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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시와 사상

김성수 『함석헌평전』 저자



함석헌은 누구인가?


 
함석헌 선생
 함석헌 선생
ⓒ 씨알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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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사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격동의 삶을 살다 간 여러 인물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그 중에 함석헌(1901-1989)이라는 한 인물의 모습도 보인다. 그는 89년의 생애 중 약10년 정도의 교사생활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삶을 '탈북자', '비정규직노동자', 심지어 '백수'에 가까운 생애를 살고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을 사회 범주적으로 이렇게 규정짓고 나면 아무래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있다.



자기수준만큼만 타인, 사물 혹은 예술을 이해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함석헌에 대해 이 사회의 원로 혹은 명사 중엔 그를 좀 더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예는 종교사상가, 평화주의자, 민주화운동가, 인권운동가 등이다. 함석헌이 전 생애를 통해 국가폭력과 독재 권력에 저항할 때에도 그는 비폭력원칙을 따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민주화운동과정에서 함석헌은 '한국의 양심' 이나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함석헌의 생애는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평화주의자로서 그는 순진 하리 만치 비폭력무저항운동에 앞장선 인도의 간디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2세를 존경하였다. 1980년 대 20대 나이였던 내 방벽은 온통 함석헌의 사진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그런 내가 쌍문동 함석헌의 집을 방문하고 놀랐던 것은 80이 넘은 그의 방에는 언제나 간디와 킹목사의 사진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비폭력무저항과 평화주의를 그의 삶에 한 원칙으로 너무도 중요시해서인지 군사정권시절의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로부터 '독설가'로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1979년과 1984년 함석헌은 한국인 최초로 서구 퀘이커들에 의해 노벨평화상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일제강점 하 그리고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하에서 국가폭력과 독재정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기에 함석헌은 수감, 가택연금 등의 생활을 셀 수 없을 정도로 겪어야만 했다. 사회복지가 전무한 시절에 그래서 함석헌과 그의 가족들이 감내하고 걸었던 길은 그래서 '빈곤의 악순환'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빈곤의 악순환 속에서도 함석헌은 시를 쓰고 출판까지 했다. 그러나 그가 소위 시인으로 '데뷔'를 한 것은 아주 늦은 편인데 그것은 함석헌의 나이 마흔 다섯인 1946년이다.



마흔 다섯에 데뷔한 시인



그럼 어쩌다가 그렇게 늦깎이 나이에 함석헌은 시를 쓰게 된 것일까? 그 사연은 아주 슬프고 참혹하다. 1945년 11월 23일 일어난 신의주학생의거 당시 함석헌은 인민위원회 문교부장이었다. 비록 그자신이 학생의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그 자신이 공산당원이 아니었고 민주진영의 기독교 측 인사였기에 그는 소련군정 이나 공산주의자들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공산주의자들의 시각엔 기독교인이란 곧 미국선교사들과 가까운, 친미파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함석헌은 신의주학생의거에 책임자로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체포즉시 현장에서 옷이 찢어지고 정신을 잃도록 심한 몰매를 맞았다. 소련군의 총칼 앞에 죽음의 문 앞까지 간 함석헌은 곧 어두운 감방의 철장 안에 갇히게 된다. 동시에 소련군대는 함석헌의 집과 재산도 압수했다. 그러므로 서 함석헌의 노모와, 아내 그리고 일곱 명의 자녀들은 곧 절대빈곤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과 그의 가족은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할 상황에 처해졌던 것이다.



신의주학생의거를 배후조종하거나 교사(敎唆)하였다는 죄목으로, 많은 애국지사와 민족진영의 간부 및 종교인들이 체포·구금되어 시베리아탄광으로 끌려가기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함석헌은 오히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하여간 일제강점기 36년을 참고 견딘 후 조국이 해방되었는데 해방된 지 불과 석 달 만에 독립운동가, 애국자가 또 감옥에 들어가니 어찌 그의 슬픔과 기막힘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나라의 운명과 당장 눈앞의 생계가 막막한 노모와 처자들을 버려두고 비좁고 어두운 감옥 속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앞일을 생각하자니 그는 한숨과 분노,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이다. 책도 볼 수 없고 글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당시의 열악한 옥중생활에 그래서 함석헌은 "눈물 사이사이에 나오는 생각을 간수병의 눈을 피해가며 부자유한 지필(紙筆)로 적자니 부득이 시가의 형식을 취하게 되었"고 그래서 "난 후 처음 시란 것을 쓴 것" 이 그가 늦은 나이에 시인으로 데뷔하게 된 경유이다.



