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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신발 사이즈가 몇이지?", "자네 전화번호는 몇 번인가?" 처음 만난 사람이 당신에게 다짜고짜 신발 사이즈를 묻는다면 그리고 전화번호를 묻는다면 당신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신발사이즈를 물어본다면 아마도 여자친구의 구두를 선물해야 하는데 대략적인 여자의 발사이즈를 몰라서 물어본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묻는다면? 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신발 사이즈와 전화번호를 묻는 이 남자 박사는 전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무뚝뚝하고 건조한 음성에서 이미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이유는 물 건너 가버렸다. 그렇다면 왜 그는 전화번호를 묻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는 오랜 세월동안 80분 동안만 기억할 수 있도록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어차피 이름을 물어봤자 80분만 지나면 잊어버린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수와 연관시킬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숫자와 관련된 질문만을 던졌을 것이다. 뭐 80분이 지나면 잊는 것은 똑같겠지만 그래도 잊어버리기 전의 80분 동안이라도 그와 타인의 사이에서 숫자라는 연관성을 갖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기대감이 그를 그렇게 변화시켰던 것 같다.

 

하지만 파출부 사무소에서 별이 9개나 붙어있는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찾아온 파출부 OO에게 갑자기 박사가 묻는 황당한 질문이 더욱 갑작스럽고 의도가 불분명하게 들리지 않았을까? 그러나 파출부는 순순히 거기에 응답했고, 박사는 맞장구를 치면서 둘 사이에 맺어진 수와의 어색한 관계는 그렇게 시작된다.

 

물론 처음에는 어색했고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었지만, 점차 이 둘 사이의 어색한 관계는 숫자풀이와 함께 풀어지고 그들이 각자 가지고 있던 마음에 상처는 이 둘의 만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치유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파출부의 10살 난 아들 루트가 동참하면서 그러한 치유의 과정은 더욱 가속화된다.

 

그리고 수와 더불어 '야구', '한신 타이거즈', '에나쓰 유타카' 이것들은 그들이 더욱 가까워지게 되는 또 하나의 촉매제가 된다. 파출부와 루트는 메모지를 덕지덕지 붙인 채 빛바랜 양복을 입고 바깥은 나서는 박사의 모습을 처음에는 부끄러워했지만 나중에는 그를 데리고 야구장에 갈 정도로 그와 함께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박사도 마찬가지로 즐거웠던 것 같다. 박사에겐 파출부가 220과 284의 관계였고, 루트와는 714와 715의 관계였다. 즉, 파출부와는 우애수의 관계에 있는 좋은 친구였고, 루트와도 역시 좋은 친구지만 루트는 박사를 뛰어넘길 바라는 루스ㆍ아론의 수와 같은 아이였다. 그렇게 그는 둘을 정의한다. 그가 사랑하는 수의 한자락에 그들의 기억을 이렇게 새겨놓는다.

 

"220의 약수의 합은 284. 284의 약수의 합은 220. 바로 우애수야. 쉬 존재하지 않는 쌍이지. 페르마도 데카르트도 겨우 한 쌍씩 밖에 발견하지 못했어. 신의 주선으로 맺어진 숫자지. 아름답지 않은가? 자네 생일과 내 손목시계에 새겨진 숫자가 이렇게 멋진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니." (30쪽)

 

"714는 베이브 루스가 작성한 통산 홈런 기록. 행크 아론은 이 기록을 깨는 715호 홈런을 기록했지. 714와 715의 곱은 제일 작은 소수 일곱 개의 곱과 같고, 또 714의 소인수의 합과 715의 소인수의 합은 같아. 이런 성질을 지닌, 연속하는 정수 쌍은 20000 이하에는 스물여섯 쌍밖에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7-14고 루트가 7-15에 앉았다는 거야. 그 반대면 절대 안 되지. 옛 기록을 새로이 나타난 자가 깬다. 그것이 세상사는 이치야. 안 그러니?" (129쪽)

 

이렇게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즐겁게 보내는가 싶더니 저자 오가와 요코는 행복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인지 갈등국면을 야기한다. 갈등이란 바로 처음 별9개의 집안일을 의뢰했던 박사의 형수. 미망인이 집안에 머무르면 안 된다는 규칙을 어긴 파출부를 해고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파출부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즐거움을 뒤로한 채,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파출부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주었던 박사와의 추억을 잊을 수 없었지만 박사는 80분간만 지속되는 기억 때문에 모조리 잊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가까이갈 수 없었다.

 

그러나 루트는 달랐다. 루트는 박사를 완전히 믿지 못하던 파출부에게 오히려 화를 낼 정도로 더욱 정서적으로 밀착되어 있었고, 당연하게도 그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루트는 박사와 같이 <루 게릭 이야기>를 읽고 싶다는 이유로 무작정 박사를 찾아갔고, 그렇게 갈등국면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몰라주고 아니 알지만 원치 않는 미망인은 "돈을 노리고 이 집에 눌러앉아 박사를 극진히 보살핀 것 아니냐"는 가시 돋친 소리를 내뱉는다. 그러나 파출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 말싸움을 멈추지 않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자 박사는 메모지에 다음과 같은 수식을 남겼고, 미망인은 그것을 보고 파출부를 다시금 파출부를 허락하는데…….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고 하는 오일러의 공식이었다. 그것은 완전히 무관해 보이는 수들을 가지고 자연스러운 하나의 연관성을 발견한 것이었고, 아마도 박사는 파출부와 루트가 함께 해야만 이 공식을 만족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기억해냈던 것이 분명했다.

 

"0의 경이로움은 기호나 기준일 뿐만 아니라, 명실상부한 숫자라는 점에 있어. 가장 작은 자연수 1보다 1만큼 작은 수, 그것이 바로 0이지. 0이 등장했다고 해서 계산 규칙의 통일성이 흐트러지는 일은 없어. 아니 오히려 질서가 견고해지지. 모순도 없어지고 말이야." (202쪽)

 

하지만 그들은 박사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가 속속 등장한다. 그는 부은 잇몸을 치료하고 난 뒤에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루트의 생일날 부서진 케이크와 더렵혀진 식탁보처럼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책은 수학과 연관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는 점에서 가장 흥미롭지 않았나 자문해본다. 그리고 박사가 영웅으로 알고 있는 기억을 잃은 후의 에나쓰 유타카의 이야기를 통해서 마치 실화와 같은 안타까움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그리고 곳곳에 숨겨져있는 수학이야기는 또 하나의 재미를 더해준다. 실제로 손수건과 양말의 값을 구해보는 것도 흥미롭고, 삼각수를 이해하여 자연수의 덧셈을 해결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박사가 루트에게 알려주는 수학의 공부 방법 역시 귀담아 새겨들을만 하다. 그 모습은 마치 친할아버지와 친손자가 마주앉아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바로 그 장면이었다. 비록 이 책의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눈앞에 선하게 그 모습이 그려진다.

 

문장 문제든 단순한 연산이든, 박사는 우선 문제를 소리 내어 읽게 했다.

 

"문제에는 리듬이 있으니까, 음악하고 똑같아.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그 리듬을 타면 문제 전체를 바라볼 수 있고, 함정이 숨어 있을 만한 곳도 발견할 수 있거든."

 

"그럼, 이 사람이 산 것을 어디 그림으로 그려볼까?"

 

"계산한 흔적은 지우지 말고 남겨두는 게 좋다. 어떤 식에든, 어떤 숫자에든 의미가 있으니까 함부로 다루면 가엾지 않니." (52~54쪽)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현대문학(2014)


태그:#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이레, #단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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