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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난달 말일은 내가 또 한번 내 대학생 아이들과 함께 '용산미사'에 참례한 날이다. 국가적으로는 대표적 'MB악법' 중의 하나인 '미디어법'이 국회의 광란 속에서 파행 처리(나는 '통과'라고 부르지 않는다) 되는 등 '집단의 광기'가 표발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7월을 잘 마무리했다는 생각이다.

 

7월 31일은 서울성모병원 완화의학과 염창환 교수를 만나 뵙고 내 노모의 현 상태를 말씀드린 다음 처방을 받아 약을 지어오는 날이었다. 이미 한 달 전에 예약이 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갖가지 약들은 이틀 분이나 남아 있고, 또 방학중에도 계속 출근을 했던 아내가 8월부터는 출근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서울에서 다시 하룻밤 묵고 8월 1일 오전에 내려올 계획을 세웠다.

 

늘 내 마음 속에 머무는 용산미사 때문이었다. '용산참사' 발생 반년이 되는 7월 20일의 미사에 참례한 후로 열흘이 지나는 시점이어서, 또 7월을 잘 보내려는 뜻으로 다시 용산미사에 참례할 생각이었다.

 

 

오전 10시 30분 버스에 올랐다. 서울에서 두 아이가 생활하고 있으므로, 또 한번 꽤 크고 무거운 가방을 휴대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딸아이가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마중을 나왔다. 아들녀석은 친구와 만날 일이 있어서 다른 데로 샜다고 했다. 피아노와 기타를 칠 줄 아는 녀석은 교내 밴드부의 합주 연습에도 나가야 하고, 반(班) 대표 노릇도 해야 하고, 하여간 1학년 시절부터 공사가 다망한 녀석이었다.

 

무거운 가방을 딸아이와 함께 들고 서울성모병원 지하 1층 외래식당으로 가서 점심부터 먹었다. 그리고 3층 '부인암센터'로 가서 오후 2시 5분, 예약 시간에 염창환 교수를 만났다. 어머니께서 식사를 잘하시고, 수면 시간이 많이 줄면서 집안에서나마 활동하시는 시간이 늘어나서 어떤 희망을 갖게 하는데, "가끔 가슴 속에 뭔가가, 나무때기 같은 것이 걸려 있다가 내려가는 것 같다"고 하시는 말씀을 전해 드렸다.

 

염 교수는 환자가 식사를 잘한다는 사실을 반기면서도, 가슴의 이상한 불편에 대해서는 "가슴 속에 뭐가 생겨 있어서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통증과 불편 같은 것이 심하거나 자주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말로 나를 위안했다.

 

나는 염 교수에게 농담도 했다. "사람은 자식을 여럿 낳고 봐야 한다는 생각을 요즘에 다시 하게 됩니다. 우리 어머니를 보면 자식 복이 참으로 중요한 것 같아요. 자식을 많이 낳으신 덕에 멀리에서 사는 자식들이 교대로 자주 오거든요. 미국에서 사는 자식들에게서 전화도 자주 오고…." 염 교수도 간호사도 자식을 많이 낳고 봐야 한다는 내 말에 동의하며 웃음을 지었다.

 

1층 외래약국에서 거의 한 보따리나 되는 한 달 분의 약을 지은 다음 나는 딸아이와 함께 처음으로 지하철 9호선을 타보았다. 승객이 무척 많았다. 딸아이는 "9호선 개통 이후 항시 북적이던 2호선 승객이 많이 줄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지난해 병상생활 이후 추위를 타는 체질이 되어서 '노짱 티셔츠' 위에 긴 팔 남방을 걸쳤지만, 겉옷의 단추를 모두 풀어놓아서, 버스 터미널에서도, 병원에서도, 지하철 승강장과 차 안에서도 많은 사람의 시선을 접할 수 있었다. 내 '의지의 표현'이 매우 현실적인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2>

 

합정동 아이들의 자취방에서 2시간 정도 휴식을 한 다음 6시쯤 딸아이와 함께 용산으로 갔다. 아빠의 용산미사 참례 계획에 순순히, 기꺼이 따라주는 딸아이가 기특하고 고마웠다. 아들녀석과도 약속이 되어 있었다. 녀석은 친구와 함께 있는데, 7시 미사 전까지 용산에 도착하겠다고 했다. 친구에게 용산미사에 대한 설명을 하고 같이 오라고 했더니, 친구에게는 다른 예정이 있다고 했다.

