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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하면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그림이 참 많을 것 같다. 이 순간의 내 눈앞에는 돈 궤짝을 끌어안고 운명하셨다는 외조부님과 서책을 옆에 낀 채로 눈보라 속에 목숨을 놓아버린 조부님이 겹쳐진다. 겹눈으로 보는 죽음의 사회사가 내 몸에 유전인자처럼 새겨져 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 두 가지의 극단적인 죽음의 방식이 내게 주는 메시지는 예사롭지가 않다.

지금은 치매라는 이름의 몹쓸 것에게 모든 생활을 압류당한 까닭에 거의 아무 것도 기억을 못하지만, 총명하던 시절의 어머니에 따르면 외가는 일정 치하에서 식모를 부리는 등 제법 부를 쌓아두고 있었던 것 같다. 전라남도 장성 산골짜기 소읍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서 부를 축적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본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일정 부분 친일도 했다고 여겨진다.

어느 해 홍수가 나서 황룡강이 범람하고 모든 사람들이 산으로 피난을 가는 사태가 발생한다. 우왕좌왕 정신이 없는 와중이라 누가 어디로 피난을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할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피난이 완료된 뒤에서야 집안의 최고 어른이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사흘간의 피난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집안의 최고 어른께서는 돈 궤짝 세 개와 자신의 육체를 횃댓보로 친친 동여맨 채 이승을 떠나 있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 열한 살. 이듬해 외조모께서는 가산을 모두 처분해 버리고 산속의 절로 출가를 하고 말았다. 열두 살의 어머니는 산 너머 고창의 큰댁에 맡겨졌다. 그렇게도 충격적인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외조모께서는 아마 산다는 것의 무상함을 온 몸으로 절절히 느끼셨을 터이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은 어머니에게도 이심전심 전해지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시절을 회고하는 어머니의 눈동자가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듯이 그렇게도 평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튼 열두 살의 어머니는 나이 한 살이 더해진 이듬해 큰댁의 올케언니 주선으로 결혼을 하게 된다. 상대는 올케의 친정동생으로 한 살이 많았다. 친정아버지가 서당 훈장으로 이 마을에서 일 년, 저 마을에서 일 년 하는 식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데다 홀아비였던 까닭에 서둘러 혼례식을 강행했다. 열세 살과 열네 살로 맺어진 부부는 해방이 되고 전쟁이 터졌다가 끝나고 사회가 어지간히 안정이 된 뒤에까지도 아이를 얻지 못했다. 뒤늦게 내가 태어나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조부께서 돌아가신 뒤였다.

 불에 타고 남은 서간집
불에 타고 남은 서간집 ⓒ 김수복

조부께서는 유학을 하셨지만 도가에도 일정 부분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잠언이 가훈처럼 전해지고 있을 리가 없다. 육신이 너무 편안하면 정신이 썩는다는 말로 풀이되는 이 말씀은 모르긴 몰라도 내 영혼에 마치 문신처럼 새겨진 것 같기도 하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노자 강의 중에 안정은 부패다, 라는 충격적인 장이 있는데 조부님께서는 아마 이러한 메시지를 머릿속이 아니라 가슴에 품고 다니며 실천을 했던 것 같다.

국권이 일본에 침탈되기 수 년 전인 약관 스물한 살에 과거를 통과했으면서도 일체의 벼슬길을 마다하고 시골 훈장으로 평생을 마감한 조부님의 가슴속에 든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당연하게도 내가 알 길이 없다. 남아 있는 문집이며 서간집이며 고모님의 이야기들을 통해 아슴아슴 추론을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조부님 대에 이르러 줄초상이 있었다. 조부님의 부친과 모친 그리고 조모님이 일 년 혹은 이 년 사이로 잇달아 운명하신 것이다. 당시의 소위 양반댁 풍습으로는 초상보다 큰 일이 없었다. 결혼 같은 행사는 순간이지만 초상은 그 몇 곱절이었다. 초상을 당하면 모든 활동이 중단되는데 그 중에서도 경제활동은 가장 금기시되었다. 게다가 삼년상이었다. 찾아오는 조객들에게는 따뜻한 고기국밥에 술이며 안주를 정성껏 대접해야만 한다.

