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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06년 6월, 사표를 썼다. 앞으로 3개월만 더 참으면 입사 10년인데, 그러면 금 한 냥짜리 메달도 하나 받을 수 있는데, 다른 곳으로 옮기더라도 9년 몇 개월보단 더 폼 나는데…. 부서 내 결제가 다 끝난 사표를 인사과로 가지고 가는 동안에도 사표를 내지 않아도 좋을 이유를 수도 없이 떠올렸다. 하지만 난 어느새 인사과장과 자리를 마주했고, 마지못해 내민 내 사표를 받아 든 인사과장이 한마디 했다.

"고마워요, 이 과장."
"…"

인사과장이 내 사표를 고마워하게 된 데는 <오마이뉴스>의 역할이 컸다. 시간을 거슬러 2000년 4월 30일, 당시 신생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아빠, 내 책은 내가 고를래요'라는 제목의 첫 기사를 보냈고, 톱기사로 채택이 되었다. 기사의 조회수는  400에, 댓글은 전무했지만, 기자라는 호칭과 조회수, 그리고 늘어가는 원고료 때문에 기사 쓰기에 재미를 붙였다.

그 후로 화장실이나 장난감, 놀이공원 등을 소재로 아이들과 관련된 사는 이야기를 주로 썼고, 조회수에 대한 욕심에 정관수술의 경험까지 털어 놓는 등 한동안 <오마이뉴스>에 푹 빠져 살았다.

'이 어려운 세상에 귀 막고, 눈 가리고 육아일기나 쓰느냐'

내 삶의 다양한 소재들이 기사가 되었다.
 내 삶의 다양한 소재들이 기사가 되었다.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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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에 <오마이뉴스>가 선정한 올해의 뉴스게릴라 상(사는 이야기 부문)도 받았다. 회사에서 내가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는 시민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업무시간 중에 가끔 기사를 작성한 적도 있지만 회사에서는 시민기자 활동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방송국에서 시민기자 활동과 관련된 촬영을 나왔을 때는 회사 안에서 촬영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도 봐 주었다. 회사 사보에는 회사 일도 열심히 하면서(!), 여가 시간에 기사를 쓰는 부지런한 직원(!)으로 소개까지 되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댓글에 '이 어려운 세상에 귀 막고, 눈 가리고 육아일기나 쓰느냐'며 나무라는 글을 남겼다. 당시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정부가 폭력으로 대응하여 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던 때였다. 그 댓글은 사는 이야기 일색이던 내 기사의 내용이 사회문제에 대한 감시와 지적 위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여러분들의 댓글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오마이뉴스> '올 해의 뉴스게릴라 상'을 받을 때만 해도 '시민기자'활동을 하면 다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다.
 <오마이뉴스> '올 해의 뉴스게릴라 상'을 받을 때만 해도 '시민기자'활동을 하면 다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다.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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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이후 주로 여성, 언론 그리고 노동분야에 대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기보다는 기사를 쓰면서 해당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경우가 더 많았다. 인식의 전환은 내게 실천을 요구했고, 시민단체 활동에도 참여하게끔 만들었다. <오마이뉴스>가 내게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을 갖게 해 줬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그러다 딱 걸렸다. 회사에서 변화된 내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부실한 민방위 교육을 지적하는 적나라한 기사를 썼는데, 오름기사로 채택이 되어 조회수 20,000에 댓글이 177개가 달렸다. 그런데 그 기사를 민방위 교육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보고, 내게 연락을 해 왔다. 기사 내용에 문제가 있다며 기사를 내려 줄 것을 요구했고, 난 당연히 거절했다. 반론이 있으면 시민기자로 등록해서 기사로 해달라는 말과 함께.

그러자 그는 반론 대신 내가 다니는 회사의 직장 예비군 중대장(대기업에는 직장예비군이 조직되어 있다)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중대장이 찾더니 그 기사를 쓴 경위를 따져 물었고, 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 일 이전에는 회사에서 난 <오마이뉴스>에 사는 이야기를 쓰는 약간 특이한 직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일 이후로 중대장과 그가 속한 인사부서에서는 내가 <오마이뉴스>에 쓴 500건의 기사를  다 확인했고, 경악했다.

