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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인사를 부모로 둔 자식들은 행복할까? 생부모에게 버림 받고 어린 나이에 타국으로 입양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평생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두 조건을 동시에 갖췄다면 그의 삶은 희극일까, 비극일까.

이 두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는 사람이 바로 아키오 부이용이다.

일본에서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그는 프랑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그를 입양한 사람은 프랑스의 유명 재즈 음악가 조 부이용(Jo Bouillon)과 제1차 세계대전 직후 1920년대에 파리 댄스무대를 장악했던 유명 댄서 조세핀 베커(Josephine Baker)였다. 그런데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아키오의 생부가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동서양을 넘나들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경험해온 아키오의 삶을 살펴보았다.

내 어머니는 파리의 유명 댄서, 조세핀 베커

무대에 선 조세핀. 1927년.
 무대에 선 조세핀. 1927년.
ⓒ Wa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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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계 혼혈아 출신의 무명댄서였던 조세핀은 1925년, 19세의 나이로 파리 무대에 처음 데뷔했다. 바나나 띠와 간단한 가슴가리개로 겨우 몸을 가린 채 반나체로 정열적인 리듬에 맞춰 열정적으로 춤을 추며 샹젤리제 극장의 무대를 뒤흔들었던 화려한 데뷔였다. 당시 흑인 댄서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파리 무대에서 조세핀의 출연은 획기적이었다.

이어 가수로도 데뷔한 조세핀은 1931년 '내겐 두 연인이 있어요'(J'ai deux amours, 미국과 프랑스를 가리킴)로 획기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이렇게 파리 카바레 무대에서 성공에 성공을 거둔 조세핀은 1936년, 모국인 미국에서 공연을 시도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불어로 말한다고, 불어 악센트가 섞인 어울리지 않는 영어를 쓴다고 트집을 잡았다. 당시의 미국인들에게 흑인은 흑인일 뿐이었다. 공연은 실패로 끝났고, 조세핀은 가슴에 영원한 상처만을 안고 프랑스로 되돌아왔다.

이듬해인 1937년, 조세핀은 프랑스인 장 리옹(Jean Lion)과 결혼함으로써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조세핀은 모국으로부터 늘 상처만 받았다. 미국인들은 언제나 알게 모르게 조세핀 자신이 흑인임을 일깨워주었다. 자신을 새로 받아들인 프랑스에서 조세핀은 비로소 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제2의 모국이 된 프랑스가 제2차 대전으로 고전 중일 때 조세핀이 레지스탕스에 가입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반 스파이 활동을 벌일 때 악보를 이용해 중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이 일로 전쟁 후 그녀는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다.

그러나 모로코에서 레지스탕스로 활약할 때 감염됐던 바이러스의 후유증으로 사산을 하게 되고, 이후로 더는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다. 이 사건은 그녀 인생의 최대 불행이었지만, 최대 행복의 시작이기도 하다. 

무대에선 조세핀. 좌측 사진은 1927년, 우측사진은 1926년.
 무대에선 조세핀. 좌측 사진은 1927년, 우측사진은 1926년.
ⓒ Wa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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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 12명 입양한 조세핀... 아키오와 만나다

획기적인 공연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조세핀은 1947년, 프랑스 중부 도르돈느 지방에 있는 밀랑드 성을 구입한다. 아이들과 동물을 사랑했던 조세핀은 성에 여러 동물을 길렀다. 그리고, 다섯 번째 남편인 조 부이용과 입양계획을 세운다.

어려서부터 흑인이라는 이유로 괄시 받고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의 불행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조세핀은 입양을 통해 인류 평화를 모색하는데, 그중 하나가 세계 각국의 아이들을 입양하겠다는 것이었다. 얼굴색과 인종, 종교가 달라도 인류가 평화롭게 한 지붕 밑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첫 번째 입양을 위해 향한 곳은 일본. 1954년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지인이 운영하는 고아원을 찾았다. 이 고아원은 혼혈 고아원이었는데, 당시 아키오도 이 고아원에 머물고 있었다.

생후 18개월이던 아키오는 이미 아장아장 걸음을 떼기 시작할 나이였는데 조세핀의 치마폭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당초 일본 영아만 입양할 생각이었던 조세핀은 어린 아키오가 안쓰러워 같이 입양하기로 결심했다.

아키오와 자노(일본 영아의 프랑스 이름) 입양을 시작으로 조세핀은 총 12명의 아이를 입양한다. 나이순으로 국적을 살펴보면 아키오(국적 불분명), 일본,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서아프리카공화국, 핀란드, 알제리 2명, 모로코, 프랑스 3명(그중 1명은 유대인) 등으로 아들 10명에 딸 2명이다.

입양한 자식들에게 둘러싸인 조세핀.
 입양한 자식들에게 둘러싸인 조세핀.
ⓒ cinememori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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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아키오의 말에 의하면 조세핀이 많이 알려진 나라의 아이들이라고 한다. 백인, 흑인, 동양인, 인디언, 아랍인, 유대인 등 세계 모든 인종과 종교가 어우러진 이 아이들을 조세핀은 '무지개 대가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모국인 미국인은 없었다.

