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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에 속한다. 중학생이던 시절 당시 면(面)이었던 우리 고장에 중학교와 병설로 고등학교가 신설된 덕이었다. 고등학교가 신설되기 전까지는 나는 고등학생이 될 꿈은 아예 꾸지도 않았었다.

고등학교를 가려면 50여 리나 떨어진 서산으로 가야 하는데, 비포장 도로였던 당시엔 50여 리는 꽤나 먼 거리였다. 버스도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매일같이 차를 타고 서산으로 통학을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힘드는 일이었다. 고생하지 않고 시간을 아끼려면 하숙을 해야 하는데, 하숙비를 댈 능력이 없는 우리 집의 형편을 나는 이미 소상히 알고 있었다.

초등(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도 나는 1년을 쉬었었다. 누님이 중학교에 다니기 까닭이었다. 한꺼번에 중학생 둘을 가르칠 수 없었던 우리 집의 형편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동창들이 각각 다른 얄궂고도 복된 팔자가 되고 말았다.

내가 중학생이 된 후에도 우리 집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으로 학업이 끝난 누님처럼 나도 고등학교 진학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할 상황이었다. 내가 장학금을 받고 진학을 할 만큼 수재도 아니니….

그러던 것이, 내가 지금도 함자를 잘 기억하고 있는 장인완 교장 선생님의 노력으로 병설 고등학교가 신설되어서 나는 중학교 졸업과 함께 어렵지 않게 고등학생이 될 수 있었다.

행운으로 얻은 교복

그런데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철부지였다. 향학열이 별로 없었다. 만날 운동장에서 공이나 차며, 노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40여 명 동창생들은 거의가 나처럼 우리 고장에 고등학교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고등학생이 될 수 없었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중에는 고등학생이 된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기고, 촌구석의 신설 학교 학생일망정 열심히 공부를 하는 철든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렇지가 못했다. 하마터면 고등학생이 되지 못할 뻔했던 자신의 처지를 훤히 인식한 나머지 그것을 괜히 자기비하감으로 가져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도 그런 축이었다. 1학년초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아이들과 더 잘 어울렸다. 원래 공부도 별로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패를 지어서 학교 안팎에서 짓궂은 짓을 많이 했다. 지금처럼 누구를 왕따 시킨다거나 면학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흐리면서 열심히 공부하려는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하는 식의 야비한 짓은 하지 않았지만, 담임 선생님이 괴로울 정도로 말썽을 부린 일이 많았다.

1학년 때 집단으로 결석을 해서 담임 선생님이 산으로 들로 찾아 나선 적도 두 번인가 있었다. (세상에, 결석을 한 아이들을 찾아 산야를 헤맨 선생님이 있었다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결혼식이 많은 가을 한철, 방과후마다 떼를 지어 결혼 집을 순례한 일이었다. 우리는 어느 날 어느 동네의 어떤 집에 결혼잔치가 있는지를 미리부터 훤히 알고 있었다.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목록을 작성해 놓기까지 했다. 우리 패거리들 중에 그 결혼 집과 관계 있는 아이가 있건 없건 그건 상관할 바 아니었다. 아는 집이건 모르는 집이건 우리는 축하를 해주러 가야만 했다. 우리가 축하를 해주는 건 그저 실컷 잔치 음식을 먹어주는 일이었다.

우리를 박대하는 집은 없었다. 모자를 삐뚜름하게 쓰고 교복 단추도 두어 개씩은 풀어놓고 이상한 몸짓을 하며 다니는 아이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경삿날이 아닌가. 잔칫집들은 우리를 채알(차일, 마당에 친 천막) 밑으로 안내해서 자리에 앉게 하고 음식 푸짐한 두렛상을 속히 내오곤 했다.

철없는 문제아

우리는 하나같이 '양통'들이 커서 국수를 세 그릇씩은 먹었고, 집에서 담근 농주 맛이 괜찮으면 술 주전자도 서너 개씩은 비우곤 했다. 떡이며 과줄 따위를 더 갖다달라고 해서 주머니에 처넣기까지 했다. 어찌 보면 거지 떼나 진배없었는데, 하루에 결혼 집을 두 집이나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당시엔 결혼식을 거의 집에서 했었다. 예배당이나 절간에서 하더라도 잔치는 꼭 집에서 했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시골에서는 지금도 가끔 집에서 잔치를 하는 집이 있는데, 어쩌다 그 잔치 풍경을 보게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옛날 고등학생 시절의 내 모습이 절로 떠올라서 슬며시 미소를 짓게도 되고….

아무튼 나는 고등학교 1년 시절을 그 모양으로 살았다. 누가 보아도 도무지 철이 들 것 같지 않은 '불량학생'이었고 '문제아'였다.

그렇게 문제아로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을 지내던 어느 날, 드디어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1학년 시절의 막바지였던 12월초의 일이었다.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아이들이 밤에 술을 마시고 촌길을 떼지어 다니다가 어른 한 사람과 시비를 벌였다. 어찌어찌 하다가 그만 '집단 폭행'이 빚어지고 말았다.