이제 대책 없는 가장으로서의 외부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그는 어떻게든 절망감을 극복하고자 분투했을 것이다. "조국은 해방되었는데 난 왜 아직도 감옥에 있나? 조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그는 수십 수백 번 자문했을 것이다. 이런 혼미한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는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교도관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직설적인 글보다는 은유적이고 간접적인 시로서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래서 이제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함석헌은 불가피하게 '시인'이 된 셈이다. 이런 혼돈과 절망감의 와중에서 시를 쓰기 시작해서 그런지 함석헌은 자신의 시를 놓고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라고 고백한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체험을 겪으면서 '등단'한 시인으로서의 그의 '감회'를 직접 들어보자.



"나는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나와 마흔 다섯이 되도록 시라곤 써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 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 못 낳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 타고르가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 깎이고, 사슬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거기 나서, 가뜩이나 무딘 맘에다 줄을 골라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젊은 날을 다 지냈으니 시가 나올 리가 없다....

 그 내가 감히 씨를 쓰다니, 몰려서 된 일이지 자신 있어 한 것이 아니다....

독자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시라 할 테면 하고 말 테면 말고, 그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다 바칠 뿐이다."



시인으로서 그의 감회는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비참하다시피 한 한국역사 속에서 그는 시인의 되고픈 꿈과 여유조차 가져 볼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어느 한 가지 일을 제대로 집중해서 할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한 소용돌이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 자신이 '시인' 인가 아닌가는 그래서 전혀 중요했던 것 같지 않다. 단지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보다 근본적인 존재인 절대자('님')와의 교감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시인으로서 '취임사'가 이렇게 '자포자기'식 한탄인데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 볼 몇몇 함석헌의 시들은 절대자 앞에선 한 연약한 인간의 차분한 느낌과, 보편적 진리 혹은 삶에 담긴 어떤 소중한 가치들을 강렬하고도 부드럽게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함석헌의 시는 일독할 가치가 있다. 감옥에서 이렇게 간수병의 눈을 피해가며 쓴 그의 시들은 1953년 󰡔수평선 너머󰡕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당시 함석헌이 쓴 시를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그 사상의 일면이나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영어로 소개한 함석헌의 시



1990년 나는 영국 퀘이커연구소인 우드브룩 칼리지 (Woodbrooke College)에서 3개월간 공부하며 머무른 적 이 있다. 그 당시 우드부룩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사람들 중에는 영국뿐 아니라 유럽본토, 중미, 북미,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에서 온 50여명의 퀘이커들이 있었다. 한 번은 영문학시간에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시를 읽고 급우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세계 각국에서 온 퀘이커들에게 함석헌의「산」이라는 시를 영어로 번역하여 낭송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산 The Mountain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을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I blamed you   When I asked you, you kept silent

Thus I blamed you  But I realised your answer is `silence'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I sneered at you  When I touched you, you did not move

Thus I sneered at you  But I realised your movement is `stillness'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I doubted you   When I sat on your lap, you did not embrace me

Thus I doubted you  But I realised your embrace is `let me be'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Most Great! Most High! Most Strong! Most Gentle!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Let me be like you!  Let me sit face to face with you!  Let me find peace in you!



1980년대 함석헌이 생존할 당시 나는 그의 쌍문동집을 가끔 방문 한 적이 있다. 그때 거실 족자에 이「산」이라는 시가 걸려 있어서 자주 보던 터라 그런지 이 시구가 눈앞에 먼저 어른거린 것 같다. 영국 퀘이커연구소의 외국학생들에게 함석헌이 왜 옥중에서 이시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해방직후 정치․사회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했던 한반도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때 한 영국인이 불현듯 이렇게 이야기 했다. "불안정한 소용돌이처럼 급변하는 당시 상황 속에서 아마 함석헌은 불변하고 흔들림이 없는 절대자를 거대하게 우뚝 솟은 산의 모습으로 표현 한 것 같군요!"



