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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제일 소중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타고난 수명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고문으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세상과 하직했다면 그 슬픔은 배가된다. "어찌 그런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도 분노하고, 가족과 친지들은 한없는 참적의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왔을 터이다.

 

나는 69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원한의 38선 조국분단으로 인해 수없이 많은 죽음들을 목도 했다. 전쟁 와중에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 그리고 공권력에 고문당하고 재판도 없이 무참히 죽어간 죽음이었다. 6.25 전후에 나의 맏형(영철)의 죽음에서부터, 민주화의 좌절과 시련의 유신정부 하에서 1974년 서울법대 최 교수와, 그리고 87년 초에 박 군의 고문치사로 세상을 떠난 영혼을 위로하려 한다. 

 

일찍이 60년 전에, 그러니까 1948년 남한 정부수립이 되고 그해 10월에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여순사건은 국군14연대와 주변의 많은 민간인들이 조국분단의 아픔을 극복하려고 민족통일의 길로 나아가기를 염원한 항쟁이었다. 이미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남단의 4.3사건으로 수많은 제주민중이 희생된 것은 민족의 아픔과 슬픔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사연은 나의 맏형이다. 의암 영철 형은 반쪽해방이 되면서 중학을 졸업하고 광주군청에 근무했다. 3년의 군정시간에 통일정부를 위해 지하운동의 일원이었기에 여순사건 이후 수배자가 되었다. 정부의 보도연맹 가입을 회유 받았지만 형은 가입하지 않고 지하운동을 계속하다 1949년 2월에 체포됐다. 1개월 동안 온갖 고문에도 조직을 불지 않자, 경찰은 재판도 없이 야산에서 3발의 총탄을 형의 관자놀이에 쐈다. 형은 22살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당시 조직을 불라는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많은 동지들이 희생 당할게 뻔했다. 대비되는 여순14연대 반란사건에 연류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박 소령이 군복을 벋고 군속으로 있다가, 군내 좌익 동료들의 명단을 건네 처벌받고 다시 소령으로 원대 복귀한 사실이 있었다. "벗을 위해 목숨 내놓은 일"은 성경에도 나와 있는 제일가는 귀감이라 했는데 과연 형과 박 소령의 행동에 어떤 평을 내릴 수 있을까?

 

내가 9살에 형의 죽음을 목격하고 시신을 죽관으로 안장해 드렸다. 정부는 60년 만에 과거사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윤영철은 정부와 반대되는 남북통일을 주장하다 붙잡혀, 조직을 불라했으나 실토하지 않자 재판도 없이 총살을 당해 운명한 사실을 규명했다" 신청 후 2년 만에 진상규명이 되고 명예회복에 이르고 있지만 완전한 정부의 해결책은 아니다. 이번에 형 외에도 외삼촌과 당숙이 진상규명이 되었지만 많은 희생자들은 아직도 요원하다.

 

두 번째 사연은 박정희 3선 개헌 후에 유신헌법으로 세상이 공포 분위기에 사로 잡혀 있을 때에 서울법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최 교수의 죽음이다. 1974년 10월19일 테니스회장이던 최 교수와 총무였던 나는 날마다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매일 테니스장으로 출근하다시피 한 최 교수가 그날 나타나지 않았다. 3일이나 보이지 않아 나는 교수실과 댁으로 수소문을 했다. 그런데 그는 21일 아침 신문에 "최 교수 간첩행위가 사실로 드러나자 중정6층에서 투신자살" 을 했다는 보도에 나왔다. 나는 너무나도 충격을 받고 아연했다.

 

그러면 나는 간첩과 3년여를 함께 테니스 치고 술을 마시고 지냈단 말인가? 황당하기 그지  없는 나날을 보냈다. 허나 그 보도가 있은 지 1주일 만에 최 교수 간첩단 사건에 대한 기사가 났다. 최 교수와 함께 간첩단에 연류 된 모두가 무혐의로 풀려났다는 보도에 나는 분하기만 했다. 최 교수 살아있었다면 분명 혐의를 벋고 풀려났을 터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모두가  정부에서 그를 간첩으로 몰아 학원가를 평정하려 했다고 수근 거렸다.

 

학교와 학생들 사이에도 분위기가 싸늘했다. 최 교수와 인연이 깊은 교수 학생이 많았기에 조사를 받고 떨고 있었다. 교수가족들은 간첩행위에 천부당 만부당 하다며 시신인수를 거부했으나, 망자의 영혼을 달래자는 최 교수 부친의 설득에 장례를 치르고 마석공원에 그를 묻었다. 당시 8살이던 최 교수 아들이 고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유학했던 쾰른대학에서 수학하여 부친과 같은 민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귀국했다. 독일대학의 정성이 크기만 했다. 아들은 국내 법과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버지가 사망한 지 20년 해였다.

