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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하버브리지에 호주국기와 NSW주기가 조기로 게양됐다. 호주 abc-TV 화면 갈무리.
 시드니 하버브리지에 호주국기와 NSW주기가 조기로 게양됐다. 호주 abc-TV 화면 갈무리.
ⓒ 호주 ab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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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가 깊은 슬픔에 잠겼다(A state in mourning)" - <시드니모닝헤럴드>
"호주가 울고 있다(Nation weeps)" - <디 오스트레일리안>

사상 최악의 산불 재난으로 호주는 지금 초상(初喪) 중이다. 호주의 입법, 행정의 중심지인 연방의회 의사당 지붕에는 조기가 게양됐고, 호주 아이콘 중의 하나인 하버브리지에도 조기가 걸려있다.

최근 420억 호주달러의 경기부양책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연방의회는 2월 9일 하루를 '피해 가족과 공동체를 잃어버린 주민들을 위한 깊은 애도의 날'(most sincere condolences to suffering families and to lost communities)로 정하고 정치논의를 중단했다.  여야 지도자들은 피해 유가족들에게 추모의 뜻을 전하며 추도연설을 했다.

2월 10일 오전 7시 24분(현지시각) 현재, 공식 집계된 사망자 수는 173명이다. 그러나 전국일간지 <디 오스트레일리안>이 정부비상회의 내용을 입수해 보도한 것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예상되는 사망자 숫자는 230명에 이를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호주 역사상 최악의 산불 재난으로 기록된 1939년 '검은 금요일'의 사망자 70명과 1983년 '재의 수요일'의 사망자 75명의 3배가 넘는 수다. 호주 220년 역사에 전쟁 기간 말고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부상당한 예는 없다.

사망자가 230명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
 사망자가 230명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보도한 <디 오스트레일리안>.
ⓒ 디오스트레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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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 멈추고 조기 게양한 의사당

2월 9일, 캔버라 소재 연방의회 의사당에 모인 의원들 대부분은 검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묵념으로 애도의 뜻을 표한 의원들을 각 당 대표들이 추도연설을 경청했다.

3일 동안 화재방재본부(Country Fire Authority. CFA)에 머물며 산불 재난에 대처하고 있는 러드 총리를 대신해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가 정부 측 대표연설자로 나섰다.

그는 "빅토리아 주 산불 재난은 호주의 평화 시기 역사에서 가장 어둔 날 중의 하루로 기억될 것(Victorian bushfire tragedy will remembered as one of the darkest days in Australian peacetime history)"이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길라드 부총리는 이어 "유감스럽게도 호주 국민들에게 앞으로 더 비극적인 결과를 보고해야 할 것 같다"면서 "이번 산불은 1939년 검은 금요일과 1983년 재의 수요일의 비극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내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시종 떨리는 목소리로 연설을 이어가다가 "이번 산불 희생자 중에 어린이들이 많이 포함됐다"는 말을 하는 도중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길라드 부총리는 호주 정치인 중에서 극좌파로 분류되는 강철 같은 면모를 지녔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화마가 대자연을 삼키고 있다. 호주 abc-TV 화면 갈무리.
 화마가 대자연을 삼키고 있다. 호주 abc-TV 화면 갈무리.
ⓒ 호주 ab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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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험한 것은 '아름다움이 가한 테러'"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의 연설에 이어서 단상으로 나온 말콤 턴불 자유-국민 연립당 당수는 울먹이며 연설을 마친 길라드 부총리를 위로하면서 추모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냉혹한 패러독스(Cruel paradox of the land in which we live)"를 주제로 삼았다.

턴불 당수는 "호주인들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전제한 다음 "그러나 우리가 지난 며칠 동안 경험한 것은 그 아름다움이 가한 테러(the terror of that beauty)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산불은 자연의 가장 무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들에게 최상의 깨우침을 주었다"면서 "자연의 사나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호주 스토리 중의 하나라는 걸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단상에 오른 웨인 스완 재무장관은 "이번 재난은 기후변화의 결과(consequences of climate change)이고 그 상태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산불 재난 기간에 일어난 눈물겨운 스토리를 공개하여 의사당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족과 주택 등 모든 것을 잃은 피해자들이 친구와 이웃을 돕고 커뮤니티를 구출하기 위해서 화재 현장으로 되돌아가다가 피해를 당한 경우도 있다"고 전하면서 "그거야말로 호주의 정신(The spirit of Australia)"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의회 연설 중에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를 보도한 시드니모닝헤럴드.
 의회 연설 중에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줄리아 길라드 부총리를 보도한 시드니모닝헤럴드.
ⓒ 시드니모닝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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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드 총리의 눈물 "이 트라우마는 지워지지 않을 것"

330만 ha의 광활한 지역이 잿빛으로 변하고, 156명의 무고한 생명이 스러지는 비극 앞에서 정치인·각료들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먼저 눈물을 보인 사람은 존 브럼비 빅토리아 주 총리였다. 그는 8일 오전 11시, 공식 확인된 사망자가 26명이라고 말하면서 사망자 숫자가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언급하는 도중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뒤로 돌아서서 한참 동안 감정을 가라앉힌 다음 방송 인터뷰를 이어갔다.