그 영국인의 담담한 '논평'에 뒤통수를 심하게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아, 그동안 별생각 없이 보았던 함석헌의「산」이라는 시가 그런 의미가 있을 수가 있구나!" 정말 함석헌이 그런 마음으로 이 시를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신에 가깝게 들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확고부동하고 거대한 산의 모습을 통해 함석헌은 절대자 하느님의 존재를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존재로 인식한 것 같다.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좁고 어두운 감옥에 갇힌 채 낙담하고 있던 함석헌에게 절대자 하느님은 소련군과 인민군을 시원하게 물리치는 복수와 분노와 모습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오히려 묵묵하고 초연한,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산과 그 위에 펼쳐진 무한한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함석헌은 복잡다단한 인간사의 문제로부터 초연해 있는 절대자를 느꼈을 것이다.



 "당신은 왜 불의한 인민군, 소련군을 물리쳐 주시지 않으십니까?" 하고 그는 하느님을 나무라고, 비웃고, 원망하고 심지어 절대자의 존재여부를 한 때는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 순간 함석헌은 "그분께선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는 깨달음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절대자의 본성을 인간사에 대해 중립적이고 편파, 편견이 없는 존재로 느꼈을 것이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함석헌의 시와 사상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다음으로 살펴볼 시는 너무도 유명한 그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 " 이다. 이 시는 더욱이 이번 용산참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도 가장 애송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과연 이대통령의 '그 사람'은 누구일까?" 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나만 일까? 여하간 대통령의 깊은 심중에 대한 궁금증은 일단 뒤로하고 이 시를 살펴보자. 어쩌면 이시는 함석헌의 대표시인 것 같다. 서울 대학로 혜화역 지하철역 근처에 함석헌의 시비가 있는데  그 시비에 바로 이 시가 새겨져 있다. 이시는 함석헌이 1947년 7월 20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47년 3월에 월남했으니 월남하고 막 남한사회에 정착을 시작하면서 북한에서 겪은 파란만장한 자신의 삶을 회고 하면서 쓰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내가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이 시에 대한 감동이 비 한국인, 특히 서구인들에게도 그대 로 전달되는지를 한번 시험해 보기위해 이 시를 아래와 같이 영어로 번역해 보았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Do you have this person in your life?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Before you leave for a long journey    Without any worry 

Can you ask this person     To look after your family?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ven when you are cast out from the whole world   And are in deepest sorrow 

Do you have someone     Who will welcome you warmly and freely?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In the dire moment when your vessel has sunk    Is there someone 

Who will give you their life belt and say "You must live before me"?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At the execution ground   Is there someone 

Who will exclaim for you  "Let him live, even if you kill the rest of us!"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In the last moment of your life   When you think of this person 

Can you leave this world smiling broadly   And feeling at peace?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Even if the entire world is against you   When you think of this person 

Can you stand alone for what you believe?   Do you have this person in your life?



어떤가? 정말 감동스럽지 아니한가? 나의 영국인 아내도 영역된 이 시를 읽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참 아름답고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시"라며 그 감동을 토로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의 이시는 그가 1947년 쓴 시지만, 그로부터 62년이 지난 2009년 오늘, 우리와는 문화와 역사가 다른 한 영국여성의 가슴도 뭉클하게 만드는, 시공을 넘어선 보편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시라는 확신이 든다.



