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쥐>의 포스터

영화 <박쥐>의 포스터 ⓒ 모호필름

나란 인간은 무엇일까? 내 모습은 무엇일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알고 싶어서 계속해서 질문을 해 보고 답을 하면서 나를 찾아가지만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가끔은 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됨에 만족할 따름이다. 오늘은 영화 한 편을 통해서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박쥐>란 영화다. 상현 신부(송강호)가 수혈을 받고 뱀파이어가 된다. 신부는 친구 광우(신하균)와 그의 엄마(김해숙)로부터 학대받는 광우의 아내 태주(김옥빈)를 사랑하게 된다. 과연 신부는 뱀파이어의 권력을 사용해서 광우의 아내 태주와의 사랑을 어떻게 이루어낼지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을 늦추게 하지 않는다.

이번 영화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한국 뿐만아니라 세계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감독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개봉 당시부터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그러나 개봉 후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오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역시 박찬욱이다'라고 하는 사람들과 '재미없다. 뭔가 불편하다'고 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오히려 후자 쪽의 관객들이 더 많아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재미없는 것보다 뭔가 불편하다는 쪽에서 더 큰 의미를 찾고자 한다. 나 또한 뭔가 불편함을 가지고 극장 밖을 나온다. 영화를 보고 나서도 한참동안 영화내용을 다시 생각해보며 의문을 던지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있다. 법적으로 장애인이 아닐뿐 장애가 없는 완벽한 인간은 없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탐구하려 한다. 특히, 이번 <박쥐>라는 영화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란 영화에 비하면 적을 수 있지만 많은 장애인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 장애인은 병원에 누워만 있다. 의식 없이 그저 숨만 남아있을 뿐이다. 평소 삶에 있어서도 나눔을 실천하던 친구라고 한다. 그런 그를 통해서 신부 뱀파이어는 피를 수혈받는다. 때론 피를 통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두거나 필요할 때 꺼내 먹는다. 살인은 하지 않지만, 살아있는 인간으로부터 피를 뽑는 것은 과연 신부 뱀파이어에게는 옳은 행동일까?

어느정도 정당성을 갖기 위한 나름의 핑계일 수 있다. 장애인의 인권은 무시한채 자신의 도덕성과 생명유지를 위해 그를 이용하고 있다. 물론 그를 위해 목욕과 기도 등의 봉사를 한다고 그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착하기 때문에 신부가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은 이유가 안된다. 나는 과연 그런 장애인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두 번째 장애인은 신부에게 아버지 같은 신부다. 신부가 고아원 시절부터 성당에서 알던 스승 같은 신부로 보인다. 시작장애인이며, 신체장애인이기도 하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볼 수 있고 가끔은 썬그라스를 벗기도 한다. 어떤 문제나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신부는 노 신부를 찾는다. 노 신부는 상현 신부에게 실험에 자원하기 전에도 순교와 자살을 구분하라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 뱀파이어가 된 것을 알게 된 노 신부는 상현 신부가 피를 얻지 못하고 방황할 때 자신의 피를 내어준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뱀파이어가 되게 해달라고 한다. 한번만이라도 일출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아들 같은 상현 신부에게 간곡히 요청한다. 그러나 이런 모습에 실망이라도 한 듯 상현 신부는 노 신부의 피를 먹고 그를 죽인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보는 것은 평생 소원일 것이다. 그토록 노 신부로서 품위를 유지했던 신부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장애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뱀파이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했으면 한다. 이 영화 속에서 붕대감은 성자, 상현 신부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장애인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나 또한 뱀파이어를 만나면 그의 피를 달라고 할까? 그렇게 한다고 인간으로서의 내 장애들이 사라질까?

 뱀파이어가 된 상현(송강호)은 친구(신하균)를 낚시터로 유인해 살인하려고 한다.

뱀파이어가 된 상현(송강호)은 친구(신하균)를 낚시터로 유인해 살인하려고 한다. ⓒ 모호필름


세 번째 장애인은 친구 광우와 그의 엄마다. 광우는 정신지체 장애로 볼 수 있으며, 그의 엄마는 사고 후 의식은 있지만, 눈만 깜빡이는 전신마비 증세를 보인다. 광우의 아내 태주는 어릴적부터 한 집에 살면서 광우로부터 성적인 학대를 받고, 모든 집안 살림을 혼자서 도맡아 한다. 장애아들을 둔 엄마는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 한다. 어릴적부터 데려다 키운 자신의 딸이기도 한 태주를 결국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킨다.