그 일이 좋게 넘어갈 리 없었다. 불량기도 어지간히 있어 보이고, 어쩌면 어린 학생들의 집단 폭행을 유도했는지도 모를 피해자 어른이 고소까지 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날이 밝은 후 피소 사실을 안 우리는 잔뜩 겁을 먹었다. 은밀한 곳에 모여 숙의를 한 끝에 서울로 함께 도망을 가기로 작정을 했다.

집에 온 나는 속히 공납금을 내야 한다고 부모님을 속였다. 어렵게 조르고 졸라서 한 기분의 공납금을 타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돈을 여비 삼아 친구들과 함께 서울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서울에서 고생한 일을 여기에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추운 한겨울에 낯설고 물선 서울의 한 골목에서 마음 고생과 배고픔을 겪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린다. 도저히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심한 두려움과 비참한 심경 또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랴.

몽둥이를 버린 아버지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집에 돌아온 나는 몽둥이 하나를 찾아서 방바닥에 놓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렸다. 내 잘못을 스스로 깊이 인정하고 반성한 나머지 몽둥이를 앞에 놓고 아버지를 기다린 사실은, 내가 그만큼 비겁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일일 것도 같다.

그러나 전혀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어두워서야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나를 보시더니 내 앞에 앉으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는 고등학생이다. 고등학생이라면 어느 정도 지성인이니, 지성인에게는 매보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러니 이 몽둥이는 필요 없다."
그리고 아버지는 몽둥이를 집어 마당으로 던지셨다.

그 순간 나는 고마움과 함께 묘한 아쉬움을 삼켰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더욱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이미 배웠을 것이다만 우리 나라에는 고등학생들이 일으킨 위대한 사건들이 많다. 일제 때 일제에 저항한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인 광주학생의거를 비롯해서 함흥학생의거와 신의주학생의거 등이 있고, 가까이로는 4.19의거가 있다. 이 모든 의거들은 고등학생들이 일으켰고, 고등학생들로부터 발단이 되었다. 이처럼 고등학생들은 위대한 힘을 지녔다.

이렇게 너의 선배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또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며 싸웠는데, 너는 고작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어른과 싸우고 비겁하게 도망을 갔다왔으니, 그게 고등학생으로서 할 짓이냐? 숭고한 정신을 지녔던 선배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네가 진정으로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이만 네 방으로 돌아가서 오늘의 일을 깊이 반성해라. 반성할 줄 알아야 사람이 된다!"

어린 아들이 서울에서 일주일 동안 겪었을 고생을 깊이 헤아리신 나머지 아들을 일찍 쉬게 하시려는 뜻이 거기에는 포함되어 있었을 테지만, 아버지의 그 말은 내게 큰 충격으로 작용했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그 말을 수없이 떠올리며 뇌리에 되새겼다.

부끄럽지 않은 무기정학

무려 38년 전의 그 일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별빛처럼 또렷하다. 그 사건으로 무기 정학을 당한 일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기억이다.

무기 정학으로 인해 그해 12월은 물론이고 겨울 방학이 끝난 다음해 2월에도 학교에 가지 못한 나는 반성문을 썼다. 물론 학교 선생님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지만 나는 자발적인 마음으로 반성문을 정성 들여 썼다. 그리고 그 반성문 안에 아버지의 말씀을 기록했다. 아버지의 그 말 한 마디가 어떤 매보다도 더 큰 아픔과 깨달음을 내게 안겨 준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나는 38년 전의 그 반성문 초안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후 나는 모범생이 되었다. 무기 정학까지 당했던 문제 학생이 모범생으로 변신을 한 것이었다. 시골 인문계 신설 고등학교의 제2기생으로서 늘 학교의 명예를 생각했다. 갖가지 운동 선수로, 학생회 간부로 큰 활약을 했다. 그래서 3학년 때는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고, 졸업 때에는 학교를 위해 가장 일을 많이 한 학생에게 주는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모교의 초청으로 모교에 가서 후배들에게 강연을 한다. 고향에 살고 있기로 그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강연을 할 때마다 예의 그 무기 정학 사건을 들려주곤 한다. 문제 학생에서 모범생으로 변모했던 그 사실을 통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가능성의 소중함을 학생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다.

이 이야기에서 학생들은 대체로 감명을 받는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오늘에도 내 입을 통해 많은 학생들에게 좋은 충격과 감동을 주는 사실을 느끼고 확인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크게 덩두렷하지는 못할망정 내가 글쟁이 명색을 지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그 한 마디가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글을 쓰려고 노력하며, 지역 사회에서 이런저런 활동으로 '사회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는 일에 협력하는 것도 청소년 시절에 접했던 아버지의 그 한 마디가 크게 바탕을 이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아들에게 물질보다 하늘 우러르는 신앙과 좋은 정신을 물려주신 선친이 늘 고맙고 자랑스럽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월간 <말> 2002년 10월호의 '맨 처음 고백' 난에 게재된 글입니다. 잡지사의 양해를 얻어 이 글을 <오마이뉴스>에도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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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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