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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읽고 싶은 책

자전거책에 글 하나 쓰신 어느 분이 책을 서로 바꾸어 읽자고 연락해 옵니다. 제가 쓴 책을 보내고, 그분 글이 담긴 책을 받습니다. 여러 사람이 다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르게 살면서 자전거를 만나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모두 다른 사람이지만 '자전거를 좋아한다'거나 '자전거를 즐겁게 탄다'는 대목에서는 한동아리입습니다. 다만, 한 가지 대목에서 아쉽다고 느끼기에, 책을 펼치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글을 쓴 사람들은 다 다른 자리에 있지만, 모두 '서울이라는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도시에서 흙이나 자연하고는 동떨어진 일손'을 붙잡고 있습니다. 젊은 분들이기에 더 빠르게 달리는 예쁘거나 잘 빠진 자전거한테 눈길을 두는지 모르지만, 좀 나이든 분들이 지난날 짐자전거와 얽힌 옛생각을 늘어놓듯 오늘날 사람으로서 오늘날 사랑받는 자전거와 얽힌 '추억'에 갇혀 있습니다.

오랜만에 <블랙 잭>(데즈카 오사무)이라는 만화책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 또한 저 나름대로 제 '추억'에 사로잡히면서 책을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좋아하는 책을 찾아서 읽고 새기고 받아들인다 할 텐데, 저부터 좀더 옳거나 바르거나 아름다운 책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제 옛생각에 사로잡힌 채 제자리걸음을 하듯 고인 물과 같이 책을 만나지 않느냐 싶습니다.

받은 책을 덮고, 잠자는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일거리 때문에 읽어야 해서 책상맡에 쌓아 놓은 책을 가만히 쓰다듬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당신들 스스로 하고픈 일이나 꿈꾸던 일이 아니라, 코앞에 닥친 먹고사는 일 때문에 버겁고 빠듯해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책을 못 읽는다고 하는데, 책과 함께 살아간다는 저부터 제가 느끼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책으로는 다가서지 못하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구나 제 좁은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며, 좋아하며 즐기는 일을 찾고, 훌륭하면서 올곧은 책을 손에 쥐는 삶이란, 어떻게 보면 꿈같은 노릇이거나 이루지 못할 하늘나라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식구들 먹여살리고 내 앞가림을 하고 내 얼굴값과 이름값을 지키자면, 정작 내 넋과 얼을 알뜰히 추스를 겨를이 없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읽고 싶은 책'에서는 멀어지고 '읽기 싫어도 읽을밖에 없는 책'을 읽도록 길들여 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며칠 앞서 <적과 흑> 1950년대 옮김판을 오랜만에 들추었습니다. 스탕달님이 쓴 옛 작품을 읽고 싶어서, 헌책방에서 퍽 묵은 옮김판을 찾아내어 갖추었는데, 아직 첫 쪽조차 못 넘깁니다. 다른 숱한 책에 치여 자꾸 뒤로 밀립니다. 북녘에서 옮겨낸 적이 있는 '아리요시 사와코' 소설 또한 장만하기는 했어도 못 넘기고 있으며, 김석범 님 소설 하나 또한 어렵사리 얻어 놓았으나 못 펼치고 있습니다. 혼자 살 때에는 밥을 먹으면서도 읽고, 집에서 보리술 홀짝이면서도 읽은 책들이지만, 세 식구가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에는 어떠한 책조차 뒤적이기 힘듭니다. 따지고 보면, 책이란 이야기요 삶이라, 다른 이 얘기나 삶을 엿보지 말고 내 삶을 들여다보고 읽어도 넉넉하니까 책이 없어도 되는지 모르는데, 식구들과 이야기꽃을 피워도 되는데, 얌전히 꽂힌 책을 떠올릴 때면 눈물이 흐릅니다.