내 기사 관통하는 반기업적 정서...그들은 경악했다

민방위 교육 시간에 모두 잠든 광경. 이런 걸 보고 시민기자로서 어떻게 기사를 쓰지 않을 수 있었으랴.
 민방위 교육 시간에 모두 잠든 광경. 이런 걸 보고 시민기자로서 어떻게 기사를 쓰지 않을 수 있었으랴.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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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 장관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어 그의 노동관에 시비를 걸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는 발전노조 위원장을 찾아 가서 인터뷰를 하는 시민기자를 중간관리자랍시고 데리고 있었으니. 내 기사를 관통하는 반기업적 정서를 인사부서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 당시 회사에서는 노조 설립과 해산 문제로 갈등이 있었는데, 그 일에 내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새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회사가 그냥 넘어가기에는 내가 저지른 일들이 너무 많았고, 해고를 하기에는 반대로 내가 한 일이 너무 없었다.  결국 회사에서는 내게 은근히 사표를 권했다. 사표를 낼 이유가 없던 나는 당연히 그냥 무시하고 말았지만, 회사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경력 사원을 채용하더니 내 일을 그에게 맡겼고, 내게는 새로운 일을 맡겼다. 부서장은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얼굴 표정만으로 내게 그 '다른 뜻'을 다 전달했다. 새로운 일은 내게 맞지 않았고, 난 겉돌기만 했다. 짐작하겠지만 이런 일이 있으면 나 자신보다 부서 내의 다른 사람들이 더 불편해진다. 회사가 노린 것이 그런 것이었겠지만, 난 결국 마음을 정했다. 사표를 들고 인사과로 찾아 갔고, 인사과장은 진심으로 고마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이런 일로 회사를 그만 둔 사람을 동종업계에서 뽑아 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해외로 눈을 돌렸고, 마침 예전 동료들이 많이 진출해 있던 싱가포르에서 직장을 구했다. 싱가포르에서 직장생활을 하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을 좀 더 수월하게 할 줄 알았다. 새로운 나라에서의 새로운 삶이니,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인가. 500을 갓 넘긴 기사를 단 기간에 1,000을 넘기겠다고 각오를 했다.

그런데 웬걸, '국경없는 기자회'에서 선정한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싱가포르는 조사대상 173개국 가운데 144위(2008년)란다. 정부에 대한 싫은 소리 하나만으로 추방까지도 가능하단다. 싱가포르에 처음 와서 동료들에게 들은 첫 충고가 택시기사에게 싱가포르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거였다. 신고한다고. 게다가 나라만 싱가포르일 뿐, 회사는 한국인 회사라 기사 쓰는 게 조심스럽다. 같은 이유로 두 번 쫓겨날 수는 없으니까.

그럼 이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을 안 하기로 했느냐고? 물론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 동남아에서 마사지걸 고르는 법을 알려주기에, 싱가포르에서 실제로 발마사지 받고 나서 그 경험을 기사로 썼고, 한국에서 아파트값 문제로 시끄러울 때, 싱가포르의 반값아파트를 취재하기도 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계속 기사를 쓰고 싶으냐고?

싱가포르에서는 청렴한 공무원들 때문에 모기가 없다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고, 싱가포르가 모기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는지 조사해서 기사를 썼다. <조선일보> 기사(왼쪽)와 내 기사 중 일부 이미지(오른쪽)
 싱가포르에서는 청렴한 공무원들 때문에 모기가 없다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고, 싱가포르가 모기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는지 조사해서 기사를 썼다. <조선일보> 기사(왼쪽)와 내 기사 중 일부 이미지(오른쪽)
ⓒ 이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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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싱가포르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기사를 쓴 걸 보고, 기사를 통해 바로 잡아 주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해외통신원들은 한국 언론들이 외국 상황에 대해 왜곡 보도 하는 걸 감시할 필요가 있다.) 군가산점 문제나 여성부 폐지 논란, 간통제 논란 등 평소 관심 있던 분야에 대한 의견도 주저 없이 내놓았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에는 내가 어디에 발 딛고 사느냐가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마이뉴스> 기사 때문에 그런 일을 겪고도 계속 기사를 쓰고 싶으냐는 질책이 벌써부터 귓전을 때린다. 내가 기사쓰기를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나를 시민기자가 되게 만든 근원적인 고민이 다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시민기자 활동을 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이런 답을 써서 보낸 적이 있다.

"내 아이들이 살아 갈 가까운 미래가 반칙이 통하지 않는 사회,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사회,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성 차별을 포함해서 모든 차별이 사라지는 사회, 노동하는 이들이 존중 받는 그런 사회의 모습을 갖추길 바란다. 거기에 내 미력한 힘을 보태고 싶다. 그게 내가 시간을 쪼개어 기사를 쓰는 이유다."

지금도 이 답은 유효하다. 하지만 세상은 내 바람과는 거꾸로 가고 있으니, 기사 쓰기를 여기서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회사에서 잘리더라도, 싱가포르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더라도 시민기자 활동을 쉽게 그만 두지는 않으리라. <오마이뉴스>가 벌써 창간 9주년이란다. 그 말은 내가 <오마이뉴스>에 글 쓰기 시작한 지 벌써 9년이 됐다는 뜻이다.

내게 있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생활 9년은 회사에서 잘리는 아픔을 감수해도 좋을 만큼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직은 내가 세상을 바꾸진 못했지만, <오마이뉴스>로 인해 최소한 나 자신은 많이 바뀌었으니까. 이젠 내가 세상을 바꿀 차례다. 기대하시라.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때문에 생긴 일' 응모글



태그:#오마이뉴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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