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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빈소 앞에서 촛불을 켜 놓은 채 저녁 식사를 하는 조문객들.
 26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빈소 앞에서 촛불을 켜 놓은 채 저녁 식사를 하는 조문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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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말하면 안 되지만, 노 대통령이 우리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주네예. 참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예. 노 대통령님, 맛있게 잘 묵겠습니더."

김영관(44)씨의 왼손에는 국밥 한 그릇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오른손엔 촛불이 들려 있었다. 그의 옆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딸도 국밥과 촛불을 들고 있었다.

"보자, 자리가 어딨나. 저~기 있네. 지영아 절로 가자. 아빠 따라 온나."

아버지와 딸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천막 위로는 전등이 밝게 켜져 있었지만 부녀는 촛불을 끄지 않았다. 촛불 두 개는 딸과 아버지 사이에 놓였다. 아버지는 후후 불어가며 더운 국밥을 입안으로 떠 넣었다. 딸 역시 숟가락에 얹힌 뜨거운 국밥을 호호 불며 천천히 씹었다. 아버지가 "맛있나"라고 묻자 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26일 저녁 8시 특별할 것 없는 김해시 봉하마을의 한 풍경이다. 어둠이 내렸지만 조문객들의 발길은 줄지 않고 있다. 조문을 마친 사람들을 맞이하는 곳은 야외에 마련된 '식당천막'.

"배고프신 분들 이쪽으로 오세요! 식사하고 가세요! 국밥과 떡이 마련돼 있습니다! 식사하고 가세요~!"

자원봉사자 양모(52)씨는 사람들을 식당천막으로 안내한다. 식당천막에서는 중년 여성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 30여 명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일부는 밥을 푸고, 일부는 국을 끓인다. 외부에서 공수해온 밥은 그야말로 산더미이고, 쇠고기국이 펄펄 끓고 있는 대형 솥은 10개가 넘는다.

식사를 하려는 사람들은 밀려들고 흰 쌀밥 위에 쇠고기를 담는 아줌마의 이마엔 뜨거운 국물 같은 땀방울이 송송 맺혀 있다.

26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빈소 앞에서 촛불을 켜 놓은 채 저녁 식사를 하는 조문객들.
 26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빈소 앞에서 촛불을 켜 놓은 채 저녁 식사를 하는 조문객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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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드이소!"

진영읍 부녀회장 최금희(45)씨는 땀을 훔치며 국밥을 조문객들에게 건넨다. 최씨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은 하루 평균 3~4만개의 국밥을 만들어 낸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전쟁 같은 일이다. 그래도 최씨의 얼굴에는 싫은 기색이 없다.

"앉아서 울고 있으면 뭐 합니꺼. 이래 나와서 일이라도 해야 맘이 편하지예. '국민장'이니 국민을 위해 일해야지예. 이래 일하는 게 노 대통령을 좋게 보내드리는 길 아입니꺼."

진영읍 부녀회 활동을 오래한 최씨는 노 전 대통령과 여러 번 얼굴을 마주했다. 최씨는 "이웃집 오빠같이 편안하고 서민적인 사람이 바로 노 전 대통령"이라고 추억했다.

자원봉사자들이 대접하는 건 대단한 음식이 아니다. 쇠고기 국밥 한 그릇과 배추김치가 전부다. 그래도 조문을 마친 사람들은 이 음식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맛있게 먹는다. 점심 때는 천막 아래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저녁에는 빈자리를 찾기 힘들다.

약 500여 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는 야외천막에 앉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젖먹이 아이와 함께 온 엄마, 수업을 마치고 교복을 입고 찾아온 학생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검은 정장을 차려 입고 온 30~40대 직장인···.

한마디로, 온 국민이 노무현 전 대통령 빈소에서 함께 추모하고 함께 뜨거운 밥을 나눠 먹고 있는 셈이다. 상갓집에 으레 빠짐없이 있는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 없이도 사람들은 거대한 밥상에 앉아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조문객들은 천막 위에 전등이 있어도, 밥상 위에는 잘 어울리지 않아도 촛불을 끄지 않는 '센스'를 발휘한다. 이 때문에 봉하마을 천막 아래에서는 수백 명이 상 위에 촛불을 밝히고 밥을 먹는 대형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다.

26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빈소 앞에서 촛불을 켜 놓은 채 저녁 식사를 하는 조문객들.
 26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빈소 앞에서 촛불을 켜 놓은 채 저녁 식사를 하는 조문객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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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먹이 아이와 함께 온 김영신(34)씨는 "그냥 집에 갈까 했지만 이 따뜻한 밥도 노 전 대통령이 마련해 준 선물이라 생각하고 맛있게 먹고 있다"고 말했다.

또 두 아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온 송호영(39)씨도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서 촛불을 놓고 밥 먹는 것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며 "이런 게 가능한 것도 노 전 대통령이 시골 고향 마을로 내려왔기에 가능한 게 아니겠느냐"고 밝혔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자신이 먹은 밥그릇을 직접 반납한다. 행주를 들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 상을 닦으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람들이 상을 차지해 밥을 먹는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다시 자원봉사자들이 나눠주는 물이나 떡을 받아든다.

수천 수만 명이 동시에 움직이는 봉하마을은 혼잡스러우면서도 잘 맞아 떨어지는 톱니바퀴처럼 질서 정연하게 움직인다. 국화꽃을 나눠주고, 사람들 줄을 세우고, 식사를 대접하는 자원봉사자들이 힘이 크다.

이날 어제와 오늘 경남도청은 총 7만 명분의 국밥, 4만개의 빵과 우유, 생수 1만 7000병 등을 제공했다. 이밖에 무 2톤과 함께 국화 등을 무료 공급한 시민들도 있었다.

노 전 대통령 추모 행렬이 계속되고 있는 봉하마을에서는 지금 전에 없던 문화가 형성되고 대형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다. 


태그:#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봉하마을,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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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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