장애가 있다고 모든 게 용서되지는 않는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장애인이 결혼할 수 있다면 이것은 옳은 선택이 결코 아니다. 그냥 사는 것일뿐 전혀 행복하지 않다. 차라리 혼자 지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사는게 더 나을 수 있다. 라여사도 이같은 아들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에 결국 아들도 죽고 자신도 전신마비의 화를 당한다. 그럼에도 눈깜박임만으로 아들의 살인범을 알리는 노력은 대단하다. 이런 눈깜박임을 믿어주는 도박친구들의 모습도 아름답다. 그러나 이 행동 자체가 마작을 함께 하던 모두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자신이 가진 장애가 있지만,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의지에는 감탄을 하게 되지만, 자신만을 위한 행동에도 책임지며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이 아쉬울 따름이다. 나 또한 장애가 있다고 원치않는 결혼,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행동 등 모든 걸 용서하는가? 반대로 작은 장애 행동조차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네 번째 장애인은 몽유병에 걸린 태주다. 태주는 남편이자 오빠였던 광우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남편에 대한 사랑은 전혀 없어 보인다. 도박을 하다가도 그의 무릎위에 앉게 되면 심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밤이 되면 언제나 잠옷만 입은채 동네를 뛰어다닌다. 그러던 도중 상현신부가 자신의 신발을 내어준다. 이를 계기로 신부와 사랑하게 된다. 신부와의 사랑에 대해서 어떤 부끄러움도 없다.

나중엔 상현신부가 신부 옷을 벗고 태주는 신부에게 남편을 살인하도록 유혹한다. 남편 광우는 죽고 사랑이 순탄할 것처럼 보이지만 태주는 광우를 그리워한다. 분노한 상현은 태주와 싸우게 되고 결국 태주도 뱀파이어가 된다. 태주가 죽는것보다 함께 뱀파이어가 되어 영원히 사랑하는 것을 택한다. 그런데 태주는 뱀파이어가 되어 살인이 더욱 더 많아지고 다른 남자와도 성관계를 한다. 뱀파이어의 힘을 얻고도 자신은 인간으로서의 무엇인가 허함이 있었는가 보다. 더욱더 타락해져간다.

인간이 그리웠을까? 광우와 그의 엄마의 학대가 뱀파이어보다 따뜻했을까? 신부와의 사랑했던 순간은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신부는 태주와 함께 죽을 것을 각오한다. 그럼에도 태주는 해가 뜨는 차 앞에서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친다. 그런 그녀도 죽기직전 처음 신부가 주었던 신발을 신고 죽는다. 태주는 선과 악이 왔다갔다 한다. 인간이 선해지고 악해지는 것이 별로 차이가 없는지도 모른다. 장애도 있고 없고는 별로 차이가 없다. 그토록 미웠던 병신이라 했던 남편 광우가 다시 신부보다 더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나 또한 선과 악, 장애와 비장애, 모든 걸 내 안에 가지고 있고 태주와도 별로 차이가 없다.

 살해된 친구의 혼령이 상현(송강호)과 태주(김옥빈)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살해된 친구의 혼령이 상현(송강호)과 태주(김옥빈)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 모호필름


마지막으로 장애인은 붕대감은 성자, 상현 신부를 따르는 추종자들과 뱀파이어가 된 상현 신부다. 누워만 있는 환자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감에 빠져 있던 신부가 찾은 유일한 방법은 실험에 자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이 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그곳으로 떠난다. 이런 그가 수혈을 받아 살아 나고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전의 무기력한 상황에서 뱀파이어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의 엄청난 힘을 더 좋은 일에 쓰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오히려 아주 작은 고민, 자신 스스로의 생명을 간신히 유지하려고만 한다. 피를 구하기 위해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 그래도 최소한의 윤리적으로 덜 문제가 되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수준에 머무른다. 그런 그에게 적지 않은 수의 추종자들이 따른다. 이들은 모두 장애인으로 보인다. 500명 중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붕대감은 성자, 상현 신부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면 자신의 장애도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장애인들의 모습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걸까? 그저 자신의 장애가 나아지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태주와 상현 신부가 동반자살을 택하기 직전 추종자들의 텐트로 가서 여성신체장애인을 강간하고 자신의 성기마저 그들에게 노출시킨다. 아니 관객 모두에게 자신의 성기를 보여준다. 추종자들에게 그렇게 함으로써 뭔가를 알려주려는 걸까? 헛된 꿈을 이제 그만 꾸고 성자는 없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걸까?

장애인에게 과연 나는 얼마나 진실을 말할 수 있을까? 나를 따르는, 나를 믿는 누군가에게 나의 그렇지 못함 때문에 미안해진다. 진실로 나의 부족함까지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으면 한다. 또한 어떠한 내 스스로의 노력도 없이 내 장애가 누군가로 인해 나을 수 있다는 믿음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닐까?

이밖에 도박중독에 걸린 이웃들이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 매주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모두가 모여서 마작을 한다. 낚시를 할 수 있도록 불법으로 기회를 제공해 주고, 도박친구인 광우의 아내와도 성관계를 한다. 오히려 필리핀에서 결혼하러 한국에 온 여성만이 장애가 없어 보인다. 오늘도 대형할인매점에서 한 외국인과 한국인, 그리고 그들의 딸이 함께 있는 것을 보면서 나의 시선과 사고에 장애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아니 한국인은 자신과 다름에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더 큰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장애 박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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