이 시의 다음구절을 다시 보자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은 1947년 2월 26일 노모와 처자를 소련군 치하의 북한에 남겨두고 홀로 남한을 향해 출발했다. 그 겨울이 다 끝나지도 않은 평안도의 추운새벽에 문간에 기대서 "내 생각 말고 어서 가거라!"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처자식을 뒤에 두고 떠나서 영 돌아갈 수 없는 길인 줄도 모르고 월남하는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함석헌이 그 가족 일부와 남한에서 재회를 하게 된 것은 그 다음해인 1948년이니 이 시를 쓰고 있을 당시의 그는 북한에 남아있는 처자와 노모의 생사를 알 수 없고, 그 생생한 모습이 항상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자신이 떠나면서 그나마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그) 사람"을 가졌기에 또, '그 사람'의 후원과 도움으로 다음에 무사히 남한에서 가족들의 일부와 재회할 수 있었기에 함석헌은 북한에 남한 있는 자기 가족을 친 가족처럼 돌보아준 지금은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을 생각하며 이 시를 썼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함석헌은 우리에게도 이야기 한다. 당신도 '그 사람'을 갖고 또 남을 위해 '그 사람'이 되라고.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해방 전까지 함석헌은 북한에서 4번이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렇게 감옥 문을 들락날락 하는 사이 "집과 나라 형편이 다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에게 어려웠던 일은 감옥에 있을 때만이 아니라 석방되어서였다. 생계가 막막한 상태에서 그는 그저 농사꾼으로 자처하고 동네 농사꾼들과 가까운 벗이 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동네 농사꾼들을 그를 벗으로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지식의 죄가 그렇게 큰 줄은 그때까지 몰랐다." 고 탄식하기까지 한다.



늘 마을손님이 끊이지 않았던 한의사였던 돌아가신 부친의 사랑방을 이웃에게 개방했지만 요주의 인물에다가 '전과자'인 그의 집을 "누구하나 오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는 석방이 되었지만 찾아오는 벗 하나 없는 동네에서 마음이 한없이 외로웠다. "사랑을 하고 싶은데 사랑이 받아지지 않은 사람의 외로움"을 그는 절절히 느꼈다. 그래서 그런 함석헌에게는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이 꼭 절대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이미 돌아가신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던 남강선생이 될 수도 있었고 그를 한 없이 아껴주던 최초의 스승 숙부 함일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을 하고 싶은데 사랑이 받아지지 않은 사람의 외로움"을 지닌 그였기에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이 그토록 그리웠을 것이다.



 스승은 제자에 의해 역사의 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이 없이는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이 서양사에 남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사도바울이 없이는 예수의 훌륭한 인격이 기독교문명에 자리매김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승 남강 이승훈도 그래서 일제강점하의 어두운 시절이지만 제자 함석헌을 두고 가서 그래도 편안히 눈을 감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래 시 구절을 보면 든다.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남강이 함석헌에게 끼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남강을 통해 함석헌은 젊은 시절부터 "공(公)을 위하는 마음"과 "조선독립의 중요성"을 배웠다. 1930년 5월 9일 남강이 임종한 후 함석헌은 그를 회상하며 자신의 심정을 "하나 남은 촛불이 꺼진 뒤의 적막함"에 비유하며 『성서조선』에 이렇게 썼다. "이때껏 저만큼 광휘있게, 저만큼 뜨겁게, 저만큼 기운차게 저만큼 참되게 산 이를 보지 못했다."



남강의 죽음은 함석헌에게 마치 "외로운 촛불의 꺼져 버림"과 같았다. 젊은 시절 남강에게서 받은 절대적 영향 때문인지 그의 노후인 1984년 11월 함석헌은 남강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말년에는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서울 원효로 집을 남강문화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아마도 남강은 1930년 5월 9일 아침 음울한 조국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젊은 제자 함석헌을 생각하며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래서 그런 무조건적인 애정과 신뢰를 보여준 스승 남강을 생각하며 함석헌은 위 시구를 쓰지 않았을까?