 

교수가 된 아들과 간첩조작사건진상규명 단체는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최 교수 진상규명을 신청하였다. 당시 중정에 근무 중인 최 교수 동생이 형과 임의동행을 하여 중정에서 조사를 받는다. 간첩협의를 씌우려 했으나 사실이 아니라 하니, 결국은 고문을 하여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런 사실을 의문사에서 인정하고 그 결과로 재판부는 그에 따른 배상을 명령했다. 나는 가끔 찾는 묘소에서 최 교수님과 테니스를 하던 추억들을 더듬는다. 뒤늦게나마 간첩누명을 벗고 명예회복을 하였지만 42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너무도 아쉽다.

 

세 번째 사연은 6월 항쟁이 일어난 해인 1987년 1월, 내가 근무했던 서울대 학생 박 군이 시위주동자 선배인 박종운의 행방을 불라며 고문을 받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선배의 행방을 불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남영동 분실에서 박 군을 조사하면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져 죽었다"는 엉성한 사유를 밝히고 있었으나 믿는 사람이 없었다. 전국에서 박 군을 살려내라는 데모와 시위가 번져갔다. 거기에다 5공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여 유신이후 15년 만에 내손으로 대통령을 뽑자는 직선제 헌법쟁취의 열망을 완전 무시하고 있었다.

 

박 군의 죽음과 더불어 4.13 호헌조치는 불속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더구나 그해 5.18 광주항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7주년 미사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례하고 김승훈 신부가 "박군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을 발표하였다. 그러니까 당초 경찰이 발표한 박군 고문치사에 두 경찰관 외에 3명의 실질적인 주범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로 인해 정국은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정부는 민심수습을 위한 중폭 개각을 단행했다. 우연하게도 지인이 총리에 지상발령을 받고 취임했다. 나도 총리를 보좌하게 되었다.

 

유월항쟁은 나라가 위란에 빠지느냐 안정하느냐 하는 기로에 선 역사적 순간이었다. 정국은 4.19혁명과 유사한 그런 분위기였다. 군이 출동한다고 해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20년 집권시나리오 각본대로 강경책으로 나오고 있었다. 만약 박 군이 박종운 선배를 불었다면 그는 아마도 죽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양심은 그렇지 않았다. 총리는 부도덕한 정권의 신뢰를 위해 박 군 고문치사은폐조작 사건을 철저히 밝히겠다고 밝혔다. 학자 총리였던 그는 역사의 인식에 다가가는 총리의 역할에 노심초사 했다.

 

6월9일 연세대학생 이군이 경찰이 정면으로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중환자실에서 생명을 위협받고 있었다. 6월14일 명동성당의 농성을 풀고 6월18일 계엄령이 없다는 총리의 담화를 발표했다. 6월26일 국민평화대행진 후, 국민이 원하는 직선제 헌법 개정하여 민주화 방향의 정치일정을 모색했다. 여기에는 당시 총리를 보좌했던 반비서관과 내가 적극적으로 총리에 직언하고 대통령에게 건의토록 했다. 사면초과였던 5공은 결국 국민에 항복하는 "6.29선언"으로 모든 시위 데모가 일시에 사라지고 평화를 찾고 있었다.

 

혁명으로 갈 정국에서 다음해 88올림픽을 생각하지 않고 국민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면 나라는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는 현실에 다가갔다. 박군의 죽음에 이어 이군이 7월5일 운명했다. 7월9일 연세대 발인제와 신촌로터리 거리제 시청 앞 추모제에는 100만의 추모인파가 모여 이군을 떠나보냈다. 일부에서 6.29가 속이구라고 평도 있었으나 만약 6.29가 없었다면 시청 100만의 군중이 순순히 추모만 했을까? 우리역사는 언제나 죽음이 있고 난 다음에야 반성하는 것 같다. 죽음을 몰고 오기 전에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생명을 보존할 수는 없는 것일까. 희생자가 남기고 간 유훈의 뜻이 깊다.

 

근 현대사에 김주열군의 죽음, 광주의 죽음, 그리고 박,이군의 죽음과 이어진 효순 미선이 죽음 등이 국민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금년도 너무나도 충격적인 죽음들이 있었다. 노동현장의 죽음과 89세로 오직 조국통일의 선구자였던 강 목사님의 안타까운 자결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 64년의 분단사에 가장 소중한 지난 6.15와 10.4선언의 주역이었던 전직 대통령을 두 분이나 함께 잃었다. 너무나 슬픈 국민들의 마음이다. 공권력이 몰고 간 죽음에 대한 살아 남은 자의 마음가짐은 어떠할까. 다시는 그런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염원한다. 수명를 다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에게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 * 죽음에 이르는 특별한 이야기. 공모글

나는 6.2전쟁전후 베트남전 그리고 많은 죽음을 목도했다. 내가족 형과 동생 그리고 외삼촌 당숙들 그리고 이웃 사람들, 모두가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이다. 분단사에 민주역사에 죽어간 그 영혼들을 생각하며 쓴 글이다.


태그:#고문, #재판, #명예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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