 

녀석은 약속을 지켰다. 미사가 시작되기 직전에 도착해서 내 옆에 앉아 용산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연도'부터 함께 바칠 수 있었다. 나는 양쪽에 딸아이와 아들녀석을 앉히고, 그렇게 내 아이들과 함께 연도를 하고 미사를 지내는 사실에 큰 감사와 더불어 행복감을 느꼈다. 내 자식들이 고맙고 대견했다. 내가 지금 이 시각, 내 자식들에게 또 한번의 값진 '선물'을 안겨주고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할 수 있었다.

 

 

참사 193일째이며 기도회 47일째인 이 날의 '용산참사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생명평화미사'는 인천교구, 서울교구, 수원교구, 의정부교구, 전주교구에서 오신 열한 분의 사제가 공동 집전했다. 주례는 인천교구 김영욱 신부님이 했고, 강론은 인천교구 김종성 신부님이 맡았다.

 

"사제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꼭 챙겨야 할 중요한 '끈'들이 많지 싶습니다. 그 끈들을 잘 붙잡고 살기 위해서 나름으로는 많이 애를 쓰고 노력도 합니다. 제게는 사제생활에 필요한 오늘의 여러 가지 끈들 중에서, 이 '용산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끈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비록 많은 끈들을 다 잘 챙기지는 못하더라도, 오늘의 시간 속에서 이 용산미사에 참례하는 끈 하나만이라도 잘 챙긴다면, 사제로서 크게 불성실하게 사는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김종성 신부님의 이런 강론 말씀에 모든 신자들이 박수로 감사를 표했다. 김종성 신부님은 또 이런 말씀도 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잘 아는 것이 독'이라는 뜻의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마귀들은 많은 것을 정확히 압니다. 마귀들처럼 많이 정확하게 아는 지식이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뭔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들이 독이 되어 버립니다. 어쩌면 MB도 우리가 어떻게 할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더 큰 전략으로, 침묵으로, 대화도 없이 버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찌해야 마음 속에 독을 쌓지 않을까요? 이명박이라는 사람에게 있는 마음보는 내 안에도 있다는 성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유가족에게는 참혹한 시련이 계속되고 있고, 신경 쓸 일이 너무나 많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악에 받친 심정으로 사실지도 모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유족들의 마음 속에는 그 악받침이 없었으면 합니다. 세상의 독 때문에 내 마음과 몸 안에 독을 쌓으면 안됩니다. 저는 6개월 넘게 싸워온 유가족들의 마음 한구석에 쌓일지도 모를 독이 걱정입니다. 독이 아닌 덕이 쌓이길 기도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이 세상의 회개를 희구하는 기도로써 가능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혼란과 시련 속에서 증오의 감정보다는 세상의 회개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 안의 독소부터 없애고, 더욱 뜨겁게 세상의 회개와 변화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지내도록 합시다."

 

 

나는 비록 먼 곳에서 살고 있고 건강치 못한 몸일망정 최선을 다하여 용산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생활에 덕과 득을 쌓는 것임을 다시금 되새기며 미사를 지냈다. 내 삶을 성찰하면서 세상의 변화를 뜨겁게 추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면서 내 아이들의 손을 꼭 쥐기도 했다. 그리고 '컵 초' 세 개를 사서 아이들과 함께 참사 희생자들의 영정 앞에 놓아드리기도 했다.   

 

 <3>

 

미사 후 우리 세 가족은 합정동으로 갔다. 아이들의 월세 집 근처에 '돼지고기김치찌개'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음식점이 있었다. 돼지고기김치찌개 맛이 썩 좋아서 여러 번 식사를 한 집이었다. 별로 넓지 않은 공간에 9시가 다 된 시간에도 손님들이 꽉 차 있었는데, 우리는 운 좋게도 쉽게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우리 식탁에는 태안에서 막 올라온 내 아들녀석의 중학교 동창 친구도 한 명 합석했다. 공주사대부고를 거쳐 익산 원광대학교 한의대학에 진학한 학생이었다. 우리는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식사 전 기도'를 했다. 나는 부모가 개신교 신자인 그 학생의 양해를 구한 다음 '국악성호경'으로 기도를 했다.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돌아다볼 것은 당연지사였다.

 

우리는 소주잔을 들고 건배도 했다. 나는 건강 문제 때문에 소주를 한 잔만 마시기로 하고 세 청년들과 함께 소주잔을 들고 이렇게 건배했다. "이명박 장로와 이 세상의 회개를 위하여!" 내 목소리가 크고 과감하니 주위 사람들이 다시 돌아볼 것도 당연지사였다.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다소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우선 내 아들녀석의 친구에게 용산참사와 용산미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그것은 내 아들녀석의 주문이기도 했다. 미래를 개척해가야 하고 책임져야 할 젊은이들이 정의를 추구하는 눈으로 오늘의 사회문제들에 대해서도 고민할 줄 알고, 뜻 있는 일에 참여할 줄도 알아야 함을 역설했다.