아래 시구는 함석헌이 북한 소련군정 하에서 고당 조만식의 삶을 생각하고 썼다는 확신이 든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북한이 일제의 손아귀 에서 해방되었을 때, 북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과 인물들은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이었고, 이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 지도자는 고당 조만식이었다. 그런 연유로 해방 직후 고당은 북한의 정치 중심지인 평양에서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는데, 함석헌은 "해방 후 이북엔 정치적 인물은 조만식 단 하나였다."고 말할 정도다. 당시 북한에서 고당은 이렇게 압도적인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소련의 붉은 군대가 평양에 입성하자마자 돌변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소련의 후원과 지지를 받은 공산주의 세력이 기독교 세력을 제치고 무력으로 북한사회의 전반적 주도권을 장악해나갔다. 그럼에도 소련군정은 "원활한 국정의 운영을 위하여" 민족주의 세력의 협조가 절실하였다. 고당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던 소련 군정은 고당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직을 제안하며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신탁통치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당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신탁통치 문제로 당시 북쪽에서 김일성 다음 가는 세력가이자 고당의 제자 최용건이 19번이나 그를 설득하러 왔다. 고당의 협조를 얻기 위하여 소련군정은 때로는 그를 공격하고 달래고 설명하고 공갈을 해도 고당은 가만 앉아 듣기만 했다. 그리고 그의 최후의 대답은 언제나 가만히 '아니!'였다.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옳은 줄 분명히 알았다 하더라도, 당시 하늘을 찌르는 막강한 권력인 소련군정의 총칼 앞에 '아니'라고 하면 칼이 목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문제인데, 그런데도 고당은 그저 조용히 '아니'라고 했다. 소련군정에 순순히 협조하면 그의 나머지 생애는 물질적 풍요와 세속적 권력이 탄탄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길"을 고당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아니'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다.



함석헌은 그래서 "이보다 더 무서운 영웅이 어디 있나......그 '아니' 한 마디를 생각할 때 그것은 벼락보다 무서운 한 마디다.....그 조그만 몸속에 그렇게 큰 것이 있었던가!" 라며 고당에 대한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이런 고당의 모습을 떠올리며 함석헌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라고 이시를 온 몸으로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나 소련군정에 대해 비협조적인 인사들은 혹독한 '죄 값'을 치루 게 된다. 결국 고당뿐 아니라, 함석헌자신을 포함한, 북한의 기독교지도자들은 1940년 말에 이르러 소련의 지지를 받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철저히 숙청, 제거되었던 것이다.



백아절현(伯牙絶絃)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로 이름 높은 백아(伯牙)라는 이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켤 때 그 연주소리를 누구보다 잘 감상해 주고 이해해주는 친구로 종자기(鐘子期)가 있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며 높은 산과 큰 강의 분위기를 표현하려고 시도하면 옆에서 귀를 기율이고 있던 종자기의 입에서는 탄성이 연발했다.



"아, 멋지다. 하늘 높이 우뚝 솟는 그 느낌은 마치 태산(泰山)같다!"

"응, 훌륭해. 넘칠 듯이 흘러가는 그 느낌은 마치 황하(黃河)같다!"



백아와 종자기는 바늘과 실처럼 그토록 마음이 잘 통하는 연주자였고 청취자였으며 창작자였고 비평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히도 종자기는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백아는 절망과 실의에 빠진 나머지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함석헌과 김교신의 사이도 백아와 종자기의 관계 같았다. 둘은 1901년 같은 해에 태어났고 한 결 같이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과 씨알(민초)들을 위해서 생애를 바친 신앙의 동지였지만 정통 교회로부터는 마치 이단처럼 냉랭한 취급을 받았다.



둘은 또한 동경(東京)고등사범학교 동기동창으로 1920년대 일본에 유학하면서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간죠의 무교회 성서연구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귀국 후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둘은 일제강점하의 실의에 빠진 한국인들에게 애국심과 독립정신 그리고 기독교정신을 고취시켰다. 1934년 동기성서연구회에서 있던 일이다. 함석헌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라는 제목으로 강의하였는데 김교신은 그 강의를 들으면서 "빛이 이 반도를 비춘 지 반세기에 비로소 반도의 진상을 드러냈도다!"하며, 마치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연주를 듣고 탄성을 뿜어대듯 감탄해 마지않았다.



 1940년 계우회사건으로 함석헌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수감된 후 석 달 만인 1940년 11월 그의 부친 함형택은 운명했다. 자기가 옥중에 있어서 아버님의 임종을 지킬 수 없을 때, 상주노릇을 대신 해준 이가 친구 김교신이었다. 1942년 『성서조선』 3월호의 김교신의 글 「조와(弔蛙)」가 개구리의 소생을 통해 조선 민족의 소생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관계자가 전원 검속되고, 관련 간행물이 일체 압수․소각 처분을 받았을 때 함석헌과 김교신을 비롯한 관련자 18명 모두가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또한 김교신의 장녀 결혼은 함석헌이, 함석헌의 장남 결혼은 김교신이 서로 주례를 맡았다. 둘은 문자 그대로 '동고동락'을 한 사이다.



