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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권분립의 와해는 민주주의가 망가질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삼권분립은 자유민주주의에서 보편화된 통치조직원리이다. 따라서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 나라는 민주주의국가라고 할 수 없다. 이를테면 북한과 같은 나라에서는 삼권분립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삼권분립을 헌법에 명기하고 있다. 입법권은 국회에(40조),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88조 4항), 그리고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101조)에 속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상호 균형과 견제를 통해 국가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막으려는 민주주의적인 장치이다.

 

지난 2004년 3월 12일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것은 의회 권력이 남용된 극적인 사례이다. 당시 국회의 탄핵안 가결은 대통령의 업무를 3개월 동안 중지시켰고 다수 국민의 저항을 초래하여 촛불집회로 이어지는 등 상당한 국정 혼란을 야기했다. 하지만 3개월 후 헌법재판소가 이를 기각함으로써 의회의 권력 남용을 제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의 집중과 남용은 대부분 행정부에 의해 발생한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에게는 국가 조직의 인사권과 공권력의 집행권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독주하게 되면 먼저 경찰과 검찰 등의 준사법기관이 도구화된다. 그리고 국회 내 집권당부터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어 의회 권력도 위축된다.

 

이럴 때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는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사법부마저 무너지게 되면 그 나라의 민주주의는 끝장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박정희나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권력의 시녀'로 타락한 검찰이나 '권력의 거수기'로 전락한 국회의 모습을 먼저 보았다. 그리고 이어서 사법부마저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한국의 판사들은 권력에 굴복한 나머지 숱한 오판을 남겼다. 그들에게 법관이라는 자존심과 사명감은 전혀 없어 보였다.

 

 

상식과 괴리된 법원의 판결, 공동정범이론 적용은 견강부회  

 

이명박 정부 들어 경찰이나 검찰은 일찌감치 도구화되었고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자기 목소리를 낮춘 지 오래이다. 그리고 법원마저 정부 권력의 의도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다. 최근 법원이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은 법원의 독립성에 의구심이 들도록 한 사건이었다.

 

19일 서울중앙법원 형사2단독부(부장판사 이림)는 인터넷 상에서 조중동 광고지면 불매운동을 벌인 누리꾼 24명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것은 "(광고주에게) 항의를 하더라도 업무를 마비시킬 정도로 하면 위법이다"는 검찰의 주장에 재판부가 그대로 동의해 준 판결이다. 법원은 검찰의 취지를 거의 수용하여 누리꾼들에게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유죄판결을 내린 것이다.

 

"피고인들은 광고 중단 요구가 위력에 의한 업무방해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위력이란 유· 무형과 관계없는 폭력으로, 피해 기업들은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아 영업에 지장을 받거나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따라서) 위력을 행사해 업무방해를 한 것이 인정된다."(재판부 판결문)

 

법률적인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대관절 어떻게 이런 논리가 가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재판관은 '위력이란 유· 무형과 관계없는 폭력'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인가? 세상에 유· 무형과 관계없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다는 건지. 게다가 유형도 아니고 무형도 아니라면서 '폭력'이라는 돌발적 판단은 또 무엇인가? 이것이야말로 말장난에 불과한 기언(綺言)이지 도저히 한 국가의 판결문으로 보아줄 수가 없는 수준이다.

 

또한 이것은 오직 법에 의해 존재 이유가 주어지는 법원이 스스로 법률을 무시하는 자업자득의 판결을 내린 것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된다. 현대사회에서 소비자를 보호하려는 추세는 자본주의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강화되고 있다. 한국도 '소비자보호법'으로 소비자의 자유로운 활동을 명백히 보장하고 있다.

 

이 법률에서는 '소비자 스스로 권익을 증진하기 위하여 단체를 조직하고 이를 통하여 활동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2장 4조 7항) 나아가 '국가와 자방자치단체는 소비자의 건전하고 자주적인 조직 활동을 지원· 육성'할 것을 책무로 규정하고 있다. 요컨대 현대사회에서 소비자의 자유로운 단체 활동은 당연히 보장될 뿐만 아니라 국가와 자방자치단체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할 사항인 것이다.