10년에 걸쳐 12명의 서로 다른 국적의 아이들을 입양한 조세핀은 그 이유로 남편과 헤어져야 했다. 6명까지 입양하는 데 동의했던 부이용은 12명까지 강행하는 조세핀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갔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물려준 아이들이 모두 성인이 될 때까지 이들은 부부로 남았다. 가끔씩 아이들을 만나러 프랑스에 들렀던 부이용은 그때마다 아이들의 교육과 성장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2명의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돈이 많이 들었다. 조세핀은 말년에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이 살던 성마저도 경매로 처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행히 친구였던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가 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모나코에 작은 집을 한 채 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조세핀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다시 무대에 설 결심을 한다.

1974년, 68세의 나이로 오른 모나코 무대는 성공이었다. 그 기세를 몰아 다음해인 1975년, 69세의 나이로 파리무대에 선 조세핀. 파리의 유명 인사들로 가득 찬 무대에서 조세핀은 다시 한 번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녀는 공연 후 뇌출혈을 일으켜 4월 12일 사망한다.

1956년 크리스마스 때 찍은 가족사진.
 1956년 크리스마스 때 찍은 가족사진.
ⓒ ULLSTEIN BILD/A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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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오의 생부는 누구? "한국인으로 알고 있어요"

필자는 올 여름 휴가 때 밀랑드 성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조세핀 베커 박물관이 되어버린 밀랑드 성안에는 조세핀이 살았던 아파트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것은 물론, 그녀가 입었던 무대의상, 사진 등등이 전시돼 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방을 둘러보는데, '조세핀의 장남 한국인 아키오의 방'이라는 설명이 나왔다. 귀가 솔깃해졌다. 이름이 아키오인데 한국인이라고? 성 입구에 있는 부티크에 물어보니 "실제는 일본인인데 한국인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거예요"라는 답변이 돌아왔지만,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아키오를 수소문했다.

한참 뒤인 9월 7일, 카지노 드 파리(조세핀 베커가 1931년 이 무대에서 13개월 동안 성공적인 댄스공연을 펼쳐 '검은 비너스'라는 별명을 얻은 역사 깊은 공연장)에서 문제의 인물을 만났다.

조세핀 베커의 장남 아키오씨.
 조세핀 베커의 장남 아키오씨.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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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57세가 된 아키오씨의 원명은 아키오 야마모토이다. 요코하마 출생으로 생후 2~3개월 만에 생모에게 버림 받았다. 당시 17~18세로 추측되는 젊은 여인이 "조만간 찾으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아기 아키오를 한 담배 가게에 맡겼다고. 아기 아키오의 목에는 이름과 생년월일, 출생지가 적힌 메달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젊은 여인, 즉 아키오의 생모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가게주인은 며칠 기다리다가 아이를 고아원에 맡겼고 아이는 16개월 후에 운명적으로 조세핀을 만나 프랑스로 향했다.

아키오는 생모가 일본인이라는 것은 알지만 생부가 누구인지는 전혀 모른다. 당시 가게 주인의 추측과 아키오가 있던 곳이 혼혈 고아원이라는 점으로 봐서 아마도 미국 군인이거나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아키오씨가 100% 동양인인 것으로 보아 미국인은 아닐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키오는 1952년 7월생이다. 아키오 생모가 1951년 10월경에 미지의 생부를 만나서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추측이 나온다. 이때는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는데 당시에 한국인들이 도쿄 근처의 항구, 요코하마에 드나들기도 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960년대 초에 조세핀이 한 언론 인터뷰에서 아키오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라고 강조했다는 점이다. 어린 아키오도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한국인이라고 소개했다.

조세핀 대가족이 살았던 밀랑드 성.
 조세핀 대가족이 살았던 밀랑드 성.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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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원히 위대한 조세핀 베커의 아들"

아키오는 조세핀의 마지막 무대를 보지 못했다. 조세핀이 마지막 무대에 서기 전인 1974년 1월에 엄마와 심하게 다투고 아버지를 찾아 아르헨티나로 떠나서 6년 반을 머물렀다.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지 3개월 만에 발생한 조세핀의 죽음을 보지 못한 게 여전히 한으로 남는다고 한다. 조세핀은 모나코에 묻혔고, 부이용이 아직 미성년자인 아이들을 아르헨티나로 불러 1984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돌봤다.

아키오는 지금도 이 많은 형제자매들을 만난다. 그중 한 명은 사망했고, 나머지는 유명인사 자식답지 않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아키오도 호텔 운영을 하다가 지금은 평범한 일상을 보낸다. 동료들은 자신이 조세핀의 아들인 것도 모른다고.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조세핀 베커. 그러나 12명의 아이들에게 그녀는 다른 엄마와 같은 평범한 엄마였다. 다정다감하면서도 자식들 교육에 엄격했던 엄마. 아키오씨는 엄마의 인생을 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한다.

"엄마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던 대로 불태우며 살다간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우리를 보살폈던 엄마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분은 우리 자식들을 통해서 인종과 종교가 달라도 분쟁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셨다."


태그:#조세핀 베커, #흑인 댄서, #아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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