둘의 사이가 이렇게 가까웠는데도 함석헌은 김교신에게 큰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연유는 그가 김교신의 '죽음'에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 일 것이다. '성서조선' 사건 후 1년간의 옥살이 끝에 1943년 4월 함석헌은 출옥되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르고 "아예 똥통을 지면서 농사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던 중 1944년 7월, 석방된 지 1년이 조금 넘어서 친구 김교신이 함석헌을 찾아왔다. 김교신은 그에게 흥남질소비료공장에 함께 취직해서 노동자들을 계몽시키고 그들의 복지향상을 위해 일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때 함석헌은 자신의 약함과 어떤 한계를 느꼈던 것 같았다. 감옥생활 때문에 그는 부친의 임종을 못 보았고, 늙은 모친과 처 그리고 2남 5녀의 자식들은 여전히 거친 생활고와 빛 더미에 허덕이고 있었다. 함석헌은 무능한 가장으로서, 또 노모의 장남이자 쓰러져가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족들의 생계에 대해 큰 책임감을 새삼스레 느꼈던 것 같다. 아니면 끝이 안 보이는 계속되는 생활고에 용기를 잃었기 때문일까? 함석헌은 김교신에게 "흥남에 갈 맘이 없다." 라고 대답하며 친구의 "우정 어린 권유"를 거절했다.

       

김교신은 그래서 친구 함석헌을 뒤로하고 홀로 흥남비료공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김교신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과 복지시설개선을 위해서 힘쓰는 한편,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들의 교육에 모든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1945년 4월, 해방을 겨우 4개월 앞두고, 겹친 과로와 장티푸스에 걸려서 김교신은 세상을 떠났다. 함석헌은 이제 가장 친한 친구마저 잃은 것이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보낸 친구였던 탓인지 8월 15일 해방의 소식이 들려 왔을 때, 함석헌이 가장 "먼저 염두에 떠오른 것이 '김교신이 있었으면'하는 생각"이었다. 고인 김교신에 대한 함석헌의 인물평을 보자. "김교신의 김교신 된 소이는 허위, 불의라고 생각하는 데 대하여는 용서를 않는 데 있다. 그는 인생을 참 살자 했고 나라를 참 사랑하자 했으며, 인생을 참으로 사는 것이 가장 참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요, 신앙에 사는 인생이 참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의 말이요, 글이요 그렇게 살자 노력한 것이 그의 생애다."



모든 이상적인 친구사이에서 그렇듯 김교신은 함석헌에게 신앙동지이자 스승이었던 것 같다. 당시, 해방의 감격을 차마 못보고 죽은 김교신의 집을 터벅터벅 찾아가며 함석헌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시를 썼다. 아래 살펴 볼 시는 위의 함석헌의 시에 감동을 받은 아내가 영역했다.



돌아간 김교신 형 집을 찾고 A Visit to the Home of the Late Kim Kyo-Shin



문 앞에 흐르는 물 의구(依舊)히 흘러 있고  

울 뒤에 맑은 송풍(松風) 제대로 맑았구나

봄볕은 서창(書窓)을 비쳐 님의 얼굴 보는 듯

The stream in front of the house flows by unchanged

And a gentle breeze still passes through the pine trees

The spring sunshine falls on the library windows and I fancy that I can see his face



이 시내 마시면서 이 바람 쏘이면서  

흐리운 이 세상을 맑히자 애쓰던 맘

그 마음 어디 찾으랴 북한산만 높았네.

He loved walking beside this stream, feeling the wind on his cheeks

He put his soul into trying to make this muddy world clean

Bukhan Mountain still towers above, but where can I again find such a heart?



