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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의 카스피해는 좀 쌀쌀했지만 애들은 그런 거 개의치않고 즐겼습니다.
 한겨울의 카스피해는 좀 쌀쌀했지만 애들은 그런 거 개의치않고 즐겼습니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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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 잡지를 보다가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던 호수와 '바이칼을 가다'라는 제목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 사진과 기사가 그렇게 가슴에 와 닿아서 마음속으로 꼭 바이칼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기사에서는 바이칼 호수 주변에 자작나무 숲도 있다고 했는데 내 귀는 벌써 바람에 자작나무 가지가 쓸리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바이칼은 매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꿈꾸던 바이칼은 못 갔고, 바이칼 비슷한 데는 구경하게 됐습니다. 카스피해입니다. 카스피해는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라고 합니다. 호수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다라고 하는 게 어울릴 정도로 눈으로는 그 끝을 볼 수 없는 호수였으며, 또한 그 옛날 사진에서 본 바이칼처럼 눈을 찌를 것 같은 파란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흰색 수피가 덮인 가늘면서 기품 있게 키가 큰 자작나무 숲을 지나갔습니다.

카스피해서 만난 이란 아이들과 우리 애들.
 카스피해서 만난 이란 아이들과 우리 애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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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해를 가기 위해  아르다빌 시내를 관통하다가 과일 가게를 봤습니다. 그 가게를 보는 순간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그래서 난 과일을 사고 싶다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도 내 생각과 같아서 기사 아저씨는 우릴 과일 가게 앞에 세워주었습니다.

여행이고 뭐고 구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느끼고 있었기에 사실 과일가게를 보자 거의 병적인 집착을 했습니다. 그래서 과일 가게서 내려 봉지에 과일과 야채를 담을 때 누군가 빼앗아가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아니 금광을 발견하고 누구에게 하나라도 안 빼앗기려고 그 금들을 자루에 쓸어 담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이것저것 쓸어 담았습니다. 그때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수피즘에서 말하는 그 무아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건 나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우리 일행들을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정신없이 사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다 똑같은 모양입니다. 차를 타고 다니다 끼니를 놓쳐 굶기도 하고 하필 우리가 온 시기가 아슈라다 금요일이다 해서 식당이 문을 안 열기기도 하고 나처럼 음식이 안 맞아서 굶기도 하고 이렇다 보니까 먹을 수 있는 걸 발견했을 때 정말 미친 듯이 달려들게 됐습니다.

사과, 오이, 양파, 양배추, 석류, 토마토, 마늘 등 그 가게서 살 수 있는 건 다 사가지고 끙끙거리며 차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많이 사도 우리 돈으로 5천원 밖에 안 나왔습니다. 이란에서는 과일가게가 노다지가 맞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비싸서 좀 부담스러운 키위라든가 석류 그리고 청포도를 이 나라에서는 정말 마음 놓고 실컷 사먹을 수 있었고, 또 과일이 무척 달고 맛있습니다. 그래서 난 이란 여행하는 동안 정말 원없이 과일을 많이 먹었습니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 이곳으로 왔는데 역시 명성에 걸맞게 풍경이 멋졌습니다. 여름에 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 이곳으로 왔는데 역시 명성에 걸맞게 풍경이 멋졌습니다. 여름에 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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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해는 물가라서 그런지 다른 데보다는 좀 쌀쌀했습니다. 겨울 바닷가는 으레 좀 쓸쓸하고 황량하기도 합니다. 새파란 물과 넓은 모래사장은 그대로지만  차가움이 달갑지 않아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이 부시게 새파란 물가에 한 가족이 보였습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두툼한 얼굴을 한 아버지에게서 어떻게 저런 딸이 나왔지, 하고 갸우뚱할 만큼 새하얀 피부에 곱상한 얼굴을 한 여자애 두 명이 물가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우리 집 작은 애는 나중에 귀엣말로 여자애들이 새침데기 같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말 한 마디 안 해서 그렇게 느낀 모양입니다.

애들은 바닷가에 오니까 좋아했습니다. 애들은 좋아하는 게 다 똑같은 것 같습니다. 물가에서 모래를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만들거나 조개껍데기 같은 걸 줍고 또 뛰어다니기도 하고. 애들에게는 추운 것보다는 노는 게 더 좋은지 그동안 별로 즐기지 않던 큰 애조차도 카스피해에 오자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놀았습니다.

바닷가에 있던 건물인데 주위 풍경과 참 잘 어울리네요.
 바닷가에 있던 건물인데 주위 풍경과 참 잘 어울리네요.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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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난 좀 별로였습니다. 전에 잡지에서 봤던 바이칼의 어떤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고독이나 낭만을 기대했는데 내게서 카스피해는 피서객이 몰려왔다 사라진 후 빈 깡통이나 과자 봉지가 굴러다니는 폐장한 해수욕장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또 해변에는 누군가 조업을 했던 흔적도 보였습니다. 물고기를 잡았다는 흔적이 뚜렷하게도 나무배가 서있고, 바닥에는 그물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지요. 마치 7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가  동해안 어느 항에 들어섰을 때하고 비슷했습니다.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을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어서 좀 실망하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나의 기대에 부응하는 느낌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애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가는데 걸어가면서 보니까 풍경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차에서 내린 곳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주로 들르는 곳이라 생활 냄새가 많이 남아있는데 거기서 벗어나 한참 걸어가니까 새로운 모양의 집이 나타나고 카스피해 해변이 전체적으로 조망되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본 카스피해는 역시 명성에 걸맞게 정말 멋진 풍경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 옛날 바이칼 호수 사진에서 느꼈던 어떤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느낌이 살짝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카스피해서 소원 하나는 이뤘습니다. 비록 소원했던 바이칼은 못 갔지만 그 비슷한 카스피해는 봤으니까요.


태그:#이란, #카스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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