국하겠다는 통신이 왔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12.25.)

여기서 라(나)인영은 나철의 아명으로 그는 1863년 12월 2일, 당시 낙안군(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나 정계와 종교계에서 활동하다가 1916년 8월 15일 만주땅 구월산 삼성사에서 유서를 남기고 53세를 일기로 순교한 인물이다.

정치인 나인영은 어떤 활동을 했는가?

나인영은 조선을 상대로 열강의 각축전이 한창이던 조선조말 정계에 입문해 은사이자 정치적 신념을 같이 한 김윤식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한일합방이 이뤄지기 전에 네 차례나 일본을 방문, 일제침략의 부당함을 알림과 동시에 민족의 적이라 판단하여 을사5적 암살을 시도한 일은 가장 뚜렷한 정치적 활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인영은 1891년 비교적 늦은 나이인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승정원(조선시대 국왕의 비서기관) 가주서와 승문원(조선시대 외교문서를 담당한 관청) 부정자의 자리를 거치는 등 중앙 관직생활을 하다가 1895년 33세 때 징세국장으로 임명됐으나 관직을 버리고 사회정치활동에 투신했다.

승정원과 승문원에서 근무하면서 봤던 업무와 맺었던 인연들은 이후 그가 관직을 그만두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네 차례나 들어가 일본 정재계의 인사들과 면담을 하는 밀사 성격의 일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그가 일본에 들어가 외교활동을 한 것은 1905년부터 1909년까지 모두 네 차례이며 체류기간은 총 1년 2개월간이다. 이 시기에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조선 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는 의견서를 전달하고 동양평화를 주장했으며 단식농성까지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다는 소식을 알게 돼 자신회를 통해 을사5적을 처단하기 위해 동지규합을 하는 한편 무기를 구입해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로 끝나 전라남도 무안군의 지도(智島)로 유배까지 당하게 된다.

이후, 애국계몽운동이나 국채보상운동에도 발을 들여놓게 되지만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민족종교에 관심을 기울이더니 단군교를 선포하였는데 그때가 1909년의 일이다. 이때 그는 어릴 적부터 사용하던 나인영을 버리고 나철로 개명해 제2의 인생을 살게 된다.

나인영으로서의 삶이 혼란기 속에서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여러 무리들 속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특정 정치집단의 세속적 이익을 위한 행동과 결코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비판적 시각이 있기는 하지만 나철로서의 삶은 사분오열된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불러일으킨 획기적인 일이었다.

종교인 나철은 어떤 활동을 했는가?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7월 2일자에서 '나인영, 오기호씨가 근래에는 정계운동을 포기하고 조국종교를 진흥할 목적으로 종교계에만 헌신 종사한다'라고 적고 있다.

바로 이때 그가 정치사회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민족종교를 통해 한민족을 단결시키고 반도사관에서 대륙사관으로 의식을 바꾸려는 시도와 함께 국운의 쇠퇴를 안타까워하며 민족정신인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이념을 바탕으로 인류평등과 세계 평화를 부르짖게 된 것'이다

그는 1909년 음력 1월 15일 자시를 기해 동지들과 함께 대황조(단군)신위를 모시고 천제의 대례를 올렸다. 그런 후 단군포명서를 발포하고 단군교단을 창시했는데 중광 60년사에는 '이날은 고려 원종때 몽고의 침입으로부터 700년간 폐새(閉塞)된 고대 민족문화사의 맥이 단군교(대종교)를 통해 다시 연결되면서 대황조의 이념을 밝히는 중광의 원년이 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종교인 나철은 대종교 중광 정신을 살려 다양한 항일독립운동단체를 조직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정의단, 북로군정서, 신민부, 서로군정서 등이며 또한 민족교육에도 힘써 박달학원, 동창학교, 백산학교, 대종학원 등을 설립하기도 했다.

당시 이러한 조직들은 민족종교가 바탕이 돼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벌였는데 만주로 대종교의 총본사를 옮긴 후 교도수가 30만 명에 이르는 등 세력을 과시했다. 이에 중국에서도 위협을 느낀 나머지 대종교 포교활동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고 결국 유서를 남기고 순교하고 말았다.

나철은 순교 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정계에 생각을 끊고 종문에 헌신하여 천하를 구제하는 것을 나의 임무로 삼았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정치인 나인영으로, 종교인 나철로 두 인생을 살다 간 53년의 세월, 둘 다 독립의 한을 풀지는 못했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민족의 국운이 쇠퇴하던 시기에 우리 민족이 바로 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족적으로 남는다. 특히, 나철로서의 삶은 한민족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뿌리내림으로써 자긍심을 심어준 의미 있는 삶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나철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그의 묘는 현재 중국 화룡현 청파호에 있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낙안군, #남도TV, #나인영,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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