시냇물 흘러가고 솔바람 불어가고

산사(山寺)의 저문 종이 울리어 가는 저녁

다녀간 님을 그리며 나는 어딜 가려노

The stream flows on, the wind in the pine trees continues to blow

It is evening and in the mountains a temple bell tolls

I miss my friend so much. Where shall I go from here?



김교신에 대한 함석헌의 간절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나온다. 사람은 가고 역사는 흘러도 위대한 인간의 정신은 남는다. 비록 주류 한국교회로부터는 마치 이단자 취급을 받았지만 김교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남다른 애국심은 순수함과 양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문 앞에 흐르는 물 의구(依舊)히 흘러 있고 울 뒤에 맑은 송풍(松風) 제대로 맑았구나

봄볕은 서창(書窓)을 비쳐 님의 얼굴 보는 듯"



함석헌에게 김교신은 변하지 않는 상록수 같은 존재이자 더러운 세상을 깨끗이 씻는 맑은 물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함석헌의 이 시 구절은 신약성경의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는 구절을 우리에게 연상시킨다. 김교신은 1937년 봄 혼자 힘으로 서재를 지었다. 서재를 지으면서 김교신은 "신기한 것과 감사한 것과 찬송하고픔을 억제할 수 없었다."  고 고백했던 만큼, 봄날에 김교신이 직접 지은 서재의 창문으로 비추는 따스한 햇볕은 함석헌에게 김교신의 얼굴을 강하게 연상시켰을 것이다.



"이 시내 마시면소 이 바람 쏘이면서 흐리운 이 세상을 맑히자 애쓰던 맘

그 마음 어디 찾으랴 북한산만 높았네."



함석헌과 김교신이 살았던 시절은 조국이 앞날이 막막한 시절이었다. 식민지 지식인들이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김교신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언제 올지 모르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몸을 잊고 전심전력을 다 했다. 그 결과로 그는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운명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를 잃은 비애감, 그리고 그런 맑디맑은 김교신의 마음을 그리워하며 북한산을 쳐다보는 함석헌은 그날따라 유난히 북한산이 무한히도 높아보였을 것이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람보다는 몇 번을 넘어져도 비애를 딛고 계속해서 다시 일어나는 함석헌의 오뚝이 같은 모습이 연약한 내게도 끊임없는 위로가 된다.



"시냇물 흘러가고 솔바람 불어가고 산사(山寺)의 저문 종이 울리어 가는 저녁

다녀간 님을 그리며 나는 어딜 가려노."



신앙동지 김교신이 죽었어도 시냇물은 어제와 다름없이 흐르고 솔바람도 지난날과 다름없이 불어온다. 이런 무심한 자연 때문인지 한 순간 함석헌은 '방황'과 '방랑'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 펼쳐진 함석헌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그런 잠깐의 '일탈'과 '방황'의 순간들을 극복하고 어떻게 자신의 고난을 승화시켜 나갔는지 안다.



민족, 가족 그리고 나



어떤 이들은 함석헌이 가족사에 무관심했다고 비난한다. 불의를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올바른 꿈을 실현하며 돈도 많이 벌고 그래서 가족의 삶도 정신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 그러나 현실은 그러기가 너무 어렵다. 불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대에 올바름만을 추구하는 의인들이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살기는 아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울 것이다.



함석헌이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조선의 독립, 조국의 민주화, 언론의 자유 등을 실현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동안 그는 그와 가족들에게 좀 더 다급하게 필요한 요구들, 이를 테면, 재테크, 주식투자, 부동산투기 등을 통한 가계소득 올리기 등을 게을리 했다. 그리고 그 '게으름' 탓으로 그는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대책 없는 가장"이라는 질타와 비난을 많이 받아왔다. 이러한 수없는 함석헌에 대한 질타와 비난을 떠올리면서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그럼 의인과 그의 가족이 불의가 하늘을 찌르는 난세에도 호의호식해야 된다는 것인가?



