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봤던 몇편의 B급 영화들 중 이런 내용들이 있었다. 은둔하고 있는 각종 무술과 격투기의 고수들이 어떠한 계기로 의해서(대부분은 악당이나 돈 많은 사람에 의해서) 모이게 되고 그들은 목숨을 건 사투를 펼치게 된다. 주인공을 제외하면 그들이 왜 모여야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는지에 대한 개연성 따위는 기억 나지도 않는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이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목숨을 건 토너먼트에서 패하는 고수들은 차례로 죽음을 당하게 되고, 결국에는 주인공이 승리한다는 그런 내용들... 어릴 적 나는 고수들이 왜 저렇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할까라는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꽤나 재밌게 영화를 즐겼던 기억이 있다.

 

매니아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B급 영화를 즐기는 내게 B급 영화의 매력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면 신선함과 재기발랄함 그리고 뻔뻔함이라고 대답하겠다. 많은 자본이 들어가고 흥행에 성공해야하는 A급 영화들과 달리 실험적인 내용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도할 수 있는 B급 영화는 그 영역만의 신선함과 재기발랄함이 있다. 그리고 A급 영화에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어설픔과 인과관계의 실종 따위가 뻔뻔함이라는 매력아래 또 하나의 재미로 포장되어 나타난다. 어설프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그런.

 

요 근래 가장 재밌게 본 B급 영화는 바로 로버트 벤 가렌트 감독의 영화 <분노의 핑퐁>이다. 이소룡의 광팬을 자처하는 감독이 그의 영화 <용쟁호투>에서 모티브를 따오고 원제인 'Balls of fury'는 <정무문>의 영어제목 'Fist of fury'라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충분히 재밌게 즐길 수 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들 그리고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들의 연속 하지만 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이라는 익숙함은 이내 하지만 2%부족한 이라는 뻔뻔함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영화가 내게 특별한 이유는 어릴적 향수를 불러주는 토너먼트 형식을 차용한 그런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격투가 아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탁구로 조금 꼬아놨지만 말이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신동이었던 주인공이 동네 탁구 대회에서 어이없게 탈락하는가 하면, 탁구를 하기위해 불필요해 보이기까지한 근육을 키워놓은 의문의 근육남이나 무기를 수없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을 죽일때는 꼭 독침을 이용하는 악당들의 모습은 어이없음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만든다.

 

최소한의 인과관계를 제외한다면 큰 줄기에서의 인과관계와 개연성이 부족한, 그냥 진행하기만 바쁜 이 영화는 그냥 보여주고 또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이해하려하지마라 그냥 즐겨라고 말하는 듯이 그저 뻔뻔하게 진행하는 이러한 방식은 구속의 틀을 미리 깨버리기 때문에 그만의 신선함을 던져 준다.

 

이 영화가 던져주는 가장 큰 재미는 바로 캐릭터이다. 댄 포글러가 연기한 메인 캐릭터 랜디 데이토나는 <스쿨오브 락>이나 <나초 리브레> 등에서 보아왔던 잭 블랙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다. 부족하고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외모는 물론이고 결코 1류가 아니지만 1류 못지 않은 자신감이라는 특징도 비슷하다. 그 뿐인가 영화 내내 보여주는 능청스럽기 그지없는  연기는 실제 성격이 아닐까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이 외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매기 큐가 연기한 매기 웡은 <미녀 삼총사>시리즈나 < DOA >에서 많이 봐왔던 여전사의 모습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워큰이 연기한 악당 펭이나 조지 로페즈가 연기한 FBI 요원들의 모습 역시도 많은 코미디 영화에서 반복되어 왔던 어설픈 캐릭터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기존의 영화들과 이 영화에서 그 캐릭터들의 성격에 큰 차이는 없다. 단지 A급 혹은 B급이라는 영화의 특징과 주연과 조연의 차이에서 오는 역할 비중의 문제일 뿐.

 

등장시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이고 예상 가능한 캐릭터였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들은 더 부족한 더 어설픈 모습으로 진화한다. 물론 영화가 그런 것처럼 특별한 인과관계나 개연성은 캐릭터에도 부족하다. 그렇기에 자유롭게 캐릭터들은 더 어설픈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소소한 재미라고 한다면 미국이 주 무대이고 탁구와 중국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임에도 한국적 요소가 자주 노출된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시작 장면이 88 서울올림픽인가 하면 대결 중간에 북한군으로 보이는 병사들도 출연하며 간간히 한국어가 들리기도 한다. 물론 완벽하지 못할뿐더러 '서울관보'와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어설픈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결국 랜디는 토너먼트에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영화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뻔한 결론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정말 뻔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이런 결론이 우리에겐 이 마저도 희망차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의가 승리하는게 아니라 승리하는게 정의가 되어가는, 그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이제는 무엇이 정의라고 말하기도 점점 힘들어져가는 세상에 강력한 스매싱 한번 날려보는건 어떨까?

 

물론 우리가 그런다는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추천한다. 우리 같이 힘없고 어설픈 바보들이 세상에 날리는 스매싱 한번 구경하시길 바란다.

2009.03.17 09:48 ⓒ 2009 OhmyNews
B급 영화 분노의 핑퐁 댄 포글러 매기 큐 BALLS OF F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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