 

 

또 오늘의 20대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인 '분노할 줄 모르는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내 아이들은 이미 그것에 관한 글들을 읽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전화로 '정의에 둔감하고 분노할 줄 모르는 오늘의 20대들의 성격'을 심층적으로 다룬 글들을 '오마이뉴스'에 가서 읽어보도록 당부했는데, 아이들은 아비의 주문을 잘 따라주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 4년생인 딸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교육부터가 정의를 가르치지 않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체제에 휘말려서 살아야 해요. 경쟁만 가르치고 이기는 것만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교육이에요. 그런 풍토 속에서 어떻게 정의의 개념을 배울 수 있고, 분노할 줄 아는 가슴을 지닐 수가 있겠어요. 오늘의 20대 젊은이들이 분노할 줄 모른다는 것은 그런 교육환경 속에서 자라난 탓이기도 하고, 극심한 취업경쟁 속에서 여유를 갖지 못하는 오늘의 환경 때문이기도 하고, 또 다수는 그런 습성을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탓이기도 해요. 아무튼 오늘의 20대에서 나타나는 분노할 줄 모르는 현상은 그렇게 가르친 기성 세대의 자업자득이에요. 기성 세대 중에는 그런 현상을 한탄하는 아빠 같은 사람들도 있는 반면 그것을 '성공'으로 간주하고 쾌재를 부르는 부류도 있을 테고요."

 

나는 일찍부터 내 자식들만큼은 사회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며 사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쳤다. 정의가 무엇이고, 정의감이 얼마나 소중한 덕목인가를 알게 하려고 애를 썼다.

 

몇 년 전에 어느 대학교를 간 일이 있었다. 그 학교의 무용과 교수를 인터뷰해야 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 교수의 연구실로 가기 전에 교정의 그늘진 벤치에 잠시 앉아 있었다. 저만치 길바닥에 플라스틱 물병이 하나 버려져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지나가건만 그 물병을 집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학생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학생이 그대로 지나가는가 보기 위해, 아니, 그 물병을 집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학생이 마침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심정으로 나는 그 교수와의 약속 시간을 30분이나 어기며 무려 1시간이나 그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보람을 얻었다. 한 앳된 여학생이 그 물병을 집어서 근처 쓰레기통에 버리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그 얘기를 들려주었다. 길바닥에 버려진 빈 물병을 보지 못하는 사람, 보고도 무심히 그냥 지나가는 무감각한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함을 역설했다. 비록 쓰레기통이 멀리에 있더라도, 또 시간에 쫓기는 바쁜 걸음이더라도, 빈 물병을 집어서 자기 가방에 넣고 가기라도 해야 함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함을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이었다.

 

 

오늘의 20대 젊은이들의 분노할 줄 모르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20대 시절을 살고 있거나 막 진입한 내 대학생 아이들과 아들녀석의 친구는 내 얘기를 경청했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자리를 끝낼 즈음에 나는 마지막으로 내 고등학생 시절의 일화 하나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고교 1년 시절 음주를 한 후 어른과 싸움을 하고 고소를 당하는 바람에 부모님께 거짓말로 공납금을 타 가지고 서울로 도망을 간 일, 서울 거리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일주일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한 일, 그런 문제학생이 모범생으로 변신한 사연들이 묶여진 이야기였다.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이 많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기도 할 터였다. 그동안 아빠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아이들은 놀라기도 하면서 흥미진진해했다. 좀더 구체적인 사항들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라고 했다. 1997년 사보 '현대정공' 2월호에 <매보다 더 큰 깨달음을 주신 말씀>이라는 글을 썼는데, 몇 년 후인 2002년 월간 '말' 10월호의 '맨 처음 고백' 난에 <가출 일주일만에 집에 돌아왔더니>라는 제목으로 재발표했고, 또 같은 해 오마이뉴스에도 올렸다.

 

아이들은 조만간 그 글을 찾아서 꼭 읽어보기로 약속했다. 아이들로 하여금 내 글을 읽게 하는 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할 터였다. 나는 소주잔에 남아 있는 병아리 눈물만큼의 한 방울로 아이들과 마지막 건배를 하고, '식사 후 기도'를 했다. 7월을 잘 마무리하는 마지막 행사, 즐거운 자리였다.

 

관련 기사 : 가출 일주일만에 집에 돌아왔더니


태그:#용산참사, #용산미사, #정의감, #이명박 장로, #이십대의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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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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