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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 명령을 받은 리처드 윌리암슨 주교가 2월 25일 공항을 황급히 빠져나가는 가운데 인터뷰를 하려는 기자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는 모습
▲ YTN 국제뉴스 동영상 캡쳐 추방 명령을 받은 리처드 윌리암슨 주교가 2월 25일 공항을 황급히 빠져나가는 가운데 인터뷰를 하려는 기자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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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가 지난 2월 19일(현지시간) 홀로코스트 부인 발언으로 교황청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리처드 윌리암슨 주교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고, 그는 25일 기자들의 질문을 피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아르헨티나 내무부는 "역사적 진실을 부인하는 그의 발언은 아르헨티나 사회와 유대민족 공동체, 인류에게 심각한 상처를 안겼고 더 이상 신학교 교장의 지위에 있지 않다는 이민성 결정에 따라 10일 내에 떠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밝힌 바 있다.

나치 학살 부인한 주교,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당하다

한편, 페데리코 롬바르디 교황청 대변인은 이 같은 아르헨티나 정부 결정에 대해 공식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번 추방 사건은 사면초가에 놓여 있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을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태도와 조치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리처드 월리암슨 주교는 지난 1월 24일 로마 교황청이 20년 전 교황의 승인 없이 주교에 올랐다는 이유로 파면시켰다가 복권시킨 4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문제는 그가 지난달 21일 스웨덴 TV 인터뷰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600만명이 아닌 20만~30만명에 불과하며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사람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홀로코스트 산업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당시 최소 100~300만명의 유대인이 죽었다고 본다.

뿐만 아니다. 이번에 복권된 4명 가운데 부주교로 승급된 오스트리아 성직자 게르하르트 마리아 바그너는 2005년 미국을 강타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동성애자에 대한 신의 처벌'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저 우연이나 부주의로 생긴 일일까

비난이 거세지자 교황청은 성명을 내어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는 완전히 복권되기 전에 자신의 발언을 철회해야 할 것"이라고 수습에 나섰다. 그리고 교황청은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의 복권을 승인하기 전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인물인 줄 몰랐다"는 변명을 덧붙였다. 정말 몰랐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몰랐다는 것도 죄다.

무슬림과 인디언에 대한 비하 발언, 동성애자 혐오 발언 등의 전력으로 볼 때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둘러싼 이런 문제들을 그저 우연이나 부주의만으로 여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있다.

일부 언론들은 이번 문제를 교황의 문제가 아니라 교황 주변의 인물들이 교황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해 생긴 일로 치부하는데, 누가 보아도 이번 일은 그 정도로 덮을 일이 아니다. 교황 자신,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교황제도를 포함한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히틀러 제국 시대의 교황 비오 12세가 여전히 나치의 만행을 묵인 또는 방조했다는 비난을 받는 것, 그리고 교황청은 당시 비오 12세가 겉으로 표현하진 못했지만 내심으로는 히틀러를 적으로 보고 있었고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애쓴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애쓰는 광경이 새삼 머릿속에 교차한다.

반유대주의·극보수 성향의 'SSPX'를 끌어안으려는 교황

이번에 교황이 복권시킨 이들 4명은 모두 이른바 'SSPX'(성비오10세회) 소속의 인물들이다. 이 집단은 가톨릭 내 극보수파로 분류되는데, 때문에 그 성향을 교황청이 모를래야 모를 수 없는 일이다. 좋게 봐주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이들의 문제를 알고서도 껴안으려는 너른 아량을 베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추종하는 교황 비오10세(1835~1914)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카톨릭 지성인들을 상대로 일종의 신학적 매카시즘이라고 불리던 일제 단속을 실시하고, 현대의 이성주의에 굴복했다며 수하의 사제들을 비난해댄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회에서 담당하던 바티칸 신문 <시빌타 카톨리카>는 유대인들을 현대 사조의 주도자로 몰아붙였다. 이 신문은 심지어 1886년 "유대인들이 줄곧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해 왔다"고 주장한 기사까지 실었다.

이런 유구한 맥락 속에서 리처드 윌리암슨 주교의 그 문제 발언이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줄 몰랐다고 변명하면 다 해결되는 것일까. 그 정도는 가톨릭의 역사에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교황도 많은 죄를 지을 수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 역사학 교수로 문화비평가이자 저술가인 게리 윌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데, 2000년 6월 기념비적인 책을 내놓았다. 바로 <교황의 죄>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다. 교황을 그렇게 신랄하게 비판하고서도 가톨릭 신자로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답으로 그는 2003년 8월 <내가 가톨릭 신자인 이유>를 썼다.

그런데 이에 대한 답은 사실 <교황의 죄> 머리말 첫 문단에서 거의 다한 것이나 다름없다.

"가톨릭인들은 교황도 많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일깨우던 건전한 옛 관행을 잃어버렸다. '최후의 심판'을 그린 화가들은 지옥의 불길 속에 교황관을 쓴 인물을 그려 넣어 교황을 영원히 단죄받은 대죄인으로 묘사하곤 했다."

지금은 무신론자이지만 한때 가톨릭 신자였고 양심과 이성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일 줄 아는 종교인들을 존중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비판적인 목소리를 가톨릭 사제들과 신자들의 입으로도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덧붙이는 글 | 최광은 기자는 사회당 대표입니다.



태그:#교황, #반유대주의, #나치, #리처드 윌리암슨, #성비오10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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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고 비교정치, 한국정치 등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복지국가연구센터에 적을 두고 있다. 에식스 대학(University of Essex, UK)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박종철출판사, 2011) 저자이고,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 평생회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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