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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방영된 KBS <미녀들의 수다>에서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단점을 얘기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날선 지적에 "아마도 그 이유는 각별한 애국심 때문일 것"이란 흥미로운 답변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엿보이는 이 대답은 10점 만점에 5점짜리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제 아무리 관용적인 국민이라도 애국심이 결여되어 있지 않는 한 자국에 대한 비난에 호의적일 리 없을 테니까.

 

따지고 보면 <미녀들의 수다> 역시 그 본질은 애국심의 경연장이 아닐까? 일부 미녀들은 외국인들이 자국을 비난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리적인 문제로 대립각을 세우거나 인접국끼리 미묘한 경쟁심리를 표출할 때면 그녀들에게서도 만만찮은 애국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당초 제기된 논점 자체가 애국심의 유무가 아닌 외국인의 비판을 수용하는 자세에 관한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애국심은 외국인의 비판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고 다른 나라 역시 존중할 줄 아는 태도라는 주장에도 십분 공감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단점을 얘기하는 것을 싫어한다"거나 "아마도 그 이유는 각별한 애국심 때문일 것"이란 주장이 좀더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그 배경을 이루는 개인주의, 내셔널리즘, 애국심 등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잘 알다시피 서양에 비해 개인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동양에선 여전히 강력한 내셔널리즘(국가주의, 국민주의, 민족주의)이 작동하고 있다. 그로 인해 개인은 집단(국가, 민족, 국민 등)에 종속되어 집단의 이익이 곧 개인의 이익이란 등식을 내면화하는 삶을 강요받는다.

 

이는 서양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특히 미국은 9.11테러 이후 내셔널리즘이 강화되는 추세이고 유럽 역시 배타적 민족주의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다만,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깊이 뿌리 내린 서양의 경우 집단주의에 대한 심리적 저항선이 공고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다.

 

자연히 내셔널리즘과 연계되는 애국심에 있어서도 동서양의 차이가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헌법애국주의다. 하버마스가 주장한 이 개념은 유대인 학살의 원흉인 독일 내셔널리즘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선동적인 내셔널리즘을 일체 금기시하고 헌법을 매개로, 즉 헌법을 올바르게 준수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애국심을 고취한다. 따라서 애국심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우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똑같은 얘길 하더라도 배경 지식의 유무에 따라 어감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미녀들의 수다>를 포함해서 주한 외국인들의 발언이 종종 구설수에 오르거나 반대로 한국인들의 말과 행동이 그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서로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 아무리 한국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고언이라 해도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면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결국 그것이 건설적인 비판으로 수용되느냐 아니면 인종적ㆍ문화적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한 작위적 행위로 비치느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진정성"이다.

 

과거에도 한국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었음을 강변하며 쓴소리를 쏟아내거나 한국을 비판하는 책을 쓴 외국인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 진정성을 인정 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 이유가 한국인의 배타성, 편협성 때문인지 비판하는 목소리에 진정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를 비판한다는 것, 특히 다른 나라를 비판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련을 감수해야 하는 모험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을 비판하는 외국인들은 자신의 발언에 무거운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들 역시 외국인들의 건설적인 비판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한국인과 주한 외국인은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요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생산적인 담론을 나눈다면 밝은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태그:#미녀들의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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