함석헌을 포함 한국 현대사에서 올바름을 추구한 인물들의 공통점을 보면 김구, 고당, 남강, 김교신, 장준하, 계훈제 같은 분들이 나라와 씨알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만큼, 그분들의 가족들은 관심대상에서 철저히 외면되어 너무나 고난에 찬 삶을 살았다. 나라의 긴박한 현실이 그분들이 두 가지 토끼. 즉 자아실현과 가족의 물질적 평안함, 을 함께 실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난세를 살았던 함석헌의 경우도 그의 가족사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우 함석창(咸錫昌)은 일본 구주대학(九州大學) 영문과를 졸업한 당시에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으나, 형과는 달리 오하라(大原)라고 창씨를 하고 일본에 협력하며 후에 일본 점령하의 만주안동성의 부성장까지 역임하였다. "먹고살기 위해" 그리고 자녀의 앞날을 위해, 일제강점기 80%의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제국주의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협조하였다. 반면에 함석헌이 선택한 길은 누구에게나 강요하기엔 너무 고되고, 전적인 가족의 희생을 요구하는 험난한 길이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기꺼이 그 길을 택했고, 그래서 그런 함석헌과 그의 가족은 일제로부터 톡톡한 '죄 값'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아래 시는 아마 그런 그의 마음의 갈등, 고민을 표현 한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역은 아내와 공동으로 했다.



나라 My Country and Me



나라일 걱정인데 나란 생각 겹쳐놓으니

I feel crushed by my own cares and by concern for my country



나란히 선 두 나라 나갈 길 나눴구나!

Two parts standing side by side yet their course divided



두 나래 탁탁 쳐 날아 하늘나라 솟을까!

May we row with two oars beating in time may we soar up to Heaven together!



불의에 시대를 살면서도 자아실현도 하고 물질적 풍부함도 함께 누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1962년부터 1990년까지 약 27년간 백인들에 의해 감옥생활을 하면서 남아프리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의 희망이 되어왔던 넬슨 만델라(1918- )는 모든 인간은 인생에 있어서 두 가지 의무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가족이나 부모에 대한 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국이나 인류공동체에 대한의무가 그것이다.



안정된 사회나 정의가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각개인은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이러한 두 가지 의무를 적절히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권이 묵살당하고 독재와 거짓이 판을 치는 나라나 사회에서는, 인간은 이러한 두 가지 의무를 제대로 정직하게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부정부패와 불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개인은 권력에 의해 소외되어가거나 처벌받기 일쑤다.



독재자나 사기꾼이 언론조작이나 술수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사회에서, 조국이나 인류공동체 대해 올바른 의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개인은 불가피하게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소중한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고 자기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긴 삶을 강요받게 된다. 함석헌 뿐 아니라, 독일의 나치정권 아래서 디트리히 본훼퍼 (1906-1945) 신학자나,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경우가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넬슨 만델라 등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 함석헌은 가족의 안녕을 등지고 민족의 안녕을 위해 일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당시 명문 평양고보를 다니면서 함석헌은 공(公)을 위한 정신, 조국애 등 그의 "어릴 적 경건함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고 고백하기 까지 않았나! 그러나 결국 삼일운동을 몸소 겪고 남강, 고당선생 등으로부터의 영향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나 가족의 안녕보다는 민족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전념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20세기 한반도 즉, 불의와 독재가 판치는 상황에서, 씨알의 존엄성, 자유, 올바른 길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곧 그에게 한 부모의 자식으로서, 한 여성의 남편으로서, 한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수행할 귀중한 기회를 가차 없이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 본 시는 그런 함석헌의 갈등과 고민을 표현 한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함석헌의 시 몇 편을 살펴보았다. 함석헌의 시는 동과 서, 한국인과 비한국인을 넘어서 보편적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잔잔한 감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잔잔한 감동은 세계인들과 공유 할 수 있는 인간이 추구할 궁극적 가치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의 명저 중의 하나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도 함석헌은 과학적인 분석가의 머리로 쓴 것이 아니라, 시인의 열정과 가슴으로 썼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자신도 그의 역사책을 역사 연구서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의 기도와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표현한다. 결국 어느 하늘아래서나 인간이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열정과 감동의 힘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 열정과 감동을 주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시인이 곧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끝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는 시인이 곧 함석헌이다!
 

덧붙이는 글 | "신생" 시전문계간지 2009년 여름호 게재


태그:#함석헌, #시, #김교신, #남강 이승훈,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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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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