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는 어릴 적부터 뭐든 기억해야 하며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배워왔기 때문에 어느덧 무의식적으로 망각공포증에 사로잡혀있다. 기억력이 좋아야 머리가 좋을 거라고 여겨왔기 때문에 잘 잊어버리는 사람은 제구실을 못하는 것으로 본다, 모처럼 노력해서 기억한 것을 잊어버리면 경쟁에서 뒤처진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기억해야 한다. (176쪽)

 

앞서 읽은 <공부도둑>에서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언어로의 이해라고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에게 있어서 그 옛날 공부 방법에 자기언어로의 이해는 없었다.

 

사실 교과서를 뚫어지게 정독해본 적도 없다. 그저 학원에서 나눠주는 프린트 물을 달달 외웠고(외웠다기 보다는 동그라미 칠을 하면서 반복했다), 참고서에 등장하는 단원정리를 맹신하면서 한 문제 한 문제 풀어나갔다.

 

그런데 이런 기억의 딜레마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 강도는 더욱 심하게 우리의 목을 조여 온다.

 

과장해서 이야기했을 때, 대학 시험에서 학점을 따기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것은 바로 족보의 보유 여부이다. 어떻게 족보를 가지고 있다면 시험의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족보의 해답을 이해하지 못하더라고 달달 외우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번은 족보를 보지 않고 '물리화학'이라는 과목을 나름대로 책만 열심히 보고 공부해 들어갔다가 크게 낭패를 봤던 경험이 있는데 그 다음부터 그저 순순히 족보에 적힌 해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기억력(암기력)이라는 것이 모든 것의 당락을 좌우하는가? 좀 더 산뜻하고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더 크게 작용하지 않는가? 약간의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서 내가 얻은 결론은 하나를 기억하려고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조금 더 큰 틀에서 모든 지식을 흡수하고 나름대로 통합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고 지금도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면에서 <망각의 힘>이라는 책의 제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힘과 표지에서 나를 유혹하고 있는 실타래처럼 어지러이 뭉쳐있는 지식들의 불쌍한 모습이 더욱이 내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 책은 망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하면서 또한 지식을 어떤 시각에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눈에만 의존하는 교육에서 벗어나자(방관자적인 접근법)

 

우리는 학습을 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관이 바로 눈이고 귀인데, 그 중에서도 눈을 사용하여 학습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눈으로 보이는 것은 겉모습에 불과하기 때문에 귀를 사용하는 빈도를 더욱 높여야 하며, 또한 육감과 같은 여러 가지 감각을 통해 직접 배워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시각적 교육을 하게 되더라도 학습 내용을 한가지의 시점으로 파악하는 것을 경계하고 만유시점. 즉, 여러 가지의 시점을 통해 본질을 파악해 보자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바둑 고수들의 대국을 예로 들어보자. 고수들의 대결에서 어떻게 해설자가 그 수를 명확히 판단하고 우리들에게 앞 수를 제시해 줄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해설자가 그 판에서 벗어나서 얽매이지 않는 큰 틀에서 바라보는 '방관자적인 시각'을 보유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해석한다. 즉, 그것은 육체의 눈으로 해석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체를 파악하는 마음의 눈으로 판단하자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지식의 비만에 대한 우려

 

"예전부터 복팔분이라는 말처럼 배불리 먹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긴 했지만, 이런 점은 육체적 문제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도 적용할 수 있다.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부지런히 지식 습득에만 힘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식 카타르, 지식 메타 증후군에 걸릴 수 있다."(95쪽)

 

"명석한 두뇌는 지식의 양과 비례한다는 근거 없는 명제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부심 속에서 인생을 살아간다. 박식한 자가 지적인간이라는 통념이 존재하는 한, 지적 메타볼릭은 계속해서 늘어만 갈 것이다." (95쪽)

 

나는 이 문장들을 보면서 일전에 "지적수준이 안되는 이들은 글을 올릴 자격이 없다"고 외쳐서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온 한 정치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마 그 사람이 두 번째 문장을 읽어본다면 대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틀림없이 그는 이 문장을 씹어먹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전 국민을 상대로 자신의 지적수준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하면서 국민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지식 메타 증후군의 말기에 다다른 환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지식 메타 증후군 말기 상태인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망각의 힘>을 발휘하여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많은 지식의 강박관념 중에 사익만을 좇는데 사용될 지식의 일부를 내다 버렸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경쟁을 즐기고, 부를 경계하라!

 

저자는 나를 까다롭게 만드는 사람과 환경을 고마운 존재로 인정하라고 한다. 물고기가 물의 흐름과 반대로 헤엄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면 맞바람을 맞으며 전진해야 올바른 인간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경쟁이 없는 상태라면 스스로 뛰어넘을 작은 벽을 만들어보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는 극단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동기부여의 한 방법으로 인식했으면 하는 바람이 다. 우리들에게는 이와 관련된 많은 명언들이 있지 않은가? 아마도 내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걸음만 더 내딛는다는 생각으로 지금의 고통을 즐긴다면 아마도 없었던 장벽에 맞서서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적당한 거리감

 

저자는 제 3자. 아니 4자적인 시각을 모든 사물에 대하여 적용시키는데 이것을 지식에 적용시키는 것은 물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하고 있다.

 

그가 내세우는 논리는 이렇다. 만약 내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힘든 일이 있어서 칩거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고 했을 때,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왁자지껄 병문안 오거나 이래저래 참견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러한 행위 자체에 허례허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성의들이 뜻하지 않게 약자와 강자의 상태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러한 가정 하에 우리가 상대의 일상에 너무 개입하지 말고 망각의 묘를 발휘해서 상대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한번 더 생각해보자는 의견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솔직히 나의 기준에서 생각하기에는 이 사실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편이지만, 이것을 보편화해서 적용하기에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사람들에게는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분명히 자신이 힘들 때 누군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방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그저 편지로서 위로를 하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저자의 주장에는 쉽사리 수긍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망각의 힘>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우리에게 조금은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라는 자신의 철학에 걸맞게 글의 길이도 상당히 짧고 간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정보의 바다에 떠돌고 있는 지식들에 둘러쌓여 책의 위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저자가 정보의 바다에 떠돌고 있는 지식에 대한 대항법은 바로 '독에는 독'이라는 접근법이었다.

 

180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책은 나에게 있어서 <무소유> 이후로 이 책이 두 번째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만큼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와 생각하는 맛을 제공해준 책이었다. 앞으로 이 책이 주는 교훈인 '망각의 힘'을 깨닫고 지식비만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망각의 힘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김은경 옮김, 북바이북(2009)


태그:#망각의힘, #도야마 시게히코, #북바이북, #단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