 

또한 소비자 불매운동은 소비자운동의 핵심 사항이다. 따라서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세계의 상식에 속한다. 이른바 선진국들에서 불매운동은 지금도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나라의 소비자도 이로 인해 기소,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림 판사는 재판이 끝난 후 "상식적인 판결을 내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다.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그의 판결은 상식과는 한참 괴리된 것이었다. 이 판사에게 다음 문장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소비자는 입법· 행정상의 청원· 진정 등의 집단행동으로 정책적 요구를 행하고 직접 기업을 상대로 한 불매운동을 벌임으로써 부당한 소비를 줄여 나갈 수 있다."

 

이것은 가장 상식을 많이 담고 있다는 책 백과사전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문장이다. 이 판사의 상식은 백과사전의 상식과는 다른 모양이다. 소비자 불매운동을 제재하는 것은 보편적 상식에 어긋난다. 나아가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기본적 자유를 억압하는 악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소비자보호법이 최종 개정된 것은 불과 몇 달 전인 2008년 12월 26일의 일이다. 그런데 법원은 개정안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를 전면적으로 무시하는 판결을 내린 셈이다. 법원이 이 정도의 법률적 판단을 하지 못할 리는 없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번 판결은 법률적 판단 이전에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다음으로 법원은 인터넷에 불매운동 카페를 개설한 누리꾼들에게 '공모공동정범' 이론을  적용했다. 공모공동정범(共謀共同正犯)이란 '복수인이 범죄를 공모하고 그 중 특정인에게 범죄를 실행시켰을 때 그 실행을 분담하지 않은 자도 공범이 된다'는 형사법 논리이다.

 

이는 누리꾼들의 불매운동이 범죄 구성 요건이 된다는 전제에서 나온 판단이다. 그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사실 인정할 수 없는 거지만) 누리꾼들은 직접 불매운동에 가담한 것도 아닐 뿐더러 불매운동을 공모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없다.

 

누리꾼들은 불매운동을 권유, 호소, 설득하는 글을 개인적으로 올렸을 따름이다. 이것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공범으로 몰고 간 법원의 판단은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사관과 신사' 아닌 '시녀와 환관'이 된 '사법세트'

 

이명박 정부 들어 검찰은 물론이고 법원마저 지난 '잃어버린 10년' 동안 하지 않던 짓을 새로이 하기 시작한 것 같다. 지난 2005년 11월 황우석 사태 때를 생각해 보자. 그때 '아이 러브 황우석' 카페가 중심이 되어 MBC 피디수첩에 대한 조직적이고 노골적인 광고불매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피디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 전화까지 걸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처벌 받지 않고 넘어갔다.

 

작년 미국 LPGA는 영어를 못하는 선수의 출전을 제한하겠다고 했다가 철회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해괴한 방침을 철회토록 한 것은 광고 불매운동의 힘이었다. 캘리포니아 주 의회 의원 테드 류를 비롯한 소비자들은 “만약 LPGA가 이 방침을 하지 않으면 LPGA 스폰서 기업을 대상으로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압력을 넣음으로써 방침 철회를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1994년 검찰 공안부는 내란죄로 고발된 전두환·노태우 등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내린 바 있다. 당시 장윤석 서울지검 공안1부장(현 한나라당 의원)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무엇이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성공지상주의의 가치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번 법원 판결은 1994년의 검찰처럼 상식적인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검찰은 쿠데타를 하더라도 성공하면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법원은 소비자운동의 경우 반대로 일정한 영향력을 갖게 되면(즉 성공하면) 처벌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도대체 한국의 검찰과 법원은 무엇을 기준으로 사법 행사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법 행사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 정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법원마저 정치적 판결을 내리기 시작한다면 이 나라의 삼권분립은 와해될 것이고 이는 곧 민주주의의 죽음을 의미한다. 검사와 판사는 민주사회의 품격 있는 구성원이다. 영화 제목을 빌려 말한다면 그들은 국가의 '사관과 신사' 같은 엄정한 존재라야 한다. 그런데 '사관과 신사'가 되어야 할 검사와 판사가 국민 눈에는 '시녀와 환관'처럼 비쳐지는 것은 참으로 비애스러운 일이다.


태그:#삼권분립, #광고불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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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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