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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끼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원인을 알지 못했으나 얼마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한 사람이 어떤 주장을 했을 때 다른 사람이 찬성해 주면 계속 전진할 것이고, 반대하면 자극되어 더 분발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속에서 외쳤는데도 어떠한 반응도 없다면, 즉 찬성도 반대도 없는 경우에는 마치 자신이 끝없는 벌판에 버려져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래서 나는 이러한 느낌을 적막이라고 이름 붙였다. - 루쉰, '자서(自序)' 중에서

루쉰은 일본 유학 시절 러시아 첩자 노릇을 하던 중국인이 일본군에게 붙잡혀 참수 당하는 광경을 찍은 필름(영상)을 보고 의학도에서 문예운동가(문학가)의 길로 전향한다. 그가 보았던 화면 속엔 동족의 죽음을 무기력한 표정으로 방관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있었다. 루쉰은 어리석고 나약한 국민은 비록 체력이 튼튼하고 오래 산다 해도 고작 구경꾼 노릇밖에 하지 못함을 깨닫고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중국인들의 의식을 개조하기 위해 문예운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루쉰의 고독한 외침에 대한 응답은 찬성도 반대도 아닌 무관심이었다. 루쉰은 이를 "끝없는 벌판에 버려진 듯한 적막(寂寞)"이라 이름 붙였다. 끝없는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한 적막감은 인간에게 공포와 무력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기형도 시인은 '폐광촌(廢鑛村)'이란 시에서 '적막이 어둠보다 더욱 짙은 공포'라고 적기도 했다.

이처럼 무관심과 적막이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유는 (루쉰이 지적한 대로) 다른 사람이 찬성해 주면 계속 전진할 것이고 반대하면 자극되어 더 분발하겠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악플도 관심의 표현

최근 도를 넘은 악플을 견디지 못한 연예인들이 누리꾼들을 고소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데 만약 루쉰이 살아 있다면 이런 현상에 대해 뭐라고 얘기할까? 무관심이 비난보다 더 무섭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한 루쉰이기에 무플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악플에 대해 고마워할까? 아니면 그 역시 단호하게 악플을 배격할까?

루쉰이 무덤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와 대답하지 않는 이상 그가 악플을 고마워할지 배격할지 알 순 없지만 적어도 오늘 인용한 구절만 놓고 보면 마치 20세기의 인물인 루쉰이 21세기의 누리꾼들에게 악플에 대처하는 지혜를 넌지시 일러주는 듯하다.

특히 "한 사람이 어떤 주장을 했을 때 다른 사람이 찬성해 주면 계속 전진할 것이고 반대하면 자극되어 더 분발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속에서 외쳤는데도 어떠한 반응도 없다면, 즉 찬성도 반대도 없는 경우에는 마치 자신이 끝없는 벌판에 버려져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란 구절은 요즘 인터넷에서 통용되는 "무플이 악플보다 더 무섭다"는 말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굳이 루쉰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관심이 동서고금에 걸쳐 인류의 수명을 갉아먹는 적으로 군림해왔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서머셋 모옴은 "사랑의 비극은 죽음이나 이별이 아닌 무관심"이라 했고, 도정일 교수도 무관심주의가 만연한 사회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냉소적인 인간이 양산되어 공동체의 공존, 유대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악플도 일종의 관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루쉰의 말대로) 반대 의견까지 포용해서 분발을 촉구하는 자극제로 삼는 것은 어떨까? 물론 악플도 악플 나름이겠지만 적어도 악플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보다 한결 여유롭게 대처하는 편이 양측 모두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익명성 박탈이 핵심

그렇다고 악플을 모두 용인하자는 말은 아니다. 도를 넘은 관심이 광적인 집착으로 이어질 때 스토커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탄생할 수 있음을 우리는 직ㆍ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하물며 인터넷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태생적으로 인터넷이란 익명의 장(場)은 기회와 위기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모순적인 공간이다. 익명을 전제로 활동하는 누리꾼들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언제든지 천사에서 악마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표변할 수 있고, 건전한 공론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게시판은 지배권력의 여론조작에 언제라도 오염될 수 있다.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인터넷 댓글의 자정(自淨) 기능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것은 법이나 물리력이 아닌 누리꾼들 간의 상호 존중과 배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법이 없더라도 악플 따위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악플이 근절되지 않는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법적인 규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일차적인 목적은 물리적인 처벌이 아닌 익명성을 박탈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악플이 직접적인 이해관계나 원한이 아닌 무의식적인 습관이나 익명에 기댄 일탈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악플은 굳이 법적인 처벌이 아니어도 아이피 추적이나 신상공개 등의 익명성을 박탈하는 조치만으로도 방지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연예인이 악플을 단 누리꾼을 고소하고 보니 초등학생인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일부 연예인들은 인신공격성 악플에 진지하고 재치 있는 답변을 달아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이미지가 반전된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익명성을 박탈당한 뒤에도 계속해서 악플을 달거나 이름을 바꿔 악플을 다는 네티즌들이 있다면 그 이후에 발생할 문제는 전적으로 누리꾼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경고 조치를 당하거나 익명성을 박탈당한 뒤에도 악플을 다는 것은 사실상 스토커에 준하는 범죄 행위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악플은 인터넷이 건전한 공론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다. 악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누리꾼들 간의 상호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 그래도 안 되면 아이피 추적이나 신상공개 등을 통해 익명성을 박탈하고 경우에 따라선 일대일 대면으로 직접적인 소통을 시도할 필요도 있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마지막으로 법적인 조치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루쉰 소설 전집

루쉰 지음, 김시준 옮김, 을유문화사(2008)


태그:#루쉰, #악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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