케빈 러드 총리도 9일 아침, CFA 건물 앞에서 <채널9> '투데이' 방송팀과의 인터뷰 도중 "방화범(arsonist)에 의한 발화가 있었다는 보고를 받았다"면서 "그런 끔찍한 행위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냐?"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러드 총리는 이어 "이번에 입은 호주 국민들의 트라우마(마음의 상처)가 아주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는 도중에 다시 울먹였다.

위험한 상황에서 산불 진압을 벌이는 소방대원들. 호주 abc-TV 화면 갈무리.
 위험한 상황에서 산불 진압을 벌이는 소방대원들. 호주 abc-TV 화면 갈무리.
ⓒ 호주 ab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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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실종소식을 전하며 울먹이는 리포터

<채널7> '선 라이스' 진행자 멜리사 도일
 <채널7> '선 라이스' 진행자 멜리사 도일
ⓒ 선 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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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주의 산불 외에 2주 이상 이어지고 있는 퀸즐랜드 홍수까지 겹쳐 방송사의 뉴스룸도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분위기다. 호주 연방정부는 빅토리아 주와 퀸즐랜드 두 곳은 '자연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이런 비극적인 뉴스를 전달해야 하는 앵커들도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7일 아침, 최대 피해지역인 위틀씨에서 '선 라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멜리사 도일은 두 자녀를 잃은 아버지가 "아이들을 찾으러 산꼭대기로 가야 한다"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자 인터뷰 도중 울음을 터뜨렸다.

또 같은 날 생방송 '투데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채널9>의 미케논 라일러는 같은 방송사 소속이었던 뉴스진행자 브라이언 네일라 부부가 바로 그 동네에서 사망한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채널7>의 리포터 노음 비먼은 산불로 집이 타면서 아내가 실종된 뉴스를 직접 전하면서 한참동안 울먹였다. 그러나 9일자 <해럴드 선>은 "비먼의 아내가 검게 그을린 창고로 몸을 피했다가 인근 댐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건졌다"고 보도했다.

호주 법무장관 "방화범은 방화죄 아닌 살인죄 적용해야"

방화범을 살인죄로 처리하는 안을 두고 실시한 <디 오스트레일리안>이 긴급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찬성이 92%로 나왔다.
 방화범을 살인죄로 처리하는 안을 두고 실시한 <디 오스트레일리안>이 긴급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 찬성이 92%로 나왔다.
ⓒ 디 오스트레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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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는 '건조한 대지(Dry Land)'와 '햇볕에 데어버린 나라(Sunburnt Country)'로 정평이 난 지 오래다. 특히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면 황량한 토양과 거친 날씨 때문에 견디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호주에 우울증 환자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번 산불 재난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방화를 즐기는 방화범들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 뉴스를 접한 국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당국자들은 크게 분개하고 있다.

9일 오후, 로버트 맥셀란드 연방 법무장관은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앞으로 방화범을 방화죄가 아닌 살인죄로 처벌하는 걸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방화를 '대량 살인행위'로 표현한 러드 총리의 TV 인터뷰를 상기시키면서 "호주 국민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한편 방화범의 살인죄 적용 사안에 대해 <디 오스트레일리안>이 실시한 긴급 여론조사 결과, 92%가 찬성한 것으로 나왔다. 이런 국민정서의 반응은 로열 커미션(Royal Commission. 한국의 특검과 비슷함)의 방화조사로 이어지고 있다.

10일 오전 <채널7>에 출연한 존 브럼비 빅토리아 주 총리는 "이번 화재 발생 과정의 의혹이 너무 많다"며 "이를 낱낱이 밝히기 위해서 로열 커미션을 연방정부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런 불행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은 로열 커미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거대한 화마 앞에서 위태로운 소방대원들. 호주 abc-TV 화면 갈무리.
 거대한 화마 앞에서 위태로운 소방대원들. 호주 abc-TV 화면 갈무리.
ⓒ 호주 ab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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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의 관심과 위로, 구호지원 이어져

지난 3일 동안 발생한 호주 산불 재난으로 1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아무리 큰 산불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9일 오전 의사당에서 애도 연설을 한 와렌 트러스 국민당 당수는 "요즘 들어서, 왜 사람들이 산불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서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면서 "세상에 그런 멍청한 질문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곳이 그들의 집이기 때문"이라고 반문했다.

트러스 당수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호주사람들이 숲속에서 사는 걸 아주 좋아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호주사람들은 집을 지은 다음에 집 주변에 나무를 심는 게 아니고, 숲속에다 집을 심는다"라는 말이 오래 전부터 전해온다.

한편, 전 세계의 위로와 지원도 이어지고 있다. 9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호주에 위로전문을 보내왔다. 또 뉴질랜드 총리는 소방관 100명을 빅토리아 주에 지원한다고 밝혔다. 뉴질랜드는 2월 10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애들레이드 크리켓 경기장에서 '호주 산불 피해자 구호를 위한 크리켓' 경기도 열 예정이다.


태그:#호주 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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