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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일러둔다. 내가 읽은 시들은 '시인 조호진씨'가 아니라 한때 '전라도 사내'로 살았던 '호진이형'의 것임을.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까 호진이형이 <오마이뉴스> 전남 동부 지역기자로 활동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본사 상근기자'로 근무하고 있을 때다.

 

그 어느날 그놈의 '전라도 정서' 때문에 친하게 지내던 형과 서대문에선가 광화문에선가 술을 한잔 '빨고' 있었다.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불콰해진 형은 나에게 종이 한 뭉치를 내밀었다.

 

"형 이거 뭡니까?"

"내가 쓴 신데 한번 읽어봐줘."

 

형이 건넨 종이뭉치에는 20여 편의 시가 들어 있었다. 형이 부끄러운 듯 어눌하게 한마디 더 걸쳤다.

 

"그동안 쓴 시를 정리하고 있는데 정리되는 대로 시집을 내고 싶어. 시집을 낼 만한 시들인지 네가 먼저 봐줘."

 

상한 것들이 상한 것들을 만나면...

 

형에게 시집 출간은 '인생의 중간 정리'라는 의미가 있었다. 난 형이 건넨 그 종이뭉치에서 가슴시리게 아픈 시들을 만났다. 아니 신산스러웠을 형의 40여 년 인생을 만났다고 해야 맞을 게다.  

 

빛나고 반듯한 것들은

모두 팔려가고

상처난 것들만 남아 뒹구는

파장 난 시장 귀퉁이 과일 좌판

못다 판 것들 한웅큼 쌓아놓고

짓물러진 과일처럼 웅크린 노점상

잔업에 지쳐 늦은 밤차 타고 귀가하다

추위에 지친 늙은 노점상을 만났네

상한 것들이 상한 것들을 만나면

정겹기도 하고 속이 상하는 것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떨이로 몽땅 가져가시오!"

떨이로 한아름 싸준 과일들

남같지 않은 것들 안고 돌아와

짓물러져 상한 몸 도려내니

과즙 흘리며 흩뿌리는 진한 향기

꼭 내 같아서 식구들 같아서

한입 베어 물다 울컥거렸네

('상처난 것들의 향기', <우린 식구다>, 61쪽)

 

형은 그동안 얼마나 "짓물러져 상한" 삶을 살았으면 "짓물러진 과일"이 "꼭 내 같아서 식구들 같"다고 했을까? "상한 것들이 상한 것들을 만나" 울컥거리며 써내려간 이 시 한 편만으로도 시집을 내기에는 충분했다. 난 그날 형에게 호기롭게도 덜컥 약속해버렸다.

 

"형 내가 시집 꼭 내줄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그날 이후 난 출판사를 운영하는 몇몇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시집 출판을 타진했다. 그러나 "상한 것들"의 안식처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가 참 좋다"는 평이 많았지만 선뜻 출판하겠다고 나선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서대문 노래방에서 호기롭게 카드를 긁다가...

 

결국 호기롭게 약속했던 시집 출판은 기약없이 미뤄지고 말았다. 그 사이에 형은 <오마이뉴스>를 떠났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이주노동자들의 벗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우린 식구다>(갈무리 출판사)라는 제목으로 형의 첫 시집이 나왔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다시 만났다. 한때 '노동해방 전사'였지만, "집 한 칸이 없"고, "사랑은커녕 카드만 끊"겨 버린 한 사내를.

 

새라면 아아 쫓겨나지 않는 새라면

해거름 속으로 평화롭게 귀가하는

새처럼 아, 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꽃이라면 아, 뽑히지 않는 꽃이라면

사방 천지 들녘에 억세게 뿌리 내린

들꽃처럼 아, 피어날 수 없는 가난 때문에

문패도 번지도 없는 주소불명의 세대주여

강제집행 통지서 받아든 불법 거주자여

이 지상의 집 한칸

지고 갈 수도 없는 집 한 칸이 없어

잠든 자식 머리 맡에서 시로 우는 아비여

('이 지상의 집 한 칸', <우린 식구다>, 43쪽)

 

사랑은 어차피

기다려도 오지 않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지 않는다.

 

칼에 찔린 사내와 여자들

서대문 우체국 뒷골목 노래방에서

밤새 옛사랑을 불렀지만

사랑은커녕 카드만 끊겼다.

 

별 수 없는 일

분을 품으면 죽는다.

별도리 없는 일

잠잠(潛潛)하자.

('서대문 야곡', <우린 식구다> 58쪽)

 

'서대문 우체국 뒷골목 노래방'에서 호기롭게 카드를 긁었던 형은 한동안 술도 마시지 않고,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난 형의 카드가 끊긴 것을 한참 뒤에서야 알았다. 사족이지만, 나도 그 노래방에 형과 함께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형의 카드를 끊어먹은 주범 중 한 명이라는 얘기다.

 

형의 시가 여전히 뜨거운 이유

 

첫 시집 출간 기념으로 다시 형을 만났다. 봄비가 내리던 그날, 형은 자신의 성품에 맞지 않게 몇몇 '잘나간다'는 시인들을 무겁지 않게 씹어댔다. '마이너(minor)의 열등감'인가? 아니다. 형이 그들을 입에 올린 이유는 분명했다.

 

"그들의 시와 삶이 너무 다르다."

 

물론 형도 많이 변해 있었다. 한때 지독히도 외로웠던 형은 이제 사랑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고시원에서 쪼그리고 잠들 일도 없으며, 지상에 집 한 칸 없다고 서러워 울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형은 여전히 "상한 것들"의 마음으로 낮은 곳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갈릴리 사람 예수가 아주 오래 전 그랬던 것처럼. 이것이야말로 형의 시가 여전히 뜨거운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 시집 판매 수익금은 동남아 어느 국가의 가난한 마을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우린 식구다

조호진 지음, 갈무리(2009)


태그:#조호진, #우린 식구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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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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