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한 남자

 

길거리에는 시원한 차림의 서양 여행자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왔다지만 그리움의 멍에를 멘 어쩔 수 없는 자전거 여행자도 그들 틈에 섞였다. 그러고는 그늘 아래 아무 계단이나 자리를 잡고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만 쳐다보았다. 그래도 무료하진 않았다. 안티구아에서 쬐는 3월의 햇살은 마냥 푸근했다.

 

하릴없이 오전을 보내는 중 문득 주머니를 툴툴 털어 쌈짓돈을 꺼내 자전거 세계일주 후 처음으로 한국 식당에서 밥을 사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 음식보다 비싸서 엄두가 나진 않았지만 과테말라 여행의 중심지 안티구아의 여러 정보도 얻을 겸 적응하기 위해서다. 늦은 아침 작은 식당의 문을 열자마자 빈속에 한 시간 남짓 기다린 나는 첫 번째 손님이 되었다. 

 

간만에 속 좀 풀 칼국수와 출출할까 싶어 공기 하나 추가해서 다가올 만찬에 앞서 살살 시장기를 달래고 있었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와 담백한 국물 냄새만 맡아도 고향의 향기가 퍼지니 배는 더욱 고파왔다. 드디어 작은 공기와 칼국수가 나왔고 나는 단숨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워 버렸다. 먹으면서도 자꾸 양이 줄어드는 안타까움.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다 털어내고 쩝쩝거리며 아쉬운 식사를 마쳐야 했다.

 

짧은 천상의 맛을 본 후 자리를 뜨고 계산을 하려는데 주인 누나가 한 마디 한다.

"아, 그쪽 드신 거는 아까 어떤 분께서 대신 내 주고 가셨어요."

"네? 제 것을요?"

"그렇다니까요. 조용히 댁을 지목하고는 두 사람 몫을 계산하면서 나가셨어요. 머리 빡빡 민 분이 말이죠."

 

누굴까. 왜 그랬을까. 테이블도 몇 개 되지 않은 작은 식당에서 전혀 낯모르는 이가 조용히 내 식사 값을 부담했단다. 그것도 모른 채 온통 밥 먹는 데에만 열중한 나는 얼마나 본능적인 인간상인가. 가끔 이런 천사를 만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받는 친절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주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눴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얼른 식당 문을 열고 나왔지만 뭐라고 감사의 말이라도 전할 새 없이 이미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남자에 대한 고마움과 왠지 모를 미안함에 목이 건조해져 왔다. 식당으로 돌아온 나는 시원한 물을 두 잔이나 들이켜야 했다. 그리곤 털썩 자리에 주저 않았다. 빡빡이 천사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진 채.  

 

# 다른 남자

 

숙소를 정해야했다. 여기서만큼은 소방서나 텐트를 치는 게 아니라 일주일 정도 푹 쉬면서 스페인어를 공부할만한 방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 한국청년이 마침 같은 방 침대 하나가 빈다고 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에 합숙할 수 있겠다 싶었다.

 

권법수. 나보다 두 살 많은 그는 캐나다에서 워킹 홀리데이 후 남미 여행 중이었다. 다행히 함께 지내는 동안 트러블을 만들지 않을 것 같은 인성이 좋아 보여 나는 흔쾌히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누군가와 무엇을 같이 할 때 내가 가장 먼저 신경 써서 보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닌 인격이다. 모든 일의 어려움은 일 자체가 아닌 관계속의 삐그덕거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 둘은 취향이 깐깐하지 않아 식사도 매번 같이 하고, 쉴 때는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하루 종일 인터넷 하는 성향도 비슷해 죽이 잘 맞았다. 무엇보다 잠자기 전 나누는 대화가 잘 통했다. 둘의 관심사가 비슷한 건 아니었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관심을 던지고 맞장구를 쳐 주자 마음이 통했다. 스페인어를 배우는 일주일 동안 괜찮은 파트너를 만난 거 같아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 세 남자의 조우

 

"혹시 지난번 제 식사 값을 대신 내 주신 분이 맞습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

 

쑥스럽게 대꾸하는 그는 삼십 대 중반에 머리를 빡빡 민 순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정보를 하나 더 추가하자면 선교사 신부 수업을 받으려고 이곳에서 언어 연수중인 가톨릭 사제였다. 안티구아에서 만나는 한인들마다 죄다 물어본 끝에 정말 어렵게 빡빡이 천사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아니 왜 제 식사 값을 대신 내 주셨나요? 저도 경비가 충분한 걸요."

 

남자는 웃으면서 마음이 그냥 동했다고 한다. 나를 보고는 어떤 고민이나 판단도 없이 감정이 허락하는 대로 자연스레 따랐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뭔가 보조를 맞추어야겠다는 심각한 책임감이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내가 대꾸했다.

 

"사제님, 그럼 이번엔 제가 한 끼 섬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지요. 이번만큼은 제가 식사를 사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인연이 된 우리는 그 후로도 서로 섬겨주거니 섬김 받거니 하며 우애를 돈독히 다져 나갔다. 여기에 성격 좋은 법수 형도 함께했다. 3이라는 숫자가 완전하다고 하는데 일주일간 안티구아에 머물면서 우리 셋은 틈만 나면 만나 시간을 함께 보냈다. 

 

셋은 함께 안티구아 십자가 언덕에 올라가 전경을 조망하기도 하고, 성당에서 하는 노숙자와 아이들에게 빵 나누어 주는 자원봉사에도 참가했다. 또 사제님 집에 방문해 검소한 사제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검소한(?) 여행 이야기를 하고, 공원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라이프 스토리와 비전을 나누기도 했다. 마지막 즈음에는 헤어짐이 아쉬워 한인 식당에서 얼큰한 닭요리에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잔이 오갈수록 둘은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내가 콜라 마신다고 눈치주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실수할까 예의를 갖춰주었다. 평균 30년 이상을 서로 다른 가치로 살아온 삶이었지만 세 남자의 느낌은 서로 통했다. 여행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나는 두 남자와 큰 에피소드는 없었지만 일주일 동안 아주 잔잔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다. 가슴 뜨거운 남자들의 우정은 아닐지라도 우린 매번 감사했었고, 평화로웠고, 그리고 진실했었다. 그래서 이 아늑한 만남이 좋았다. 닭요리가 바닥을 드러내자 그제야 우리는 평소보다 한참 늦은 시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긴 아쉬움을 묻어두고서…….

 

누구보다 신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려 애쓰는 사제님과 누구보다 자유롭게 인생을 누리고 싶어하는 법수 형과 그 중간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나.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헤어짐은 항상 아쉽다. 그래서 추억이 더 애틋한가 보다.

 

다음 날 아침, 과테말라 시티로 떠나는 나를 두 남자가 배웅 나와 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남자들만의 느낌. 소박한 웃음 한 번 지으며 악수하는 것으로 짧은 인연을 매조지했다. 연락하면서 언젠가 또 만나자는 약속을 남겨놓고서 말이다. 안티구아에서 두 남자와의 만남은 차라리 어설픈 로맨스보다야 백배는 나은 담백한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각자의 여행 역시 계속되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과테말라, #안티구아, #자전거여행, #세계일주, #중남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