그러한 접대가 삼 년 동안 제사 때마다 되풀이되는데 줄초상이니까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구 년이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넉넉하게 부조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 자원봉사 형식으로 일손이나 보태는 게 부조였고, 물질적으로 들어오는 부조래봐야 백지 한 두 권이나 신발 컬레 정도가 고작인 시절이었다. 그런데다 인근의 거지들은 양반댁에 초상이 났다 하면 아예 떼로 몰려와서 근처에 살림을 차려 버린다. 어지간히 큰살림이 아니고서야 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창호지에 필사한 편지 일부
창호지에 필사한 편지 일부 ⓒ 김수복

사람은 망한 뒤에서야 비로소 철이 든다는 말이 있다. 김용옥 선생의 해설에 따르자면 공자는 이순이 넘어서야 철이 들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이 나라 저 나라 기웃거리고 다닌 것은 정치에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에는 자신의 사상을 펼쳐보일 만한 정치체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공자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있었던 셈이다. 몰락한 자리에서 택한 길이 후학 양성이었다.

공자의 사상을 공부하신 조부께서 과거를 볼 당시에는 분명 벼슬을 하려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신상의 안위가 보장되는 그 길을 마다하고 서당 훈장으로 떠돌았다. 일제의 개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 같은 것은 차라리 부록이었다. 나라의 몰락과 집안의 몰락을, 그 과정을 손금 보듯이 보아야만 했던 사람이라면 으레 갖게 마련인 충격과 회한 그리고 서글픔, 커다랗게 뚫려버린 구멍을 겪기 마련인데 이 거대한 구멍을 채우는 방식으로 채택한 것이 후학 양성이었다.

그러나 조부께서는 당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그저 공자께서 이러이러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러저러한 사정이 그 배경에 있다, 하는 정도였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는 성찰이 있었고, 성찰의 뒤에 받아들인 것이 노자의 무위자연 철학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그 자신 공부를 해야만 하는 사람에게 일신상의 안위는 너무도 사치스런 것이었고 고이면 썩는 물처럼 결사항전의 각오로 피해야만 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길에서 죽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죽음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호남의 서해안 지역은 지금도 눈이 많지만 당시에는 어른의 키를 훌쩍 넘겨 버릴 정도의 폭설이 예사로 쏟아졌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 명절을 지나서 집을 나서면 섣달그믐 즈음에서야 다시 돌아오시곤 하던 조부께서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고 있다가 해동이 되었을 때 지금은 청보리밭 축제로 널리 알려진 공음의 한 야산 기슭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아버지를 포함한 집안 어른들은 이 사건을 거대한 수치로 여겼고, 그래서 조부님이 선택한 죽음의 방식은 공공연한 비밀로 남게 되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집안에는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책들이 궤짝으로 여럿이나 있었다. 이 책들이 할아버지의 제사 때마다 찾아오는 사람들에 의해 몇 권씩 사라져 갔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보고도 못본 체 묵인하고 있었다. 내 나이 열한 살이었던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나는 그나마 몇 권 남아 있는 조부님의 책들을 모두 감춰 버렸다. 그리고 장성한 이후 객지 생활을 하는 내내 그 책들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것을 어느 해 화제로 대부분 잃어 버렸다.

고종황제의 교지 궁내부대신 명의의 직인이 찍혀 있었는데 불에 타버려서 지금은 없다.
고종황제의 교지궁내부대신 명의의 직인이 찍혀 있었는데 불에 타버려서 지금은 없다. ⓒ 김수복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 했던 것일까. 나는 조부님의 주검은커녕 그 얼굴조차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버지보다는 조부님에게 더 많은 친근감을 갖고 은근히 선망하고 있었다. 김영현씨의 소설에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가 있다. 너무도 평범한 말이지만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마음에 물욕의 감옥을 지어놓고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그저 헛소리로나 들리기 십상이다.

조부께서 그러한 죽음의 방식을 통해 내게 준 것이 있다면 아마도 물욕의 감옥을 짓는 일에 능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피하는 기술 같은 것이나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고는 한다. 그러나 돈 궤짝을 끌어안고 돌아가신 외조부께서 심어준 유전인자 때문인지 나는 아직 물욕으로부터 그리 크게 자유롭지는 못하다.

덧붙이는 글 | 죽음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응모 글



#죽음#마음의 감옥#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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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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