엄마 아빠는 그림책과 만화책도 즐겨 봅니다. 이런 책을 볼 때에는 아기를 방바닥에 앉히고 읽어 주면서 함께 봅니다.
 엄마 아빠는 그림책과 만화책도 즐겨 봅니다. 이런 책을 볼 때에는 아기를 방바닥에 앉히고 읽어 주면서 함께 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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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읽고 나서 다시 읽는 책

지난 2007년에 고향 인천으로 돌아온 뒤 올 유월부터 두 번째 살림집으로 삼으며 지내고 있는 인천 중구 내동 골목집 2층 씻는방에서는 창밖으로 복숭아나무가 가까이 보입니다. 창문 밖으로 손을 뻗으면 나날이 익어 가는 푸른 열매를 쥘 수 있습니다.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도 열매가 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나중에 알맞게 다 익은 다음 제가 슬그머니 따서 먹어도 괜찮을까 헤아려 봅니다. 동네에서 살아가는 새들이 쪼아먹게 두어야 할까 싶기도 한데, 손 닿는 대로 마꾸 따지 않고, 꼭 한두 알만 따먹으면 괜찮지 않으랴 생각해 봅니다.

지난 밤부터 새벽과 아침에 걸쳐 제대로 잠들지 못하며 찡찡대던 아기가 낮나절부터 새근새근 잠들어 주었기에 모처럼 마루에 나앉아 부채질을 하며 책을 펼칩니다. 지난달부터 조금씩 읽다가 지난주에 다 읽은 책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훑습니다. 나라안에서 한비야 님이 세계여행과 세계빈민구호 일을 하면서 이름값이 높다면, 이 책을 쓴 '소노 아야코' 님은 일찍이 1950년대부터 비정부기구 일을 하면서 온누리 가난한 나라를 돕는 데에 힘을 보태면서 이름값이 높습니다.

저는 예전에 <계로록>이라는 책을 읽으며 '소노 아야코'라는 이름을 알았는데, 나중에 다른 책을 더 읽다 보니, 숱한 소설을 쓰는 가운데 가난한 나라 돕기를 오랫동안 해 왔음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참에 나온 책은 이제까지 쓴 책하고 사뭇 다르게 '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 하고 스스로 묻는데, "숲은 반딧불이가 내뿜는 빛으로 넘쳐나고 사람은 반딧불이의 빛을 헤치면서 걸어간다고 했다. 나는 그처럼 청정한 공기를 아프리카의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었다. 한 번도 사람의 폐와 장은 물론 자동차 엔진에도 들어간 적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깨끗하고 강렬한 생기로 가득 찬 공기였다. 공업의 발전과 반딧불이의 서식은 양립할 수 없다는 원칙을 나는 카메룬과 방글라데시에서 알았다(78쪽)"는 이야기처럼, 당신은 '온누리 돈과 물질이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도록 하려'고 가난한 사람 돕는 일을 스스로 맡아서 해 왔다고 밝힙니다.

당신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하는 마지막 자리는 '반딧불이가 일본에서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데에 있고, 이렇게 이루어지자면 미국뿐 아니라 일본도 한국도 유럽도 인도도 한결같이 무기를 녹여 낫과 쟁기로 바꾸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책을 덮고 능금 한 알을 먹습니다. 어제 서울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능금을 한 봉지 안겨 주었습니다. 우리가 손님한테 먹을거리를 차려 주어야 할 판에 거꾸로 얻어먹습니다. 집에서 옆지기하고 능금을 먹는데, 한 알을 그냥 먹을 때에는 깡지까지 먹기 힘듭니다. 그러나, 칼로 반을 쪼개어 먹을 때에는 씨앗까지 오독오독 깨물어 깡지 하나 안 남기고 다 먹습니다.

왜 이렇게 다를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예전부터 늘 이렇습니다. 판이 끊어져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는 <내가 만난 여자 그리고 남자>(오숙희,1991)를 다시금 펼쳐 보려고 하는데, 잘 자던 아기가 어느새 깨어나 방긋 웃더니 엄마와 아빠 있는 데로 아장아장 걸어옵니다. "나는 어머니들에게 말하고 싶다. 딸로 하여금 같은 여성으로서 배신감을 느끼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끔 생각해 보시라고(74쪽)"라는 대목까지 훑고는 책을 덮고 아기를 덥석 안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책방마실을 하기도 만만하지 않고, 애서 책을 장만했어도 읽기가 만만하지 않지만, 아이를 키우듯 책읽을 짬을 내면서 살아갑니다.
 아기를 데리고 책방마실을 하기도 만만하지 않고, 애서 책을 장만했어도 읽기가 만만하지 않지만, 아이를 키우듯 책읽을 짬을 내면서 살아갑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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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책읽기, #아이 키우기, #육아, #책, #책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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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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