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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직도 안 자?"
"조금만 더 있다가요. 아직 생나무란 말이에요. 잉걸로 올라가는 것까지는 보고 자야지요"
"얼마나 대단하길래 잠도 설쳐가면서 그 야단이야? 당신 아무래도 오마이뉴스 중독이야!"

몇 년 전 매주일 한 번씩 <한국어교실 이야기>라는 연재기사를 쓰면서 덧붙여서 하루에 하나씩 기사를 올리겠다고 열을 낼 때 우리 남편이 나에게 한 이야기다. '컴퓨터 중독', '인터넷 중독'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오마이뉴스 중독'이라니 내가 그 정도였나 싶어서 지금은 웃음이 나온다.

처음 오마이뉴스를 찾게 되었던 동기는 그리 순수하지 못 했다. 일간지에 게재된 기자의 글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함께 생각을 같이 하고 함께 기금을 모으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것이 오마이뉴스였다. 그당시 한국어가 미국 내 고등학교 AP 과목으로 채택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동참이 필요했는데 한국어의 세계화에 대한 제언 이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글을 올렸고 좋은기사 원고료'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우리는 한국어 AP 채택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로 했던 것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일반 일간지에 실린 기사의 글에 대해 '기고한 글에 대해서는 원고료를 지불하지 않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기사를 사용하는 일간지보다는 적은 액수라도 대가를 지불하고 기사를 사용하는 오마이뉴스가 훨씬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오마이뉴스 기자 생활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본래부터 글 쓰는 일을 좋아했고 시단에 등단하기도 했고 수필을 연재하고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 글을 올리는 즉시 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거기에 반응을 해 오는 재미에 빠지기는 처음이었다.

다른 기자님들이 이미 언급한 것처럼 '오마이뉴스'의 힘은 대단했다. 본 기자는 미국에 살고 있지만 '오마이뉴스'에 올린 기사를 통하여 라디오 방송과 TV 방송에까지 출연하기도 했다. 한국과의 시차로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방송에 임하기도 하였고,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비록 사진이지만 방송을 통하여 얼굴을 보여드릴 수도 있었다. 솔직히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얼마 안 되는 출연료지만 그것으로 작으나마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수 있었던 점이었다.


한국어 교실 이야기

미국에 살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하는 본 기자의 특성상 대부분의 기사가 우리 학교 한국어 반 학생들의 이야기이다. 계속해서 나름대로 연재 기사를 써 나가던 중에 본격적으로 <한국어 교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기사를 신청하여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기도 했다. 사실, 기사를 쓰지 않고 지나갔으면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업 시간 중의 일들이 기사화되면서 한국어 교사로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그 다음에 다른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는 그것을 예로 들어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되기도 하였다.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의 소재가 된 학생들에게는 꼭 그 기사를 인터넷을 통하여 보여주곤 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기도 하였다. 특히나 본 기자에게 많은 기사거리를 주었던 버클리 대학교 은퇴 교수 중국인 최사운씨나 와인 회사 중역으로 바쁜 틈을 타 꾸준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는 백인 학생 유대봉씨는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명인사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자 하는 후배 교사들을 위해서 그동안 오마이뉴스를 통하여 소개하였던 글들을 모아 <한국어 사세요!~>라는 첫 산문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생나무, 잉걸, 버금, 오름, 으뜸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오마이뉴스가 사용한 '생나무, 잉걸, 버금, 오름, 으뜸'이라는 용어들은 정말 아름답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비록 처음에 '오마이뉴스'라는 이상한 영어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순수한 우리 말을 사용해서 등급을 매기는 것을 보고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오마이뉴스'라고 하면 '오 마이 갓'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본 기자의 글 창고에는 아직도 '생나무'로 남아있는 기사들이 몇 개 있다. 생나무 클리닉을 통하여 수정하여 다시 등록하였으나 다시 '생나무'가 되어 세상에 빛을 보지 못 한 기사들이 남아 있다. 아직은 생나무이지만 좀 더 손을 보면 잉걸이 되어 활활 불타게 될 날들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미련 때문에 잘라버리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생나무가 아니라 잉걸만 되어도 만족하던 것이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버금'으로 글이 올라가면서 서서히 오마이뉴스 중독으로 가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좀 더 나은 기사를 써서 버금으로 올리겠다는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버지니아텍 조승희의 기사로 첫 오름 기사를 썼고, 그 기사에 많은 호응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사진이나 부수적인 사항이 빠진 수필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내용이 괜찮다 싶으면 편집부에서 다른 기자들의 사진을 덧붙여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쓴 오름이나 으뜸에 오른 기사들을 보면서 글들을 기사답게 다듬어가기 시작했다.

오마이뉴스가 준 희망과 좌절

오마이뉴스는 희망과 동시에 좌절도 주었다. 올린 글이 잉걸도 거치지 않고 막바로 버금이나 으뜸으로 갈 때의 행복감은 정말 큰 것이었지만 생나무로 남아있는 글들을 볼 때에 느끼는 절망감 또한 크게 다가왔다. 그러기에 첫 글을 시작한지 5년이 되어 가면서도 중독자처럼 기사를 올릴 때에는 하루에 한 개씩 열심히 글을 올리다가 갑자기 생나무로 판정받게 되면 다시는 오마이뉴스에 글을 안 쓰겠다고 다짐을 하고 1년이 넘게 글을 올리지 않기도 하는 과정을 되풀이한 까닭에 많은 숫자의 기사를 올리지는 못 했다.

오마이뉴스 기자로서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가장 큰 좌절감이 바로 해외통신원 선발에서 낙방했을 때였다. 미국 캘리포니아 쪽에서 활동하는 통신원이 없었고 나름대로 통신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지원하였는데 낙방하자 괜히 다른 통신원들의 기사들에 대해서 흠잡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고 그러느니 그냥 오마이뉴스를 떠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오마이뉴스를 찾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비상금 금고 오마이뉴스 원고료 

산문집 [한국어 사세요~!]를 발간한 후에 이제 2편을 낼 만큼의 글들이 모여졌다. 또한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 한 번도 원고료를 신청하지 않아서 그만큼 원고료도 적립이 되어 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께 생신이나 명절 때면 그 원고료를 헐어서 선물을 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그것은 다른 곳에서 충당을 하고 절대로 헐지 않았다.

어린 시절 열심히 저금한 돼지 저금통에서 동전을 빼서 사탕을 사먹고 싶었던 마음처럼 그냥 원고료 신청해서 다 써 버릴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다. 아무래도 [한국어 사세요~!] 2편 출판비로 사용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몇 번씩이나 오마이뉴스를 떠날 결심을 했으면서도 원고료를 다 빼지 않아서 또다시 오마이뉴스를 찾게 되고 그 덕분에 다시 돌아와 이렇게 '오마이뉴스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때는 오마이뉴스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써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냥 언제까지 될지 모르겠지만 오마이뉴스 중독자로 살아가려고 한다. 이제 다시 우리 어드로이트 칼리지 한국어 반 학생들의 이야기를 남기는데 힘을 다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때문에 생긴일 응모글



태그:#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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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한국어 및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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